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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2 : 일제강점기 47(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

 

 

 

 

한국의 역사 1,002 : 일제강점기 47(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

 

 

 

 

 

           

 

 

경신참변과 자유시 사건

 

일제의 패전 분풀이, 용정 장암동 조선인 학살

 

망국 10년 만에 일본군 정규 부대를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전연승한 독립군들은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전쟁을 치러 일본을 쫓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로 이주해 전열을 재정비하려던 독립군은 뜻밖에도 러시아에서 큰 수난을 당하게 된다. 바로 '자유시 사건'이다.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연전연승한 독립군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만주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햇다. 일제는 독립군들이 북상한 뒤 생긴 공백을 만주의 한인 교포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메웠다. 독립군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패전의 분풀이를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것이다. ㅇ리제는 청산리에서 패전 직후인 1920년 10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중점적으로 한인마을에 대하여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일본군이 퇴각하는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 기무라 지대는 1920년 10월 22일 대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 일대로 남입해 대한군정서 병영과 사관양성소 건물을 모두 소각하고 백초구, 의란구, 팔도구 등지의 양민 150여 명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학살했다.

 

10월 30일에는 일본군 제14사단 15연대 소속 오오카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있던 기독교도 마을 장암동을 포위했다. 대부분 젊은 남자들은 학살 소식을 듣고 피신했는데 일본군은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3.1운동 당시 '수암 제암리 학살 사건'에 비견되는 '장암동 학살 사건'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교회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칼로 찌러 죽였다.

 

그런데 사건 다응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하여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과 캐나다 죽장로회 선교사 푸트 등인데 마틴의 보고는 일본군의 잔학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군은 마틴 등이 조사하려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이때 이를 취재하던 <동아일보> 장덕준 특파원도 실종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2일자는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는데 생시에도 볼 수 없고 꿈에서도 만나지 못하는가?"라는 내용의 추모사를 실었다. 1925년 8월 30일자에서는 "일본인과 함께 나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는 후속 보도가 있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1920년 12월 6일 일본군은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에게 얼굴 가죽을 벗기고 두 눈을 도려내는 만행을 저질렀고, 연길현 소영자에서는 부녀자 25명을 강간했으며, 연길현 팔도구에서 유아 4명을 칼로 베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경신참변인데 장덕준 기자 행방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가 철저하게 은페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 상황을 알기 힘들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1920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훈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전.영안 등 8개 현의 한인만 피살 3,693명, 체포 171명, 부녀 강간 71명에 가옥 손실 3,288채, 학교 소실 41개 교, 교회 소실 16곳이라고 전한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산은 <아리랑>에서 삼원포에서 만났던 교사 조운산을 다시 북경에서 만나  들었다면서 자신이 만났던 안동희 목사 일가가 당한 참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전한다.

 

일제는 안동희 목사 일가를 부부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아들이 산채로 세 동강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고 안목사는 억지로 땅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생매장되었고 이를 모두 지켜본 부인은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고 김신의 첯사랑이었던 열네 살짜리 딸은 그후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아마 일본군에 끌려가 윤간을 당하고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북만주 밀산에 집결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전체 병력은 3,500여 명에 달했는데, 봉오동.청산리의 잇따른 승전으로 사기는 드높았다. 대한독립단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이 맡았고 부총재는 김좌진.홍범도.조성환 등의 장군들이 맡았다. 총사령관은 김규식, 참모총장은 이장녕, 여단장은 지청천이었다.

 

이무렵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 등은 하바롭스크에 있던 적군 제2군단과 협의해 자유시인 알렉세에프스크에 독립군 주둔지를 마련했다. 문창범이 대한독립군단에 사람을 보내 자유시로 오도록 권유하자 일단 러시아로 퇴각해 전열을 재정비해 만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레닌이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회 대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위원회 보고에서 "우리 테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피압박 민족과 억압 민족 사이의 구별"이라면서 식민지 민족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가게 된 주요 동기였다.

 

그런데 자유시에 먼저 러시아로 귀화했던 한인부대들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 산하 특립부대 400여 명은 러시아로 귀화한 오하묵 등이 이끌고 있었는데, 보통 '한인보병자유대대'라고 불렀다. 또 1920년 3월 러시아 적군과 함께 일본이 장악한 니콜라예프스키를 공격했던 380여 명의 니항군(軍)도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 두 개의 세력이 서로 군권을 장악하려고 다투면서 비극이 싹이  튼 것이다. 1921년 초여름가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부대는 모두 4,000여 명에 달했으므로 서로 군권을 탐냈다. 니항군은 러시아 흑룡주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해 독립군 부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조하고 대한총군부.대한국민군 등을 형식상 사할린의용대로 편제시켰다. 반면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교섭해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만들고 사할린의용대의 지도권을 확보했다고 선언했다. 결국 두 세력 간에 사할린의용대 군권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일본은 북경에서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어업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 영내 한인 혁명단체의 무장해제를 거듭 촉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결국 일제의 간계로 러시아 적군에 의해 독립군부대가 모두 무장해제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7일 고려군정의회는 일제의 요구에 따라 상부로부터  독립군 무장해제가 지시되자 사할린의용대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극동 적군 제2군단 12여단 산하 4개 중대를 차출했다. 사할린의용대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자 6월 28일 12시쯤 총격을 가하면서 무장 해제에 나섰다. 목격자였던 김승빈은 "총소리는 해질 무렵에 가서야 그쳤다"고 전한다. 결국 쌍방 간에 무수한 사상자를 내었고 독립군은 결국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 사상 큰 비극 중 하나인 '자유시 참변'이다. 독립군이 러시아로 간 것이 큰 패착이었다.

 

이 사건은 경위도 복잡하고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도 일치하지 않는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아ㅣ라고 주장하는 반면 만주의 항일단체들이 연명한 성토문에서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김좌진과 이범석은 중도에 만주로 되돌아가 화를 면했다.

 

봉오동.청산리 승전으로 승기를 타던 독립군은 이 사건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러시아 적군의 공격을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면서 빈손으로 다시 만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끼리 힘을 합쳐도 어렵던 독립군 무장 투쟁이 결국은 독립군이 러시아로 들어가는 바람에 러시아 한인부대들 간에 군권을 두고 서로 욕심내어 다투다가 독립군이 모두 무장해제를 당하고 자멸하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