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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0 : 기로에 선 대한민국,

 

강남의 봄 10 : 기로에 선 대한민국

 

 

 

사랑의 달 5월도 벌써 반이나 지나갔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가정의 날도 지났다. 어린이도 살기 힘들고 어버이도 살기 힘들고 스승도 이젠 스승이 아니고 가정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며 갈등을 빗고 붕괴되고 있다.

 

비정상적인 가장에서 자란 젊은이가 군대까지 다녀오고 예비군 훈련을 받다가 총을 난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변의 애끗은 젊은이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세상을 비관하고 군에서 이루지 못한 살인을 무자비하게 저지르고 목숨을 끊은 것이 비단 그 젊은이 뿐일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3포에서 5포 시대에 살면서 취업은 커녕, 결혼은 물론 중년이 다 되도록 독신으로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기에 이 사회에 대한 저주와 불만은 극에 달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 그들은 평생을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신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사회는 동맥경화 현상의 인체와 비슷하다. 물이 고이면 싹듯이 피도 고이면 썩기 마련이며 영양분이 공급되지 못하는 부분은 세포가 썩어들어 간다. 썩어가던 세포가 종기로 다시 악성종기로 변하고 나중에는 암덩어리가 되어 빠르게 주변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말기암 환자들이 죽음만을 바라보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잇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상태의 사회다. 가난을 극복하기에 너무나 힘든 이 시대, 가진자는 더욱 가져가고 뭇가진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사회, 신분극복의 길이 보이지 않고 높아진 장벽은 철옹성이다. 5% 정도의 가진자 일부가 95%의 부를 거의 독식하고 정치적인 권력까지 독식하면서재벌과 애합하여 다시 부를 재생산하고 있다. 세습화된 노동조합은 해외공장의 생산성까지 조절하라며 압박는 현실, 4조원 규모의 대규모 공장이 들어설 계획인데 지역 주민들이 공장에 필요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공장 건설이 중단되려 한다는 소식을 듣노라면 이 나라에서 고질적인 노동조합과 주민 이기주의, 그리고 정부의 각종 규제로 공장 증설이 어려워 해외로 나가는 현실, 그래서 국내에 공장을 건설하기 어려우니 해외로 나가고 그래서 젊은이들의 취직 자리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  정부의 역활이 이러한 각종 문제점을 신속하게 조정하고 법제화, 규제 해소, 노동문제 등을 해결하여 유럽, 남미, 중국,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나간 공장들이 유턴하여 돌아오고 노동조합은 고액연봉, 무노동 임금, 노동자 세습, 경영 간섭을 지양하고 사측과 같이 상생의 길을 가지 않는 한 글로벌 기업들은 미래가 없다.

 

미일 밀월 시대에 한국 외교는 외톨이가 되었고 미국의 배신의 역사가 또다시 시작되고 있지만 한국 외교는 자화자찬이나 하고 북한의 위협이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국방은 우려할 사항이 아니라며 미국과 공조하여 북의 위협에 대처한다고 한다. 북한이 발사한 잠수함 미사일은 초기 단계로 정밀기술이 구축되지 않은 원시적인 단계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임진왜랜 당시 조선 조정의 신하들이 하는 말과 너무나 비슷하다.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볼 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태라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마는 외교.안보 관련 주요 인사들의 무능력과 무기력한 사고는 우리들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갈리길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잇는 모습이 조선의 광해군이 고민하던 외줄타기 외교가 떠 오른다. 우리가 갈 길은 도데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기로에 선 대한민국

 

 

고난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우리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팽창에 항상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는 중원까지 진출하여 강력한 세력을 펼쳤고 수나라 100만 대군의 침공을 물리치는 등 수나라가 스스로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했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의 4차에 걸친 침공까지 물리쳤던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내분으로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리고 양자강까지 세력 판도를 넓히며 대륙을 지배하던 백제는 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하며 패권을 다투었고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위력을 떨쳤으나 의자왕대에 와서 초기의 유능한 정치력이 사라지면서 사치와 내분으로 결국 무너졌으며 , 두 나라가 모두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였다.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천년 사직은 말기로 오면서 점차 귀족들간에 수많은 권력투쟁이 전개되면서 통치력을 상실하더니 왕권의 무능과 부패, 중앙통치력의 실추, 극심한 빈부의 차이, 사회역동성 상실, 사치와 방탕으로 스스로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점차 중앙조정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지방 관료들이 스스로 무력을 갖추고 분권화되면서 지역별로 아성을 쌓고 중앙통제를 벗어나 각자 호족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방에서 초적이 일어나더니 영역다툼이 전개되었고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났지만 결국에는 견훤, 궁예 등이 대표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50여 년간의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삼국이 성립되자 후백제 기치를 내건 견훤, 마진국의 궁예를 제거하고 등장하여 후고구려 기치를 내건 왕건이 서로 마지막 패권을 다투다가 견훤이 내부분열로 인해 몰락하자 왕건이 결국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왕건이 창업한 고려는 초기에 3차례의 거란군 침공을 물리쳤고 광종의 노비안건법, 과거제 등 개혁을 시도하면서 호족들을 점차 제거하고 이후 문화통치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자 문.무신의 차별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무신들끼리 죽고 죽이는 정변이 계속되면서 무신정권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80년 무신정권의 부패와 무능으로 고려 사회는 점차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징키스칸에 의해 일어선 몽고가 동.서양을 제패하면서 중국의 금나라와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원나라를 세웠다. 몽고는 사신 저여고의 피살사건을 빌미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몽고의 수차례의 침공으로 고려의 전국토가 잿더미로 변하였고 지방 곳곳에서 고려군의 항쟁이 계속되는 한편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면서 대몽항쟁을 벌였으나 결국 원종대에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육지로 나와 몽고에 항복하게 된다. 결국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자 몽고의 부마국이 되어 지배받기를 100년, 나라는 절단나 버렸고 공민왕의 개혁도 물거품이 되자 이성계의 쿠테타로 고려 조정이 붕괴되고 조선이 들어섰다.

 

  

 

                                                                                   세화여고 앞

 

조선은 피비린내나는 1,2차 왕자의 난을 거치고 태종의 왕권강화와 세종의 문화통치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문종도 일찍 죽자 어린 단종과 김종서를 제거한 세조의 쿠테타로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이 대를 이어 성종대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200년 이상 평화기를 누린 조선이 점차 삼정이 문란해지고 군사력이 쇠락해지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요즘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징비록'을 보면 선조의 수준이하의 저급한 인간성이 여실히 잘 드러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발생한 정여립 역모 사건에 매달려 천여 명이 넘는 관련자를 죽이고 유배보냈다. 부산포, 동래성이 무너지고, 이일의 상주패전, 신립의 탄금대 패전이 전해지자 서둘러 한양을 떠나 북으로 도망쳤다. 한강 방어선이 조선군이 싸워보지도 않고 장수들이 도망치자 병졸들도 도망치는 바람에 한강방어선이 무너졌다. 왜군을 처음 괴멸시킨 신각 장군을 간신들의 말만 믿고 선전관을 보내 참수하고, 임진강 방어선도 지휘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우수한 전투력을 가진 북방 변경에서 온 전투병력까지 무너졌다.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평양성을 사수하겠다고 맹약했지만 적이 다가오자 자신은 먼저 북으로 도망쳤다. 평양성을 지키던 아군들의 실수로 적에게 도섭이 가능한 지점을 알려주어 적이 도섭에 성공하자 조선군은 도망치고 군량비 10만 석을 포함하여 평양성을 무혈점령하게 된다.

 

선조는 적자는 아니지만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고 분조활동을 맡겼다. 그러나 광해 세자가 분조활동을 제 멋대로 한다고 권력에 시셈을 내고, 자신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요동으로 망명을 추진하는가 하면, 이순신의 승전보가 계속되고 신하들과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지자 시셈을 내기 시작하고 간신들의 모함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잡아다가 죽도록 곤장을 치고 차마 죽일 수가 없어 백의종군을 지시하였다. 선조가 유별나게 총애하던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라 조선 수군을 모두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였는데, 왜선이 도망을 치자 높은 파도와 바람을 헤치고 전속력으로 노를 저어 적을 추격하여 대마도 가까이 추격해 갔지만 적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적에 대한 공격을 실패하고 지칠대로 지친 수군이 돌아오다가 칠전량 일대 바다에 매복한 왜군 수군에게 기습을 받아 거북선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선 함선이 침몰하고 수군이 전멸했다. 도망친 배설의 12척을 제외하고......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포함하여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면서 7년 전쟁은 막을 내린다. 정유재란까지 7년에 걸쳐 나라가 망하고도 남을 것인데, 명군의 지원과 이순신을 포함한 충신, 열사들의 의병 봉기로 겨우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선조가 죽기전 10대의 인목대비를 맞아들여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고 독살(?)되어 죽자, 북인들의 강압에 의해 어렵사리 등극한 광해군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도한 정적 제거 작업을 시도하다가 결국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이게 되는 등으로 인해 광해군은 조야에서는 패륜군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이에 정치권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남인들에 의해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제거되고 인조가 등극하게 된다. 권력투쟁에서 사지로 몰리게 된 이괄이 조정에 불만을 품고 서북방어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였으나 안산전투에서 관군에게 대패하여 여주.이천쪽으로 도망가다가 내부분열로 이괄이 제거되자 이에 반란은 종료되었다. 서북방어력이 공백상태가 되자 남쪽의 지방군을 급거 보충하여 방어력을 강화하였으나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만주땅에서 여진족에 의한 후금이 일어나 명에 사대하는 인조정권을 타도할 목적으로 병자.정묘호란 등 2차에 걸쳐 조선을 침공하였다. 1차 침입은 명.후금 전투에 참전하여 후금에 인질로 잡혀 있던 강홍립 장군의 중재로 철수하였으나, 2차 침입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인조정권을 타도할 목적으로 침입하였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군에 의해 막히자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0여 일 항전하던 중, 군량이 떨어지자 결국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을 하고 청의 종속국이 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불모에서 돌아오자 청을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을 갈아치우려 한다는 두려움에 소현세자와 세자비 강씨를 죽였다. 어린 세 세손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두 명이 죽고 한 명만 겨우 살아남았다. 소현은 서양문물을 두루 섭렵하였고 명이 망해가는 현장에서 국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며 조선이 개화되지 않으면 명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점도 인식했을 것이다. 이러한 깨인 세자를 인조는 청과 내통하여 자신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세자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반포천 전경, 한강 잉어가 이곳까지 올라온다

 

 

그러나 인조가 죽고 조선은 효종의 실현 불가능했던 북벌도 무위로 끝나고 숙종의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뿌리깊은 당쟁은 그칠줄을 몰랐다. 그래서 영.정조의 탕평책과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기존 세력의 반발로 무위로 긑나고 말았다. 어린 순조가 등극했지만 노른을 등에 업은 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모든 것이 과거로 복귀되고 순조 이후 노론 세력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외척 세력의 세도정권이 지속되면서 허약한 왕족을 골라 세우고 장기집권하면서 부패가 극에 달하고 탐관이 넘쳐나는 등 백성들은 수탈로 집과 농토를 잃고 유랑민이 되었다.

 

진주민란을 포함하여 사방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말기에는 전봉준에 의해 대규모 농민들의 동학혁명이 일어나 무능한 조선을 변혁하고자 하였으나 외세를 끌여들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또 흥선군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쇄국정책과 개혁을 시도하는 등 몸부림쳤으나 결국 왕족끼리 권력다툼 양상으로 변질되어 외세를 서로 이용하여 권력투쟁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서로 망국에 앞장서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대한제국의 고종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으나 일제가 노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카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조선을 독점하고 일제에게 결국 총한방 쏘지 못하고 친일파와 왕족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송두리채 바쳐 일제에 합병당하고 말았다.

 

 

 

                                                                             수목들의 태양을 향한 몸부림

 

일제의 조선 합병과 식민통치 36년 동안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부귀를 누렸고 민족의 역사와 민족혼은 사라지고 수많은 조선 백성이 총알받이로 위안부로 전선, 탄광, 공장으로 끌려가 이슬처럼 사라졌고 금수강산은 수탈과 약탈, 공출로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원자탄 두 방에 항복선언을 함으로써 조선반도는 갑자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일제무장해제를 빌미로 들어온 소련과 미군은 38선을 경계로 각각 대륙 세력의 소련은 북한을, 해양 세력인 미국은 남한을 점령함으로써 각각 군정이 실시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본토는 미국이 독차지하고 대신 어이없게도 한반도가 남북으로 반토막 나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에 각기 다른 이념과 사상, 정치체제를 가진 정권이 들어서자 김일성의 통일 야욕에 의해 3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6.25 전쟁까지 치르고 휴전 상태로 지금까지 남북이 서로 총칼을 겨누면서 지내기를 반세기,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분단상태로 고통받고 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백제의 대륙경영, 신라 장보고의 청해진, 고려의 해상무역을 통해 우리 한반도가 융성할 수 있는 길은 해양진출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대부분 가능성도 없는 고토회복, 북방진출을 말로만 외쳤지, 내부적으로는 권력투쟁이나 대륙 섬기기에 바빴고 해양진출은 도외시 하였다. 조선은 태종이 대마도를 정벌했으나 살기 힘들고 주둔군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여 철수하고 조공이나 받고 방치하고 말았다가 지금은 일본 땅이 되었다. 또 공도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 주변 섬을 방치하였고 오늘날 독도 문제도 조선의 이러한 공도정책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라는 좁은 지역에서 서로 권력과 먹거리를 탐하고 싸우는 등 백성들 등골 빼먹는데만 주력한 것이 양반 사대부의 나라, 바로 조선의 정치였다.

 

조선의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수도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쳤으며,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과 시민들을 버리고 누구보다도 빨리 그것도 몰래 남으로 도망쳤다. 가진자와 지도층은 국난을 당하면 제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나라와 백성은 방치한체 도망치기에 바쁜 이 나라가 과연 로마처럼 강대국으로 우뚝서기에는 전통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질이 부족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반포천에 만발한 아카씨아꽃 전경 

 

 

 

 

 

 

 

깊은 병든 이 나라를 누가 살릴 것인가?

100여 년전 총 한반 쏘지 못하고 왕족과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송두리채 들어 바치며 조선이 일제에 합병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망했어야 할 조선이 일부 충신과 의병들에 의해 명맥 보존이 가능하였지만 그후 당파싸움과 외척세력의 등장, 노론 세력의 독주, 허약한 왕을 골라 옹립하여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세도정권이 장기간 권력을 장악하여 일족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5백 년을 이어오면서 조선은 치유가 불가능한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양반사대부들의 탐욕은 조선이 망할 때는 극에 달하더니 병신짖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던 흥선군이 등장하고 그의 아들 고종이 등극하면서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개혁의 고삐는 당겼으나 말이 나아가지 못했다. 동조세력도 없이 개혁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결국 고려의 공민왕의 미완의 개혁처럼 좌초하고 말았다. 그런와중에 흥선대원군의 일방적인 독주와 위세에 왕권의 회복을 주장하며 반기를 든 사람이 바로 민비다. 그래서 흥선과 민비, 고종 등 왕쪽끼리 서로 치열한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서로 다른 외세를 끌여들여 싸우더니 결국은 청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과 카쓰라-테프트 밀약을 맺고 조선을 차지하기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일제가 친일파와 왕족들의 동조하에 조선을 합병하였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임시정부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이토를 저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의 민중들이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고 별짖을 다했지만 강력한 일제의 힘 앞에 무자비한 탄압으로 무너졌고 백성들은 노예나 창녀처럼 학대받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고 일제 앞잡이들은 누구보다도 더 악랄하게 조신 민중 탄압에 앞장섰다. 전쟁터로, 탄광으로, 광산으로, 공장으로, 위안부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개돼지 취급을 당하면서 능욕을 당하였고 개죽임을 당하였고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극에 달하였고 치를 떨어야 했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는 우리 입장에서는 대단하게 홍보하지만 일제 입장에서는 소규모 전투에서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김일성이가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전투도 국경 마을에 대한 조그만한 습격작전에 불과다. 임시정부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좌.우로 분리되어 자리 싸움질에 여념이 없었고 만주의 독립군도 사분오열되어 통일적인 통합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는 선반도에서 칼쿠리로  끌어가고 빗자루로 쓸어가듯 인명과 재물을 탈해갔다. 귀중한 도서는 물론 왕릉마다 도굴하여 귀중한 문화재를 반출해갔고 유명한 산 산봉우리마다 쇠못을 박아 이땅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승승장구하면서 세력을 넓혀가더니 미군의 반격으로 수세로 전환되어 미군의 본토 상륙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어느날 갑자 일제가 미국의 원자탄 두 방에 항복 선언을 하자, 조선은 자력이 아닌 강대국의 승리로 갑자기 해방을 맞았다. 분단과 군정과 남북한 별도 정부수립, 엄청난 사회적 혼란과 남로당의 반란, 찬탁과 반탁의 사상 대립과 사회 갈등, 친일파 재등용과 민족정기의 붕괴, 남북의 극단적인 사상적 대립, 김일성의 전쟁 준비, 김일성의 민족통일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일으킨 6.25 전쟁은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까지 참전하여 진행된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은 물론 민간인 학살 등 참상과 전국토의 초토화를 가져왔다.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어 다시 한반도 허리를 반쪽으로 자른 상태로 남았고, 전후복구를 서두르면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3.15 부정선거를 빌미로 들고 일어난 4.19 학생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학생들의 정치개입과 지도층의 지도력 상실으로 극심한 정치.사회의 혼란상이 야기되었고 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박정희 장군에 의해 5.16 군사혁명이 발생했다.

 

친일과 남로당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지난 세월 자신의 약점을 보완이나 하듯이 한일협정,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 월남전쟁 참여 등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하였고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경제발전을 기적적으로 성공하였고 국민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고 국가는 역사이래 처음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을 빙자하여 자만에 빠져 강력한 군사독재와 극심한 부정부패를 불러왔고, 국민들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등 유신독재와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핵개발을 미국 몰래 추진하는 등 미국의 불안을 야기시키자 은밀한 사주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비명에 갔다. 그러나 그의 유신독재와 인권탄압, 장기집권 야욕은 비난받을지 몰라도 제3공화국은 역사상 어떤 정권보다도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국민들을 일단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데 그 엄청난 공은 우리 역사에서 세종에 버금가는 위대한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온국민이 똘똘뭉쳐 난관을 극복하고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해더라면 지금도 우리는 아직까지 보릿고개를 걱정하며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휴지는 커녕 자동차, 휴대폰 한 대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후진국으로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

 

어떤 지식인이 무어라해도 어떤 정권보다도 국민들을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정권이었다. 대부분 자신과 가문, 일족 무리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정권을 농락하고 국고를 축내는 것이 대부분이거나 진보적 사상의 함정에 빠지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동경하며 북한정권을 추종하는 일부 세력의 주도하에 가능성도 없는 남북문제를 자신들이 금방 해결할 것같이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햇빛정책'으로 퍼주기식 남북관계를 추진하였지만, 대부분 북의 능멸전술에 이용당하기만 하였다. 말만 국민을 앞세우고 정권잡기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복리의 증진보다 자신과 추종하는 무리들, 일부 지방 등 사익을 추구하는 데 당을 이용하고 정치세력을 사유화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정치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 흉노족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영역을 만리나 넓혔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의 대단한 치적, 당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당태종의 '정관의 치'를 중국인들은 자랑으로 여긴다. 유방은 한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신, 팽월 등의 창업 충신들을 권력유지에 부담된다며 모두 죽였다. 한무제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면서 권력유지에 냉철함을 보였고, 당태종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역사에 공과가 없을 수 없으며 인간 개인의 공과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시에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국가와 민족적인 견지에서 대국적으로 볼 때 과보다 공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깊은 병에 걸렸다. 세월호 사건, 성완종 유서 사건, 방산비리 사건 등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가 극도로 깊은 병에 걸려 있는 데 이 병을 빨리 치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치유하지 못하면 이 나라가 조선처럼 망하거나 아니면 우리는 다시 또다른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어 지배받을 지 모른다는 점이다. 주변 4대 강국과 호전적인 북한이 모두 우리들의 적이다. 4방이 아니라 5방이 적이다. 떠오르는 중국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미국 사이에서 일본의 재무장이 확실시 되고 있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위협적인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후진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외교는 외톨이 외교로 전략과 전술도 없이 뒷북치기에 정신이 없다. 무슨 축복이라고? 우리는 지금 동북아의 외로운 섬에 불과하다. 쏘면 터지고 깨지는 국방에서 원점타격, 강력대응은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다. 실패한 외교를 축복이라며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외교부, 모두가 북의 잠수함에서 미사일 발사를 보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통제로 미사일 사거리, 핵물질 재처리 및 이용, 핵무기 개발을 통제받고 있어 마음대로 하지를 못한다. 상대적인 억제력을 보유하지 않는한 우리는 북의 능멸전술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다. 개성공단이 위험하다. 언제 다시 문을 닫을지 모른다. 그들의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요구는 아무리 협상을 해도 그것은 종잇장에 불과하다.

 

미국의 폐기 직전의 노후한 무기를 들여오고 부품이 없어 기능발휘를 제대로 못하는 무기가 한 둘이 아니다. 방산비리가 각군 참모총장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저질러지고 있다. 또 국산개발 무기도 불량부품으로 만든 무기가 성능발휘가 안되어 날다가 떨어지고, 가다가 정지하고, 각종 부품이 깨지고, 사격불능이거나 오발되고, 물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제시된 엔진 출력을 내지 못한다. 하늘을 날으며 영공을 수호하는 전투기도 부품 돌려막기에 바쁘고, 각종 군수품도 비리에 불량군수품이 대량으로 납품되고 있다. 엇그제 예비군 훈련장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도 군의 비리와도 연관이 있으며 부패한 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무능과 태만에 빠진 군의 기강해이도 문제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을 공정치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고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 불안, 불평이 가득찬 현실을 향해 총을 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옆에서 훈련받던 애굿은 젊은이들이 아까운 목숨을 희생당하였고 어이없는 개죽음에 부모들이나 가족들의 참담한 심정을 누가 알 것인가? 모두가 지도자, 정치권, 군, 사회의 책임일 것이다.     

 

군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이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에 사회가 병들고 결혼을 기피하고 이혼이 급증하는 사회, 청년 실업이 100만을 넘기고 임시직이나 비정규직도 찿기 힘든 사회, 양극화는 심화되고 부의 계층극복이 불가능한 사회, 한마디로 절차와 과정도 없이 받아들인 천민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로 변질되었고 역동성이 상실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의 운명은 기로에 서 있다.  미.일의 공조가 가까워 지고, 미국의 묵인하에 일본의 해외 군사력 투사가 가능해지고 있다. 한일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대해서 미국 정치권의 일본 편향적인 시각이 부상하고 있고, 만약 우리가 일본과 협력을 거부하면 미국은 갖가지 정치, 경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서 일본을 재무장 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할 것이며 유사시 미.일 연합군의 한반도 진출은 물론 전위 세력으로 일본을 앞세워 대중국 포위망을 강화할 것이다. 단지 한국은 전초기지 개념으로 미국이 마음대로 농락하고 실컨 이용하다가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판단되면 유사시 언제라도 포기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의 침공이나 중국의 위협에 한국의 재래식 군사력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일본의 자위대를 한반도에 파견하는 생각하기도 싫은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국의 한반도 배반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미.일이 군사적 협력체제가 강화되면 중국은 한국을 자기편에 끌여들이기 위해 한국에 대한 회유와 압박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북한을 지원하여 한국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여 휴전선이 스스로 붕괴되어 한국이 북한에 흡수되던가 아니면 남.북한 내전을 유도하여 남한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전략을 구상할 수도 있다. 한편 각종 잇점을 제공하면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중국편에 끌여들이고 한국을  이용하여 북한 정권을 압박하여 붕괴시키고 흡수통일 시키던가 아니면 북한 지역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을 알고 그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이해에 따라 한반도 정책을 달리한다는 점은 똑 같다. 멀리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좋다는 말이 있듯이 중국이 우리와 적대관계를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한반도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의 앞 길을 전략적으로 잘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중앙대 이승화 교수는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도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나라다. 우리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은 물리쳤지만 몽고의 침략은 물리치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명의 원군, 병자호란과 강화도의 굴욕, 이 땅에서 일어난 청일전쟁, 상하이 임시정부가 충칭까지 쫓겨간 고난의 길, 6·25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 동북3성에 살던 조선족의 한국 진출, 수만명에 달하는 중국 유학생 수, 서울과 부산의 중국인 관광객 수, 제주도에 몰려드는 중국 자본…. 지금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중국을 외면할 수 없다. 거대해진 공룡인 중국과의 외교에서 우리는 앞으로 더더욱 실리를 취해야 하는데 과연 어떤 대응책이 있는가.

중국과 한국과 일본은 한자문화권과 불교문화권 안에 있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섬나라 일본과 중국대륙 사이에 끼어 있는 반도국가로서 아주 영리한 외교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신라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동안 중국에 예속되지 않고 국호를 유지한 것은 가히 기적적인 일이었다.

자신을 지키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우리가 중국을 바로 알 때,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력도 키울 수 있다. 중국은 남한 면적의 100배 영토요 인구는 15억명쯤 되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국가다. 중국을 알아야 세계 속에서의 우리를 바로 알 수 있다."

 

  

 

 

한송이 피울 능력도 되지 못하는 이 육신이 잠잘 곳은?

 

5월에는 기념하는 날도 많다. 그러나 모두가 진정한 의미가 퇴색된 날들이다. 어린이 날도 없애고, 부부의 날도 의미가 없다. 스승의 날도 필요없고, 어버이 날도 의미가 없다. 모두 없애야 한다. 아무런 의미없는 날을 누가 기념할 것이며 누가 감사할 것인가? 어린이는 태어나자마자 출산비부터 고가품에 양육비가 엄청나 양육을 포기해야할 정도이고 선행교육, 영어교육, 피아노, 태권도, 미술교육 등 사교육에 지치고 학교공부에 지치고 입시시험에 지친다. 스승은 형식적인 스승일뿐 아무런 감동도 존경심도 없는 시대, 스승들도 제자들이 만나거나 찿아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제자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무슨 물건을 팔려고 하고 암심에 폭행을 당하거나 사기사건도 당한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자가 늘어나는 시대에 가정이 줄어들고 붕괴되며 부부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우리 후손들의 미래는 지금의 우리들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죽고 흙이 되어 이 산하 어디선가 먼지가 되어 초목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할지 모른다. 말을 못하지만 지금의 초목이나 꽃들이 모두 우리 조상들의 육신이 썩어 거름이 되어 영혼이 꽃을 피우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바라 보는 꽃들이 화사한 것이 풍족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보고 기쁘서 그런지도 모른다. 후일 이 몸이 죽어 진토가 되어 꽃 한 송이도 채 피우지 못하는 한줌의 흙이 될지 몰라도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후손들을 보면 얼마나 속이 아프고 눈물이 날까? 우리집 입구 화단에 핀 장미의 꽃봉오리가 크고 탐스럽기까지 하다. 후손들을 위해 한송이 꽃을 피우지 못하더라도 어디에 이 육신이 편하게 잠들 곳은 과연 어디일까?

 

매일 난 그 장미를 바라보며 조상의 영혼과 대화를 한다.

" 조상님 덕분에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아~ 그런가. 고맙네. 우리 덕분이라기 보다 자네들이 고생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네"

" 아닙니다. 조상님들의 고귀한 희생이 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혁명, 민중 봉기, 일제치하 수많은 민중의 죽음, 6.25 전쟁, 학도병, 국민방위군 사건, 월남전쟁, 3.15 규탄데모, 4.19 혁명, 5.16 혁명, 군부 독재정권 투쟁, 민주화 투쟁, 5.8 광주 민주화 운동, 산업현장 사망 노동자, 재난구호중 사망자, 근무중 순직자, 군복무중 각종 사고로 숨진 병사, 다른 사람을 구하고 죽은 의인들, 세월호 사망자들 등등 이루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난 우리 앞에 돌아가신 조상들이 원망스럽네. 그들의 죽음은 헛되었고 우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네. 500년 동안 정치는 권력싸움으로 날을 다 보냈고 매일 제사지내다가 세월 다 보냈고, 민생을 돌보기는 커녕 오는 관리들 마다 백성들 수탈하기 바빴고 양반사대부 그들끼리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다 누리다가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우리는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했네. 해방이 되어 좋은 세상 오나 했더니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공산당으로 몰아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네. 6.25 전쟁통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들어오면 서로 적에게 동조했다며 수많은 양민을 잡아다가 학살했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네...... " 

 

장미는 오늘도 나를 보고 화사하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