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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2 : 인류, 그 타락의 역사

 

 

강남의 겨울 2 : 인류, 그 타락의 역사

 

 

 

 

 

차가운 겨울 새벽 풍경은 청아한 모습으로 수정처럼 반짝이고 만물은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고 얼어붙은채 잠들어 있다. 따스하던 날씨가 갑자기 빙하기가 찿아온 것처럼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새벽 공기를 가른다. 나무는 옷을 벗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삭풍을 맞으며 추위를 견디고 식물은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몸을 움추리고 대지의 따스함에 의지한채 겨울을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눈과 바람을 피해 따뜻한 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몸을 웅크리고 추위를 피하고 있고 새벽 길거리는 사람과 차량이 뜸한채 황량하기만 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각종 전단지는 어지러이 대로변에 널려 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인간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각종 유혹적인 문구로 얼룩져 있다. 바로 인간사회의 더러운 모습을 적라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이성적인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정신과 육신은 이미 도살장에 던져진 동물이 되고 말았고 충, 효, 정절, 정조, 열녀, 도덕, 윤리, 신뢰, 믿음, 화합, 상생, 평등, 정의, 공정, 순리, 사랑, 우정, 존중, 순결, 은근, 중용, 자유, 인권 등은 사라진지 오래다. 자유는 방종으로 변질되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갖가지 몰염치한 수단을 강구하고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가진자들의 촌부같은 갑질은 서민들의 분노를 자아내지만 분노하는 사람도 막상 자신이 갑의 위치가 되면 그런짖을 서슴치 않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인류와 지구가 스스로 멸망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 지구 기상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 지구는 이러한 인류 사회가 문명 발전의 극을 달리면서 부패하고 자만에 빠져 무질서와 혼돈으로 치닫고 개발을 빌미로 자연을 무시하다가 결국은 지구 멸망이 반복 주기가 닥치면 엄청난 재앙으로 인류를 포함한 지구의 모든 문명이 하루 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생각해보건데 지구는 우주의 변화에 따라 수없이 멸망과 생성이 반복되어 온 듯하며 태양의 이변, 혹성 충돌, 지구 자전축 변화, 자기장 변화 등으로 인해 지진과 해일, 기온 급상승/빙하 해빙/해수면 상승과 대륙 침수/전염병 확산, 화산 폭발과 가스층 분출, 기온 급강하, 빙하기 엄습, 동식물 멸종 등으로 지구의 기온이 급변하면서 홍수기 혹은 빙하기가 급습하는 등 대재앙이 반복되면서 멸망과 생성을 반복해 온 듯하다. 그때마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은 하루 아침에 멸종이 되었고 긴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생성하였고 그러면 새로운 동.식물이 번식하고 진화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전 홍수기나 빙하기에 멸종된 동.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지구의 급변하는 기상변화에 따라 멸종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구가 다시 생성되면서 동.식물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서 환경변화에 따라 각자 다양한 진화를 거듭하였고 현생 인류는 대략 1만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인류 역사가 기록된 시작은 기원전 6,0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 이전에 어느 시대인가 지금의 인류의 문명보다 더 발전된 비슷한 인류가 살았고 지금의 문명보다 더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다가 탐욕과 대재앙에 의해 이 지구상에서 멸종하였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 전철을 또 다시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고 지구도 우주의 변화에 따라 대재앙이 지구를 급습하거나 인간 스스로도 자연을 도외시함에 따라 환경재앙을 불러 멸망의 길로 갈지도 모른다.  

 

 

 

 

 

 

저물어가는 2014년 갑오년(甲午年)은 년초에 우리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머물면서 회한과 분노의 한 해가 되었다. 후진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증폭된 미움과 증오, 질시와 반목, 오만과 독선,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얼룩진 한 해였다.

 

인간의 역사가 어느 한 해 조용한 날이 있었던가? 모두가 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불행으로 점철되었고 서로 더 많은 권력과 재물을 가지기 위 전쟁과 살륙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역사였다.

 

가진자들의 탐욕은 끝을 모르고 갑질은 물론 비리와 부패의 먹이사슬을 이루어 우리 사회를 좀 먹고 있으며 가난한 서민층은 더 이상의 희망도 없이 추운 겨울 새벽길로 내몰리고 있다. 꿈많던 청소년들이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하는 가운데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다에 침몰하고, 지하 호프집에서 미친척 놀다가 불에 타고, 대학 동아리 모임에서 갑자기 천정이 무너지고, 길거리 공연을 보다가 환풍기가 무너져 사망하고,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하고 욕질하며 종놈 부리듯 하는 사회, 재벌 자녀뿐 아니라 온 가족이 상상도 못할 갑질을 해대는 이런 추악한 사회에서 가진자들의 벼락출세한 머슴같은 무지한 독선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인류가 본능적으로 타고난 자질이기도 하며 후진국형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탐욕스런 재벌권력이 가져다준 불행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래부터 기상이변으로 인해 농작물이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고 제한된 자원에 늘어나는 인구들로 인해 서로 경쟁적으로 먹거리와 부를 더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이때부터 권력과 힘을 가진자가 지도층이 되었고 국가를 세워 운영하면서 나머지 국민들은 대부분 그들의 농노가 되어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가 혁명으로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제국주의가 확산되면서 식민지와 자원 쟁탈전인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인류 사회는 큰 변화를 거치면서 급속히 발전한 근.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전개되면서 가진자들은 더 갖기 위해서, 갖지 못한자들은 최소한이라도 갖기 위해서 끊없는 투쟁이 지속되었고, 지도층이 사람을 노예부리듯이 수탈하며 지내던 봉건사회를 벗어나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혁명으로 급속한 산업사회의 문제점이 불거지자 이에 반발하여 태어난 공산주의도 일당 독재의 패해가 도를 넘자 그 체제도 결국 무너지고 인간의 삶이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등 그래도 자유스럽고 누구나 노동하고 돈을 벌어가며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확산되자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지칠줄 모르는 대상이 되었고 재물이 인간의 등급을 결정짖고 삶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돈이 바로 권력이 되었고 돈을 많이 가진자가 갖지 못한자에게 무한권력을 휘두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인간 존엄성은 재물의 존엄성에 밀려나고 천대받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재물에 대한 탐욕은 바로 재물이 돈으로 치루어지는 민주주의 사회의 선거라는 제도가 정착되면서 그 상생 관계는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돈이 이처럼 권력화되면서 힘으로만 권력을 쟁취하던 봉건시대는 사라지고 돈이 아니면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 권력은 부패한 먹이사슬로 인해 재물을 잉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도덕, 윤리, 양심, 법치, 인간성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래고 가난한 서민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 묵묵히 절망적인 위험한 현장에 뛰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세월호 사건이 겨우 수습되고 조용히 정리하며 한 해를 마감할 12월에 또 다시 원양어선 침몰 사건, 청와대 문서 유출 사건,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 서울시향 갈등 사건 등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나 온 나라가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재난에 가까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 인류가 역사 이래 타락의 길을 걸어 왔기에 지금 당장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텔레비젼을 보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위치에 도달하면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타락한 역사를 '자아폭발(타락)'이라는 책을 저술한 스티브 테일러의 책에서 잘 제시해주고 있다. 저자는 인류가 타락한 역사를 기술하면서 선사시대에는 풍족한 자연환경에서 가족단위로 채집이나 유목생활하면서 아쉬움 없이 이웃과 서로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지구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자연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생활이 가능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인구가 밀집하게 되자 제한된 먹이환경에 서로 경쟁이 시작되었고 서서히 광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서로 더 많은 먹이와 재물을 차지하기 위히서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바로 전쟁과 가부장제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이 유발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래는 그 책의 네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인류, 그 타락의 역사

 

인류 역사가 기록된 지난 6,000년 동안 인류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병을 앓아 왔다. 광기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이 정상적이고, 건강하고, 합리적인 것인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가장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습관과 행동이 관행으로 자리 잡아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남성이 힘이 약한 여성을 억압하고, 소수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여 절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일이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환경재앙을 일으킬 정도까지 자연계를 남용하는 일도 정상적으로 보이고, 스스로 육체를 경멸하는 것도 정상적이고, 순수하게 본능적인 욕망에서 일어나는 행위도 당연해 보인다. 인간이 스스로 필요하지도 않는 엄청난 부를 긁어모으고. 끝없이 성공과 권력을 추구하는 일도 당연해 보인다. 동시에 성공한 이후에도 결코 만족감과 성취감을 맛보지 못하여 계속 불만 속에서 사는 이들도 당연해 보인다.

 

인간의 이러한 광기는 어디서 왔으며, 과연 진정으로 그러한 광기가 당연한 것인가?  사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천국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전쟁이나 억압도 없이 서로 공존하면서 풍족한 자연물을 채취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인류는 어느때부터인가 갑자기 광기를 부리며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6,000년 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환경재앙의 결과로 대다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인류는 개인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새로운 방식의 삶을 체험하게 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인류의 탄생에는 진보적 측면이 강했는데 기술적으로 진보하여 수메르와 이집트문명을 비롯한 세계 4대 문명이 각지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인류는 동시에 전쟁, 남성 지배, 사회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병리현상이 초래되기 시작하였다.

 

 

 

 

 

 

역사가 기록된 이후 인류 사회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전쟁은 첯 번째 특징이며 두 번째는 가부장제, 혹은 남성지배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회적 불평등이다.

 

전쟁

인류는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파괴적으로 폭력적인 종이기도 하다. 역사는 기원전 3500년경에 등장한 이집트와 수메르문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역사학자들이 말한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역사는 끝없는 전쟁의 목록이나 다름없다. 국경분쟁, 노예나 재물로 바칠 희생자를 획득하기 위한 습격, 제국의 영광을 높이거나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한 전쟁, 종교적인 분열과 타종교를 말살하기 위한 광신도적인 폭력행사 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쟁은 인간의 선천적인 내적 욕구가 있다고도 하고 남자의 경우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증가, 또는 뇌의 활동을 높이는 '세로토닌' 의 감소와 같은 화학물질을 들기도 하고,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살아남고 가족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다른 집단과 투쟁하도록 하는 '이기적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인류가 전쟁이 선천적이 아닌 모순된 점은 두가지로, 전쟁은 인류 외외에 다른 동물의 왕국에서는 사회적집단을 형성하고 짝짓기, 먹이활동과 영역다툼을 벌이는 개미와 벌을 제외하고는 거의 찿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동물은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에게 위협하거나 공포심을 조성하여 물러나게 함으로써 직접적인 싸움은 서로 회피하며 공격은 최후의 수단이다. 그리고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본능적으로 살륙억제 행동을 보임으로써 싸움은 즉각 중단된다. 그러나 인류는 이처럼 본능적으로 살륙 억제 능력을 갖지 않은 매우 보기 드문 종의 하나이다. 그리고 인류는 다른 집단에 대해서 집단적인 공격을 가하고 계획적으로 정복을 꾀하는 유일한 종이다. 동물의 공격은 생존과 관련된 이익이 위협당을 때만 나타나는 유순하고 방어적인 반면 인간의 공격은 거의 악의적이다.

 

두 번째로 인류는 전쟁이 결코 인간의 역사와 같이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실제 최근 몇 천년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역사를 보면 인류의 전쟁은 대략 기원전 약 4,00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전쟁터로 변해왔다. 19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이웃 국가들과 거의 평균 2년에 한 차례씩 전쟁을 벌였다. 1740년부터 1897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230여 차례의 전쟁과 혁명이 발생했으며, 국가들은 군사비 지출 때문에 스스로 파산했다. 18세기 말에 프랑스는 60~70%를, 프러시아는 90%를 각각 육군에 투입했다. 점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전쟁 기술이 발전되면서 단기간에 전쟁이 끝나면서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론 르어났다. 1740~1897년 사이에 발생한 모든 전쟁에서 3,0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는 500만 명에서 1,3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5,00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인간 집단간의 전쟁이 일어나는 동시에 개인 그룹 간의 분쟁도 항상 존재하여 왔다. 종교적, 민족적 대립, 식량 문제, 영토 확장, 정복 야욕, 이념 분쟁, 지배층에 대한 반란, 내전, 폭동, 전복, 혁명 등 지배계급 간에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그치지 않았으며, 종교집단들은 각자 믿음을 놓고 정통과 이단이라며 힘을 배경으로 억압과 탄압, 전쟁을 지속하였으며, 억압받던 농민들이 지배층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궁정 내부의 암투가 만연하여 황제가 된다는 것은 제 명에 못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79명의 황제 가운데 31명은 살해, 6명은 자살 강요, 나머지 많은 황제들은 정적들에 의해 실종되었다. 계급 충돌 관점에서 보면 중세 중국에서는 거의 매년 대규모 농민반란이 발생하였고 1801년~1861년 사이 60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1,467건의 농민반란이 있었다.

 

 

 

가부장제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가 끝없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무지막지한 탄압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제도는 기원전 4,000년경에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인류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노예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였으며 정치.종교.문화적인 삶의 양식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또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었으며 채권자나 세리에 의해 빚 갚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과부를 살해하였고 남편이 사망하면 미망인을 살해.자살하게 했으며,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시신이 놓인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몸을 던지거나 내던져졌다.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는 현재 어느 정도 성적 평등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지만 중동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이 차별과 종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중동 지역은 종교적인 구속력으로 여성들이 자신의 구역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며, 남성들이 동반하지 않으면 집 밖으로 외출도 할 수 없다. 미혼 여성이 성관계를 갖게 되면 남성 친척들에 의해서 살해당하기도 하고, 사우디에서는 눈만 내놓고 몸을 완전히 뒤덮은 아바야라고 불리는 검은 가운을 입어야 한다. 여성들은 자동차를 운전할 수도 없고 자전거를 탈 수도 없다. 남성은 네 번까지 결혼이 허용되지만 여성은 간통을 저지르면 돌에 맞아 죽는다. 

 

이 같이 종교적.사회적으로 억압된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신체적인 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들의 간통이나 혼전 성관계, 낙태 등은 죽음으로 다스려진다. 중국에서는 여성들에게 전족을 강요하여 영원히 여성들의 발을 기형으로 만들었고 걷지도 못하게 했다. 이는 여성을 애로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야만스럽게 뛰어 다니지 못하게 함이었다고 한다. 아내에 대한 폭력은 어디서나 일반적이며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성들은 감정적이고 훈련받지 못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서 자기 통제로 가르칠 필요가 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 영아를 살해하는 풍습이 근대까지 유럽에서 행해졌다. 9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3 :2 정도였다. 14세기에 들어서는 이 비율이 더 높아져 172 :100 정도였다. 19세기 중국에서는 여자 아이의 25%가 태어나자마자 살해되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영향으로 여성을 마녀로 몰아 살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회적 불평등

여성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은 단순히 남성들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남성들은 스스로도 서로를 지배하고 억압해 왔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류 사회의 세 번째 중요한 특징은 부와 지위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등급을 가진 엄청난 불평등과 현재까지 지속되어 온 엄격한 계급들, 그리고 카스트였다.

 

이러한 불평등과 억압은 원시토착민 사회에서는 거의 찿아보기 힘들다. 계급이나 카스트도 없었고 식량과 재화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또한 민주적인 정책 결정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4,000년경부터의 역사는 특권을 가진 극소수 인간이 절대 다수의 인간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계급은 인도-유럽인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들은 바로 로마.그리스.켈트, 그리고 현대 유럽 및 미국인들의 선조였다. 그들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나타날 때부터 성직자, 전사 및 지배자, 그리고 경제적인 부의 생산자(상인, 농민, 장인을 포함)라는 3개의 계급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사회구조에 피정복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들을 추가했는데 바로 노예제도였다. 피정복민들은 이 때부터 그들에 의해 무자비한 억압과 착취를 당하여야했다. 비슷한 사회체제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에서도 발달했다.

 

소수의 특권층은 국가 인구의 1~2%에 불과했지만 국가의 부와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며, 국가의 정치적.경제적.법적 결정을 통제했다. 이들은 국가 전체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전형적인 현상이었다.13세기 영국에서는 귀족들의 평균 수입은 농민들의 200배, 국왕은 2만 4,000배나 됐다. 19세기 중국에서는 귀족의 수입은 일반 백성의 1만 배를 넘었다.

 

그들은 국가 토지와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서 농민들도 소유했다. 이 농노 제도는 유럽(특히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일반적이었다. 절대다수의 농민들이 노예였으며 지주의 허락없이 결혼할 수도 이주의 자유도 없었다. 19세기 러시아 황제는 2,700만 명에 달하는 농노를, 귀족들은 보통 30만 명의 농노를 소유했다. 농노들은 전쟁이 나면 끌러나가야 했고 농노가 결혼할 때 귀족의 초야권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해 귀족과 먼저 잠자리를 가져야 했다.

 

세월이 흘러 농민들이 해방되어 명목상 자유롭고 토지를 임차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지주들은 높은 지대.세금.막대한 이자.헌금.벌금 등으로 농민들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했다. 농민들은 생산한 재화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으며 지주들은 사치품과 여가를 즐긴는 반면 농민들은 극도로 가난하고 불결한 상태에서 살아가야 했으며 굶어 죽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 농민들은 지주에게 자주 강간을 당하였고 그래서 이산가족을 만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농민들은 하찮은 범죄로도 엄청난 벌을 받았고 심지어 달걀 한 개, 빵 한 조각을 훔쳐도 종종 사형을 당해야 했다.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실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지배계급이 지배 대상을 자기들과 공감하거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야만적인 피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이러한 종류의 사회 병리 현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나머지 이런 광기를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왜 인간의 역사는 그처럼 무시무시한 폭력과 억압의 거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했는가? 왜 인간은 서로서로 충돌하고 억압하려는 원초적 욕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지난 수천 년간 인간들의 삶이 왜 그처럼 끔찍하며, 고통과 박탈로 가득 찿어야 했는가? 진정 삶이란 이 같은 끔찍한 것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수많은 종교가 현세의 고통을 감내하고 내세에 대한 기대치를 심어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인간정신의 어두운 측면

우리 내면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고통, 즉 정신적인 고통이다. 정신적 고통은 전쟁이나 사회적 억압만큼이나 위험하지만 사실 더 위험하다. 그것은 정신적 고통이 외면적인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해지기가 그토록 어려워 보이는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마약 남용.정서장애.자해와 같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근심.걱정.죄의식.후회.질투.비통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짓눌려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들은 만족감을 느끼며 휴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고 세상이 어떻게든 자신을 속인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실망감을 느끼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현실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과도한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만증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불만 증상은 재원의 분배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어떤 근원적인 초초함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거나, 외부에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것이 없는 상황을 견디기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극단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외부로부터 다양한 자극이 중단되면 인간은 불안증세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마치 내면에 대하기를 원치 않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퇴직자나 일하지 않는 실업자들이 자유로움을 느끼는 짧은 신혼여행이 지나면 곧 이어서 공허감을 느끼거나 자신감을 상실하고 일반적으로 우울함을 느끼는 각성이 기간이 뒤따른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은 실업자의 불안증세는 다양하게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에는 일종의 불안과 불만족이 항상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이 없는 상태가 시작되면 인간은 스스로 불안 증세로 정신적 질환을 겪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소유를 향한 열광

왜 인간들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잇으면서도, 실제로 대부분은 자신들에게 별다른 기능을 선사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새 옷, 새 보석, 새 차, 새 골동품과 장식, 새 가구들을 사는데 열광하는가? 작은 집, 작은 차, 작은 가구가 사람들에게 사는 목적에는 잘 맞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호사스런 큰 집에서 살고 싶어 하고, 가장 비싼 차를 몰고 싶어 하고, 가장 사치스런 큰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느끼는 것일까? 어차피 빈손으로 떠나는 인생이니 전생에서 마음껏 가지고 싶은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인간들과 직장 생활에서 앞서나가는데 모든 정력을 쏟아붓는다. 유명인이 되고 싶어하고 연예인이나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의 욕구단계에서 자아실현을 갈망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인간들이 이처럼 현재의 삶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영원히 결핍된 상태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데에 있다. 새 것과 좋은 것을 얻으면 당장 만족하지만 이내 새로운 더 좋은 것을 찿아 자아만족을 갈구하게 되고 더 높은 지위와 명성을 얻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순환되고 있는 듯하다. 우리 내부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고문하는 내면적인 불만인, 즉 일종의 정신적 불화가 존재하는 듯하다. 이 내면의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삶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적인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게 만든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외부세계에 대한 지속적으로 집중시키지 않고도 우리 스스로 함께 살고, 우리 스스로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은 우리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종교적인 영생을 얻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가 세속화되고 권력화되고 탐욕스러워져도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인 안식을 구하기 위해서 종교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