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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늦가을 4 : 타락과 고통의 반복, 역사의 수레바퀴

 

 

강남의 늦가을 4 : 타락과 고통의 반복, 역사의 수레바퀴

 

 

 

                                                                         서울고 앞. 짙어가는 가을 어느날 저녁

 

 

지난 22일이 소설(小雪), 다다음주 12월 7일이 대설(大雪)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될 절기지만 날씨는 절기에 맞지 않게 온화하다. 어저께 금요일에는 비가 내렸고 주말을 지나 일요일에도 비가 내릴 전망이며 다음주 중반부터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는 예보다.

 

비가 내리지 않아 강수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소양호 수위가 내려가는 바람에 인제군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 각종 겨울 축제가 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비는 자주 왔는데 소양댐 수위조절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화천군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인데, 몇 년 전부터 처음 산천어 축제를 기반으로 화천군이 시작했는데, 당시 산천어 축제에 몰려든 인파 모습이 외신을 포함하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사람들이 찿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군민들의 부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면서 화천군은 일약 전국 최고의 황금 지자체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산천어 축제에 몰려든 사람들이 뿌리고 간 돈이 화천군을 먹여 살렸고 화천군에서는 군수의 비상한 묘책으로 얼음낚시, 눈꽃축제, 맨손 송어잡기를 비롯하여 안보관광권, 자전거길 개발 등 각종 축제사업이 연계되어 개발되면서 화천군을 찿는 관광객이 엄청나게 늘어나 군민들의 재정수입을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입장료를 받으면 각종 음식 티켓을 주는데 중간 중간에 설치된 음식점에서 티켓을 주면 라면, 오뎅, 김밥 등을 무료로 먹을 수 있게 만들어 군민들이 수입을 올리도록 만들어 주는 등 지혜로운 발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지자체들도 덩달아 겨울축제를 개발했는데 신포리, 인제군 빙어축제, 평창 얼음골 송어축제, 대관령.태백산 눈꽃축제, 홍천강 꽁꽁축제, 가평군 자라섬 씽씽 겨울축제, 포천군 백운계곡 동장군 축제, 인제군 내설악 강변축제 등 각종 축제가 경쟁적으로 개발되어 열리고 있다. 그러나 금년에 온난화 기후로 강원도 지자체들이 울쌍이다. 산천어, 빙어축제는 물론이고 스키장마다 손님이 없어 울상이고 겨울 특수를 노리던 많은 겨울축제와 관련 업주들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한다.

 

겨울아 어서와라! 배달민족이 몰려 다니며 열심히 놀고 노래하고 먹고 즐기는 축제가 열리도록, 그리고 강원도민들이 먹고 살아야되니, 겨울아 어서와라~

 

 

 

화천군 산천어 축제, 인제군 눈꽃축제 모습

 

 

                                                                                   새벽 여명

 

난 이 나라에서 태어난 배달민족의 후예이다. 물론 내 피속에는 5천년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무수한 외침으로 잡다한 이민족의 피가 직간접적으로 섞여 있을 것이지만 배달민족으로 동화되어 아무런 느낌은 없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란 곡식과 물을 먹고 자랐고 공기를 흡입하면서 오늘까지 삶을 연명해오고 있다. 그동안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겪으면서 자랐고 막연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 왔으며 그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 지금은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너무나 급속하게 변화하여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가난에서 풍요로, 하드에서 소프트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위주의 사회로, 억압과 통제의 사회에서 자유와 방종의 사회로, 가부장.대가족 위주의 사회에서 평등.개인.집단주의 사회로, 의료기술의 발달, 결혼 기피와 이혼 증가, 양육비 부담으로 초고령.저출산 사회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화하였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기적을 이루어 지금은 풍요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비록 지난 반세기는 지독한 고통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요하나 정신적으로 병들은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나는 살아갈 날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후손들은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이 나라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나는 대한민국이 영원히 발전하고 배달민족이 영광을 누리며 평화롭게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그러나 작금에 나라 돌아가는 꼴이 나의 이런 기대를 허물고 있고 극심한 걱정거리로 남아 하루하루가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다. 물론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실을 부정하지는 못 할 것이다. 우리 5천년 역사를 살펴보아도 평화로운 시대는 잠시였고 대부분은 항상 불행한 시대였다. 그런 불행의 강도가 강한 때는 바로 권력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권력투쟁이 격화되거나 반복될 때, 또 파당을 이루어 당리당략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어 갈등이 심화될 때, 또 일부 무리에 권력이 집중되어 장기간 계속될 때 정치는 실종되고 권력형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은 토탄에 빠졌다. 또 국제정세에 둔감하고 내정이 문란하여 국방을 소홀히 하거나 지도층이 국난을 당하면 앞장서지 못할 때 외침을 당하거나 그로인해 왕조와 나라가 망할 때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다.

 

 

 

나라가 망하면 민족도 문화도 언어도 지구상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다. 발해의 말갈족, 요나라의 거란족,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모두 사라졌다. 

 

고대 백제가 중국과 한반도에서 맹위를 떨치다가 권력투쟁과 내분으로 서서히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말년에는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정이 무너지자 나당연합군에 멸망하고 의자왕을 포함한 수많은 백제 관료와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가 노예처럼 천대받으며 살다가 외롭게 죽어갔다.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권력장악으로 대당전을 어렵게 치르다가 죽고 세 아들이 분열하여 권력투쟁이 벌어지자 내분으로 결국 당나라 군대의 침공을 막지 못하고 무너지자 평양성에서 왕족을 포함하여 수십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당나라로 끌려가 백제의 전철을 밟았다. 김수로가 건국한 가야는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왜와 백제와 공조하여 신라변경을 어리럽히다가 내부 분열로 힘이 분산되자 결국 각개격파되어 신라에 흡수되었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배야욕을 드러내던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통일을 이룩하여 전성기를 누리면서 천년 가까운 왕조 역사를 누리다가 말년에는 지도층의 사치향락과 권력다툼이 반복되면서 내부적으로 사직이 붕괴되어 갔다.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었고 사방에서 초적들이 봉기하면서 지방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나타나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거의 50년 동안 지속된 후삼국시대는 결국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세력을 다투는 가운데 견훤이 내분으로 무너지자 왕건은 민족통합군을 편성하여 후백제 신건을 항복시킴으로써 한반도에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송두리채 들어 고려 왕건에게 바침으로써 고려에 합병되었고 자신과 일족은 모두 노후까지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고려는 광종이 과감한 개혁을 통해 노비안건법, 과거제를 도입하면서 호족세력을 제거하고 왕권강화와 문민통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후 국력이 상승하면서 거란족의 3차례 침입을 물리쳤다. 그러나 문민통치가 극에 달하면서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천시를 당하자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게되면서 무신들의 폭정에 고려는 내부적으로 병들기 시작했다. 무신정권 80년 지배하 수많은 무신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나는 세월을 겪어야 했고 백성들의 삶은 토탄에 빠졌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의 무신정권은 몽고침입이 계속되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수차례의 몽고침공을 견디어 내다가 고려 원종대에 원종의 계략으로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원종은 육지로 출륙하여 몽고에 항복하게 된다.

 

그후 몽고치하 100년 동안 고려왕은 수시로 몽고에 불려갔고 왕이 교체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몽고 수도 연경에 머물면서 문서로 고려를 통치한 왕도 있었다. 고려왕은 몽고 부인을 왕후로 맞아야 했고 매년 수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고 공녀들도 끌려갔으며 몽고 출신 왕후와 몽고 세력에 빌붙어 고려 조정에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권문세족들이 고려 사회를 지배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청바지를 입고 미국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음식을 먹으며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강대국인 몽고의 지배를 받으면서 몽고어를 사용하고 몽고풍 옷을 입고 몽고음식을 자랑스럽게 먹으며 몽고인 흉내를 내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명의 주원장이 일어나면서 원나라가 북으로 쫓겨가자 운좋게 등극한 공민왕은 배원정책으로 실지를 회복하고 신돈을 등용하여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의심이 많아 많은 장수와 신료를 함부로 죽이며 정신적인 이상증세를 보이다가 젊은 내신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공민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과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인임의 권력농단으로 고려 조정은 사직이 점차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의 등장으로 요동정벌이라는 마지막 용틀임을 과감하게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이 제거되면서 고려는 멸망의 길로 갔다. 

 

    

 

기운이 다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진사대부들의 이상주의와 그 충동질에 결국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욕심많고 간교한 왕후의 농간에 휘둘려 후계자 선정을 잘 못함으로써 자식들간의 피비린내나는 왕자의 난을 2차례나 겪어면서 말년까지 고통스런 인생을 보내야 했던 것처럼 자신의 업보를 되물려 받았다. 태종의 왕권강화와 세종의 문화통치를 거쳐 성종대에는 유교문화의 꽃을 피웠고 연산군의 패륜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권이 강화되면서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명종대에는  외척의 준동으로 내부적으로 부패해지기 시작하면서 200년 동안 외침없는 평화스런 시대를 지내다보니 내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이 가중되었다. 그러다가 선조대에 이르러 외침을 당하는데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은 한마디로 운이 다한 조선 망하느냐 아니냐의 중차대한 기로였다. 부산, 동래성이 왜군에게 순식간에 점령되자 이 소식을 들은 대구병영에 집결하던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길목마다 백성과 성을 버리고 관리와 관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이 상주에서 조선의 지략가로 정평나 있던 이일의 오합지졸 군사를 무력화시키자 이일은 혼자 북으로 도망쳤다. 왜군은 천혜의 요새를 아무런 방해없이 넘었고 문경 세재를 내주고 충주 탄금대 벌판에서 배수진을치고 왜군을 기다리던 조선 최고의 장수라던 신립 장군의 7,000 기마부대를 수차례 접전 끝에 전멸시켜 버렸다. 수렁창 벌판에서 여진족 토벌전만 생각하고 기마대로 하여금 무모한 돌격전을 수차례 감행한 신립의 용기는 가상하였으나 결국은 바위에 계란치기나 마찬가지 전투였다. 적에 대한 정보도 무지했고 적의 능력도 몰랐고 오로지 자만에 빠져있던 무지한 용장의 말로였다. 일설에는 역마로 급조한 조선군을 배수진을 치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술적인 책략에서 시도하였다지만 수렁창 벌판에서 말을 타고 왜군의 조총을 무시하고 무리한 돌격전을 감행한 점이 문제였다. 왜군은 이미 오랜 국내 내전을 통해 전술적으로 충분히 숙달된 군대였고 조총으로 무장한 새로운 무기체계를 갖춘 신식군대였으며 대기병장애물을 중첩하여 설치하고 장애물 뒤에 숨어서 조총을 난사하는 왜군에게 조선 기마대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이렇게 조선 최고의 장수는 무모한 돌격전으로 장렬하게 7,000 기마대와 같이 산화했다.

 

신립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 선조는 피난을 결심하고 한양 도성과 백성을 버려둔채 100여 명 정도의 수행원만 대동하고 비내리는 밤 서둘러 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민중이 분노하여 임금 행렬에 돌팔매를 날리고 욕설을 퍼부었고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로 달려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장애원을 포함 전각에 불을 질렀다. 불타는 한양 도성을 바라보며 임진강을 건너 개경을 거쳐 평양, 의주를 향해 북으로 북으로 피난가던 선조는 이순신의 승전 소식을 들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조는 유사시 만주땅으로 망명할 생각만 하고 있었고 신하들은 울며 말렸다. 한편으로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 군대가 지원해주기를 고대하면서 광해군으로 하여금 세자에 책봉하여 분조를 이끌게 하였다.

 

다행히 명군의 지원과 전국적인 의병 궐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승전으로 전세를 다소 만회하기는 하였지만 그사이 조선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군은 가는 곳마다 살인, 방화, 강간은 물론 조선인의 코와 귀를 도려내고 부녀자.기술자를 포함 수많은 조선인 포로를 일본으로 끌고 갔다. 신장된 보급로로 인해 의병의 공격, 수로가 이순신에 차단되자 왜군은 보급품의 격심한 부족과 몰아치는 한반도 한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평양과 한양을 조명연합군에게 내주고 남쪽으로 밀려나 전라.경상도 일대 해안가에 성을 쌓고 버티면서 백성들에게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선조는 곽재우도 의심했고 이순신도 의심했다. 주변 간신들은 왜군을 몰아내는 것보다 자신과 임금의 안위가 더 걱정이었기에 두 장수가 의병 및 육군과 수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와 임금자리를 뺏을까봐 걱정이 더 많았다. 그래서 임금 선조를 충돌질하여 두 장수를 불러 곤장을 치며 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일부 충신의 간곡한 만류로 다시 백의종군으로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한편 지원군 명군의 패악질은 왜군 이상이었는데 조선 장수와 신료들이 명군 진영에 불려가 곤장을 맞는 것은 예사요 군량미 요구는 물론 왜군이 퇴각하도록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웃지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움은 않고 휴전만 생각하는 명군에게 왜군 공격은 하세월이었다. 그 바람에 선조의 성화에 이순신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조선 수군을 몽땅 이끌고 부산포로 왜군공략에 나섰지만 왜군 수군의 지연전술과 매복작전에 말려 칠전량에서 대패하여 거북선을 포함 수군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울산성 공격, 진주대첩, 명량대첩 등 전사에 빛나는 역사를 기록하면서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다시 옥죄기 시작하였고 그래도 버티던 왜군은 풍신수길이 죽자 철수를 시작하였는데 마지막 한 명까지 섬멸하겠다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기나긴 7년간의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의심과 질투심으로 똘똘 뭉친 선조는 정유재란을 끝으로 임진왜란이 막을 내리자 10대 처녀를 왕후로 맞아들여 영창대군을 낳고 치욕스런 역사와 불행의 씨앗을 남겨둔채 눈을 감았다. 선조를 무능한 군주로 볼 수 없는 것이 동서 붕당의 권력다툼 속에서도 조선 최고의 학자들을 등용하였고 문치를 펼쳤으며 붕당을 이용하여 자신의 반대세력을 적절히 견제시키고 제거했으며 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고 이순신 같은 명장을 키웠으며 수로의 길목인 전라좌수사 수군 장수에 임명했던 점, 피난을 가면서도 만주로 망명하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명나라를 끌여들여 전쟁을 끝낼 수 있었고 나라를 존속시킨 군주며 자신의 적자 후계까지 낳고 죽었기 때문이다. 할 건 철저하게 다했던 유능한(?) 군주였다. 

 

적자가 아닌 광해군의 즉위는 정통성 확립은 물론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출발이었다. 어렵사리 광해군을 등극시킨 북인들은 이러한 정적 제거에 골몰하지 않으면 정권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명나라와 후금의 위압속에서도 외줄외교로 잘 버티던 광해군은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서자들의 음모인 '칠서의 난'이 적발되어 그것을 빌미로 영창대군 제거 수순을 밟게 된다.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패륜을 저지른 결과 인조반정이 발발하게 되었고 광해군을 제거하고 인조가 등극하자 반대파의 모략으로 궁지에 몰린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인조정권에 치명적인 붕괴를 초래하게 되는 데 바로 서북방어력이 붕괴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로 후금의 침공, 즉 정묘,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남한산성에서 40여 일을 버티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삼전도에서 청군에 치욕적인 항복을 한 인조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정권을 지속하였지만 50만이 넘는 조선인 포로가 끌려가고 조선은 청나라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인조는 정권내내 반정공신들에 휘둘리면서 명이 기울고 청이 부흥하는 모습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볼모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부인 강씨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질투심에서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르는 등 무능한 군주로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조선은 숙종의 환국정치를 거쳐 영조의 문화통치와 탕평책을 시도하고 정조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조선은 정조 이후를 고비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는데 노론이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고 어리고 무능한 왕족을 등극시켜 마음대로 요리하였고 왕족 중 기질이 조금만 뛰어나 보이면 철저하게 제거하였다. 그래서 흥선군을 포함한 왕족들은 미친놈처럼 살아야 했고 바보처럼 살아야 했다. 풍양 조씨, 안동 김씨 세력이 대를 이어 세도정권을 유지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누리면서 살았지만 백성들은 탐관들의 수탈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선은 중국에서 이미 버린 유교를 통치사상으로 내걸고 신권우위론을 들먹이며 임금을 같은 중국의 신하로 폄하하면서 동등한 위치로 인식하는 등 사대사상이 주를 이루었고 명분을 앞세우고 허례허식에 치중된 사회관습을 만들었고 어려운 한자문명권을 형성하여 일반 백성들을 무식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부려먹기 좋게 제도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조선은 양반사대부의 나라였으며 백성들은 오로지 그들의 밑에서 수탈의 대상에 불과했다. 철저한 신분제에 의해 신분변화를 도모할 수가 없었고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진 암흑기의 사회였다. 사회지도층은 오로지 양반사대부들로 구성되었고 대를 이어 그들만이 무위도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철저히 차별화된 사회엿다. 조정은 이러한 양반사대부 계층이 권력을 독식하면서도 내부적으로 학연.지연으로 동.서.남.북 등 갖가지 파당을 이루어 권력싸움질이 그칠줄 몰랐고 가부장제, 남녀차별, 처첩제도를 누리면서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갖은 탐욕을 멋대로 부리면서 살았던 시대였다. 

세도정권이 지속되고 조정이 무능하고 탐관의 학정이 극에 달하자 동학의 기치를 높이들고 수많은 민중이 융틀임을 시도했으나 무능한 조정은 외세를 끌여들여 동학난을 진압하였다. 심약한 고종이 우유부단한 가운데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외세를 끌여들여 싸움질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는 그만 절단나고 말았다. 노일.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불평등조약으로 대한제국을 송두리채 집어삼키려 했고 왕족을 포함한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일제에 팔아넘겼다.

 

 

 

  

  

 

 

일제 강압통치 36년은 조선 민중의 고통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였다. 일제는 조선반도의 인력과 자원을 싹쓸이해 갔고 조선 민중은 전장터, 공장, 탄광으로 끌려가서 수없이 죽어갔다. 놋그릇, 수저, 오강까지 공출명복으로 빼앗아 갔고 토지수탈은 물론 식량, 광물자원도 빼앗아 갔다. 친일파들이 잎장서서 일본말을 사용하고 일본 이름에 일본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투사를 잡아 고문하다 죽이고 부녀자들은 일본놈들의 성노리개로 전락하여 씨받이가 되었다.

누가 일제가 망한다고 했던가. 영원히 일제에 합병되어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경찰.헌병 앞잡이가 되었고 친일파로 변신했으며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사용하고 일본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즐겨 먹으며 총독부 공무원이 되었고 순사가 되었으며 밀정이 되었다. 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많았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야심을 드러내어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본토를 침공했으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 하와이를 기습하고 동남아 지역을 석권했다. 치열한 태평양전쟁에서 산호초 해전, 미드웨이 해전을 고비로 일제는 서서히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미군은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필리핀 전역, 오키나와 등 주요 전략요층지 도서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였고 일본 본토를 향해 서서히 목을 죄여가자 마지막까지 버티겠다던 일제는 미국의 원자탄 두 방으로 결국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제의 갑작스런 패망은 우리에게 너무나 갑작스런 해방으로 찿아왔다. 해방 이후 찿아온 백성들의 고통은 일제시대에 비유할 바가 아니었다. 남북에 진출한 미.소군은 각자 지배권 확립에 각을 세우고 대립했다. 수차례 미.소공위가 열렸으나 실패하고 결국 북한 지역을 포기하고 미군정과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른 후 세워진 이승만 정권은 찬탁.반탁운동, 남북연석회의, 좌.우의 치열한 대립과 혼란한 정국, 미군정의 독주, 반란과 폭동, 남로당을 포함한 친공세력 제거 및 토벌, 친일파 복권, 주요 인사에 대한 정치적인 빈번한 암살극,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폭동, 빨치산 무장투쟁 등등 혼란한 정국은 계속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권력다지기에 열중하고 있을 즈음, 6.25전쟁이 발발했다.

 

6.25전쟁은 냉전시대 강대국의 대리전쟁이라고 하지만 미.소가 각자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남한을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미국의 에치슨 선언이 가져온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기습했다. 낙동강까지 피죽지세로 밀리던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다시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하였으나 은밀히 침투한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를 거듭,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다시 수복하는 등 지리한 공방전이 휴전선 일대에서 계속되면서 쌍방 간에 사상자만 늘어갔다. 중공군 개입까지 부른 3년간의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며 전국토는 초토화되고 말았고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했다. 미군과 유엔군, 국군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자 더 이상 승산이 없던 쌍방은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휴전회담이 열렸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극한대치한 가운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 북한은 김일성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사일, 핵무기 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는 북한은 중국과 소련이 손을 놓아도 자력으로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봉착하였기 때문이다. 폭압과 폭정, 무자비한 인권탄압,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굶주림에 지친 북한 주민들의 탈북이 줄을 잇고 있다. 우리는 점차 자본주의 시장이 확산되는 가운데 북한체제의 견고성이 점차 무너질 것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그런 흡수통일이 가능할 것인가는 아직 의문이다. 이유는 우리 정치.사회가 아직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묵인 없이 우리가 자력으로 통일을 이루기도 힘들고 미국을 이용하여 중국과 러시아의 묵인을 받아내지 않는한 통일은 요원하다. 대중, 대러외교가 아직 미흡하고 미국 의존도가 너무 심화되어 있는 점도 문제거니와 내부적으로 후진적인 정치시스템과 국방과 안보.외교가 외세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다. 또 정치권.지도층, 그리고 가진자들이 불법과 탈법, 비리와 부패에 심취되어 있고 국난에 스스로 앞장서지 못하는 부도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