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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초겨울 1 : 월남전쟁과 참군인, 채명신 장군

 

 

 

 

강남의 초겨울 1 : 월남전쟁과 참군인, 채명신 장군

 

  

                                                                                   새벽 고속터미널 사거리 전경

 

 

11월이 새벽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처럼 소리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날씨는 영하로 곤두박질 치고 서서히 대지가 얼어 간다. 방한 대비를 단단히 하고 새벽길을 나서지만 발끝과 손끝에 서려오는 찬기운은 겨울이 다가옴을 실감나게 한다. 날씨가 좀 추워지니 사람들이 움추려들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영하의 새벽 날씨에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탈 수가 없다. 방한화도 신고 손난로도 넣고 가면 이정도 영하의 날씨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런 추운 날씨에 새벽 자전거를 타는 나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누가 미쳤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위에 움추려들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한다는 것은 삶을 원기차게 만들고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뉴스에는 자전거 헬멧에 대해서 품질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국산과 외제 가격 차이가 11배나 난다고 한다. 그러나 강도나 착용감 등 모든 면에서 국산이 외제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비싼 값을 주고 자전거용품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는 재정적인 넉넉함을 바탕으로 디자인과 안정성을 이유로 사겠지만 결국 돈만 보태준 꼴이 되고 말았다. 나의 헬멧은 인터넷에서 2만원 정도 주고 산 가장 가격이 싼 제품이다. 단단하고 견고하여 지금까지 3년째 잘 쓰고 있다. 그러나 자전거는 너무 싼 국산 제품을 사면 재질이 조잡하여 고장이 잦고 쉽게 망가진다. 자전거는 어느정도 재질이 보장된 중간급 제품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폼만 잡으려 애쓰거나 너무 비싼 저전거를 탄다고 남이 알아주는 것은 아니다.

 

  

 

녹차돼지고기가 먹거리 방송을 탔다. 엉터리 녹차돼지고기를 10% 이상 돈을 더 주고 사먹은 주부들이 분통이 터질 것이다. 고기능성이라고 산 제품, 천연제품, 각종 겨울용 발열제품, 만병통치약이라는 제품, 고가의 화장품 등 미용제품, 명품이라고 파는 비싼 제품, 비싼 옷, 신발, 귀금속 등등 소비자를 우롱하고 속이는 광고가 판을 치고 소비자는 자신도 모르게 쇄뇌되어 그런 비싼 제품을 자랑스럽게 구입한다. 우리나라도 명품 세일한다면 사람들리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처럼 뉴스를 보니 미국에서도 가전제품을 헐값에 세일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폭행에 총질까지 했다니 사람은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명품에 목말라 숨이 넘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외모와 허상에 눈이 멀어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사채시장에 일본자금이 점처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제2금융권을 매입하여 점차 시장을 잠식해 가고 있다니 우려가 된다. 은행 문턱이 높아 아무나 은행 대출이 어렵다, 개인신용도 은행들이 마음대로 정하고 금리도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오르내린다. 중도상환수수료라는 것이 웃기는 게 빌린돈을 조기에 갚는데 웬 수수료란 말인가? 1원이라도 연체되면 끝까지 통지서가 날아오고 나중에는 법정까지 가는 것이 은행이다. 국민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 바로 은행이다. 그런데 은행들이 금융위기시 파탄났을 때 국민 세금으로 되살려 놓은 것이 은행이다. 지금은 번 돈으로 그들끼리 돈잔치를 벌이고 오너들의 연봉이 수십 억씩이다. 임원들은 덩달아 엄청난 연봉을 받아 챙긴다. 모두가 정권을 등에 업은 금융권 모피아들의 국가 돈 빼먹기다.

 

천주교 한 시제가 한 발언을 가지고 정국이 혼란의 도를 더하고 있다. 또 약속이나 한듯이 기독교 단체, 불교단체까지 가세하고 있다. 서양에서 자라다가 부패하여 쫓겨온 무리들이 종교천국인 이 땅에서 평생을 감언이설로 민중을 현혹시키고 신도들이 내는 헌금과 시주로 무위도식하며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 무리들이다.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무리들의 힘을 앞세워 정치에 간섭하려 한다. 물론 도덕성을 상실하고 정의가 바로서지 못한 정치권 스스로도 반성해야지만 종교단체들까지 정치싸움에 기름을 붓고 있는 현상은 나라를 더욱 갈등속으로 몰아가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역사상 도덕적인 권력은 없었다. 그리고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내분으로 갈등의 혼란 속에 빠져 허덕이다가 국력을 소모하고 북한의 위협을 억지하지 못하여 이 나라가 적화통일되어 식량,전기,수도,가스 배급제를 실시해야 정신차릴까? 국민들의 힘을 모아도 부족할 판에 명분없는 싸움질에 기름을 붓고 민중을 선동하고 편을 가르고 적을 이롭게 하는 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는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다. 민생은 팽개치고 갈등과 분열로 허송세월만 보내는 이 나라가 안타까울 뿐이다.

 

 

                                                                                 방배동 신동아 아파트 가을

 

 

우리나라는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보다 해양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돌파구를 찿기가 힘들다. 신라의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통해 엄청난 재화를 벌어 신라 조정을 지탱하여 준 것처럼 내부적인 좁은 반도에서 서로 싸워봐야 남을 게 없다. 고구려가 그토록 중원 진출을 시도했지만 북경 근방까지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중국 대륙을 지배한 민족이다. 거란족이나 여진족은 결국은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며 살던 후예들이지만 몽고족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 고려는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북위, 원나라 등의 장벽에 갇혀 중원으로 진출은 커녕 만주땅을 밟지도 못하고 무신정권 80여 년, 몽고지배 100여 년 통합 180여 년인데, 고려 존속 기간의 태반 이상을 혼란과 내부 분열로 침체하였고 결국 몽고의 외침으로 30여 년간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고 100여 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으며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재주해군기지 건설 현장 강정마을은 오늘도 공사반대론자들이 공사를 방해하고 있다.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인 제주해군기지는 요즘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를 보더라도 해양 세력의 중요성이 극도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 월남전 파병 반대나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던 놈들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동북아 정세를 보면 심지어 제주도에 전진공군기지를 건설할 필요성까지 생각된다. 우리는 반드시 해양으로 진출해야 하고 그래야 국력신장이 가능하고 각종 자원의 유입, 수출입 물동량의 자유로운 길목인 해양진출로가 차단되는 날에는 우리는 스스로 고사하고 말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 정권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졸부근성의 반대파의 심리,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읽지 못하는 우둔함, 민중의 대중주의에 편승해 오로지 표밭만 의식하는 정치인들 등 모두가 이조 500년 동안 벌인 당쟁의 산물이다. 우리날 정당은 능력도 없으면서 비젼도 제시못하고 탁월한 지혜도 없는 무능한 자들이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정치권에서 파당을 만들어 국익을 팽개치고 자신들의 권력욕인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집단에 불과하다. 조선의 파당이 그랬고 임시정부가 내분으로 갈라졌고 만주 독립군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겨우 통합했다가 다시 갈라졌다가 일제의 소탕에 몰락한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몰론 사람이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국난에 처한 현 시점에서 국론을 통일해도 시원찮을 상황에 갈등을 부채질하는 세력은 누구의 조종을 받고 활개를 치는가?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 평등, 도덕성은 속에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을 감추고 부르짖는 언행으로 모두 허구다.

 

 

 

요즘 기황후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 주인공(주진모 분)이 충혜왕인데 실록에는 폐륜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기황후(하지원분)를 사랑한 정의로운 고려왕으로 나온다. 물론 실록도 100% 진실은 아니지만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좀 황당한 스토리 구성이다. 배우들도 역사왜곡을 들먹이자 자신이 출연하는 지라 엉뚱한 말을 한 모양이다. 기황후에 대해서는 실록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다. 그녀가 고려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자라는 사실과 나중에는 원나라 궁중 고려 내관들에 의해 원나라 왕후에 까지 오르는 전설적인 여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후 그녀의 가족들, 특히 오빠 기철은 고려 조정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고 기씨 집안 사람들이 고려 왕실과 조정은 물론 고려 사회를 농단하였던 극히 부패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펼치면서 기철을 포함하여 그 세력을 제거하지 기황후는 분노하여 몽고군 1만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도록 했다는 사실, 그 몽고군이 최영에 의해서 국경 근처에서 패전하여 물러남으로써 실패하였다는 사실 등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충혜왕과 기황후에 대해서 실록과 너무나 판이한 영웅적이고 순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역사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국민을 대상으로 역사를 재미로 재단하고 재구성하여 인기와 시청율에 영합하여 광고수입만 올리려는 방송사가 시청자와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는 점에 분노한다.

 

방송국의 기황후의 기획의도를 보자.

"몽골고원에서 얼어나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원제국, 그 원나라를 무려 37년간 지배한 여인이 있었다. 기황후, 그녀는 공녀로 끌려간 고려의 여인이었다.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이 삶은 가혹하고 참담했다. 궁중의 시녀가 되거나 고관대작들의 첩실이 되는가 하면, 유곽에 팔려나가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해야 했다.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땅에 끌려간 제 나라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기황후 역시 여느 공녀들처럼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운명의 질곡 속에 내던져져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하고 냉철했다. 운명은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상대였고, 고려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다면 스스로 지켜내야 했다. 그 기세와 지혜, 냉철한 판단과 뜨거운 열정으로 그녀는 마침내 대원제국의 제1황후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생몰년도와 정확한 사료는 어디에도 찿을 수가 없다.

 

이제 7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사랑과 권력을 향한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복원하려 한다. 전 세계로 퍼저나간 이민자들이 천만에 육박하는 이 시대에, 기황후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 보게 하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꿈꾸게 하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기획: 주성우, 제작 :조윤정, 극본 :장영철.정경운, 연출 : 한희.이성운

 

이민자, 해외입양 등 뿐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10만이 넘는 해외진출 여성전사들이 있지만 그들이 조국 대한민국이 좋아서 이민가고 입양되고 이 땅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기 힘들어서 떠난 사람들이다. 기황후도 본의 아니게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공녀로 끌려갔고 운명적인 인연에 의해 몽고 왕자를 만나 황후에 오르는 반전을 이루었지만 결국은 자신과 자신 가문의 영달을 위해 고려왕과 조정을 휘저었고 동생 기철이 처형되자 고려왕과 조정을 무시하고 무력까지 동원하여 고려를 굴복시키려 했다.

 

과연 그녀가 지금 재조명되고 있는 것처럼 조국 고려를 위해 일했고 고려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여성이었는가는 의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달을 추구하는데 급급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황위를 물려받는데 온 정성을 기울인 여자였으며 고려 왕과 조정을 우롱하였고 그녀의 식솔들은 고려 사회를 극히 어지럽힌 파렴치범들에 불과하였다는 점이다. 기획의도에 나와 있듯이 이민자, 입양아들 중 누군가는 그 나라에서 출세할 것이다. 그들이 과연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이 자란 나라를 배반하고 대한민국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날 저녁 서울고 정문 근방 건널목 풍경

 

 

방공식별구역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인접 나라 중국이 이어도를 포함하여 선포하니 그때서야 난리들이다. 이어도는 우리 방공구역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현재 일본방공구역에는 이미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 그런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왔다는 공군, 국방부, 민간항공사, 외교.국방전략가들과 학자들, 역대 정권 안보팀 등 모두가 문제의식도 비젼도 없는 무능력자들이다. 바다는 한국군함이 초계활동을 벌이고 있고,  하늘에서는 일본, 중국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웃기는 암초 이어도. 일본은 센카쿠 암초를 섬으로 만들기 위해 배와 헬기로 석축을 쌓고 콘크리트를 치는 등 안간힘을 쏟는데 반해 우리는 암초 위에 덩그러니 기둥만 박고 정자만 지은 꼴이다. 정부에서는 이제서야 방공식별구역을 이어도를 포함하여 인접국과 협의하여 확대한다고 한다. 그러나 막차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 중국은 이미 반대했고 일본도 이미 그동안 협상에서 실패한 것처럼 자신들 방공구역에 설정되어 있는 이어도를 우리에게 양보할 리가 없다. 마치 독도를 방치하다가 오늘날 처럼 문제가 야기된 것처럼 조선의 공도정책이나 마찬가지다. 동북아 정세는 날로 점점 더 변화무쌍한 위기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런 판국에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전략은 과연 무엇인가를 정부, 학자, 군, 그리고 국민들이 모두 우선적으로 고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동북아 정세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바야흐로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축으로 등장하고 동시에 동북아 지역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에 패권 경쟁이 첨예화됨에 따라 한반도는 안보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상황이다. 그 배경은 일차적으로 중국의 부상(浮上)에 따라 미국 역시 아시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아시아로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 정책’을 내세우며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미국은 국방예산 감축 압력으로 일본에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는 대신 한.미·일동맹을 더 강화시키면서 대중국 포위전략을 수행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초조해진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안보외교 노선에 주저하지 않고 동참하면서 집단적 자위권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동북아 국제질서는 상대적 역학관계로 결정되는데, 미국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한·미 관계보다 미·일 관계를 더 중시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단지 대중국 포위의 전초기지이며 대북억지력의 최선봉이다. 주방어선은 필리핀-오키나와-일본 알류산 열도로 연결되는 선인데, 그래서 일본과의 공조가 미국 입장에서는 무엇보다고 중요할 것이다. 미국의 국방예산이 삭감되고 방위비 지출이 한계에 도달하자 일본의 재무장으로 중국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시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반도 급변사태 발생시 일본 자위대의 투입도 고려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전략이다.

 

그러나 불편한 것이 한·일 관계이다. 지난번 미국의 한 특사가 박대통령을 방문하고 단호한 박대통령의 대일관계 발언에 놀랐다는 식으로 발언한 것이 바로 미국 정치권의 한일관계에 대한 인식이며 무감각성이다.

 

일제가 망하고 해방이 되자 우리는 미국의 지원과 도움으로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남한에서 정부를 세웠고 미군의 지원하에 망할뻔 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끝냈으며 운좋게 경제개발을 이룩하여 오늘날의 국가 부흥을 이루었고 풍요를 즐기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오늘날 한국이 이런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누구덕인줄 아느냐? 계속 그런식으로 하겠다면 주한 미군을 전면 철수할 것이니 앞으로는 한국 스스로 알아서 해라"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존전략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의 국방력에 의지하여 국가를 존속해 왔고는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며 그런 가운데 남북 대치하에서 긴장의 살얼음판 위를 걸어 오고 있다. 한국전쟁 후 지난 60여년 동안 대한민국은 치열한 남북대결 상황에서도 국민들의 열정적 노력에 힘입어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대국이며 풍요로운 국가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이런 변화 과정에서 한국은 안타깝게도 타국에 변화를 강제하거나 주도할 수 있는 선도적 중심권에 속하지 못하고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처지다. 남북한 분단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위협, 핵무기 개발 등은 한국의 안보외교 책략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고 강대국 미국에 국방과 안보를 의지해야 하는 입장에서 대미종속 국방.외교는 현재와 같은 약소국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북한은 주민들이 굶어죽던 아사자가 속출하던, 탈북자가 넘쳐나던 오로지 핵무기를 포함한 재래식 무기, 비대칭전력 등 남한에 비해 월등히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호시탐탐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김씨 세습정권이며 군국주의 파소정권이다. 우리들은 적화야욕이라고 외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외세 미군을 몰아내고 자주통일을 이루는 민족통일사업이기도 하다. 그레서 사실 명분은 북한의 입장에서 떳떳하다. 그러나 정통성이 없는 북한은 머슴이 주인을 몰아내고 가산과 부인을 차지하듯이 미구을 볼아내고 남한정권을 붕괴시키고 지도층과 불순분자를 모두 제거한 다음 차지할 수 있는 한국의 엄청난 경제력을 한편으로 탐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전쟁보다 남한이 스스로 극도로 내부적인 갈등으로 혼란해지도록 기대하면서 각종 우회 대남전술을 펼치고 있다. 그것에 동조하는 친북.종북 세력들이 엄연히 정치.사회 각 분야에 포진하여 있고 그들 친북.종북 세력이 국회까지 진출하여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그들의 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북쪽에는 아직도 휴전중인 무장집단 북한이, 서쪽에는 G2로 부상한 중국이 거대한 인구와 경제력, 군사력을 앞세우고 패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륙굴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포위망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남쪽에는 일본이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고 동쪽 이억만 리 먼 태평양 건너편에는 우리의 영원한 우방 미국이 긴 손을 뻗어 내밀고 우리는 힘들게 두 손으로 꽉 부여 잡고 있다. 만약 손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현해탄 속으로 모두 투신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의 대한국 길들이기 전략일 것이다. 최신무기도, 핵무장도, 미사일도 통제하며 유사시 미군철수 압력으로 한국을 압박하면 우리는 나라를 존속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에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부상에 미국은 초초하다. 내부적인 각종 갈등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아랍 극단주의들의 은밀한 대미 테러는 지속될 것이고 중국의 급부상은 미국의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일본을 앞세워 중국의 군사력에 대치하려 하고 있고 일본은 이 기회에 미.일동맹을 전제로 재무장을 공식화하여 시도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한반도에 북한의 급변사태 내지 남한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한국군의 조기 무력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대타격, 핵공격/화학전 등 전면전에 버금가는 유사 긴급사태 발생시 만약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미국은 한.일관계를 무시하고 미군 대신 일본군을 남한지역에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투입할 공산이 크다. 러시아는 미국을 견제하며 북한을 앞세워 실리를 취할 것이고 중국은 한.만국경의 중국군을 조기에 투입하여 북한 지역에 산재한 핵무기 등 중요 핵심시설을 모두 접수할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만 보장된다면 언제라도 남한을 일시에 공격할 태세다.   

 

최근 중국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동중국해 방공망 설정의 의미도 일본과 미국을 시험하고 있으며 센가쿠 열도, 이어도, 남중국해 영토분쟁 등으로 군사력을 앞세워 분쟁지역으로 만들 공산이 크다. 이에 그동안 태만에 방심하고 무사인일로 일관하던 우리나라 국방부가 국민들의 공분이 일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이어도를 포함한 방공방을 확대 추진한다고 한다. 이미 중국이 방공망 협상을 거부한 상태에서 일본도 중첩 설정을 인정할 리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이어도를 포함한 방공망을 확대할 경우 이어도는 일본, 중국, 한국 세나라의 방공망 범위 속에 같이 포함된다.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어도는 수중 암초에 불과하다. 그 암초 위에 정자를 지어 놓고 주변 해상에는 한국 군함이, 하늘에는 세 나라의 항공기가 서로 지나가며 세 나라에 통보해야 하는 꼴이 된다.

 

미국은 중국과 한국이 일본에 대한 과거의 깊은 상처를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호한 박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발언에 미국 관리가 놀랐다는 식이다. 미국이 한.미.일 간에 동맹을 원활히 추진하려면 작금에 한.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징용자 보상 문제 등의 역사 갈등 문제를 미국이 중재해서라도 하루빨리 풀어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은 한국이 절대 허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파키스탄-인도-동남아시아-필리핀-대만-일본-알유산 열도 알래스카를 연한 태평양 방어선을 구상하고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은 미국이 자신들이 세계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서태평양 일대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전략일 뿐이며 여기에 일본과 한국이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은 중국의 강력한 도발로 사태가 불리하여 핵전쟁을 포함하여 대규모 전면전을 벌일 각오가 아니라면 유사시 일부는 중국에 기득권을 양보하고 포기할 수도 있다. 그 우선적인 대상이 바로 한국이며 다음으로 대만, 센가쿠 열도, 일본 등이다.  

 

 

                                                

 

 

 

그러면 이러한 동북아 국제정세에 따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존전략은 무엇인가? 나름대로 개인적인 생각은 아래와 같다.

 

첫째, 고슴도치형 방어 전략

국제질서를 주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입장과 처지가 아니라면 변화로부터 야기되는 영향을 최소화시키면서 관련국들이 함부로 경시할 수 없는 고슴도치 책략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드리면 같이 물고 늘어지는 가시고기처럼 공격적인 핵무장을 구비해야만 한다. 미국이 언제까지 우리들의 안보를 책임질 수는 알 수가 없다. 미.일동맹이 우선이고 한.미동맹은 차후문제이다. 우리는 전초기지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주방어선이다. 미.일동맹이 강화되면 일본의 재무장은 순간적이다. 일본의 자위대의 무장력은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사일을 포함한 핵무장까지 빠른 시간에 구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방이 핵무장으로 무장한 가운데 우리만 비핵을 외치면서 유아독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다시 나라가 망한 조선말 꼴을 재판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둘째, 대북 유화정책 다각적인 추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 체결, 군사교류 강화, 남북 군사력 감축 협상, 개성공단 같은 모델 확대 추진, 시베리아 종단철도 조속 추진 협상. 남북관광 자유화, 인적.물적 교류 확대, 각종 경제지원, 휴전선 일대 군사력 철수, 중립국 분쟁 방지 감시위원단 확대, 비무장지대 공원화/교류시장/국제공단 및 각종 단체 유치/생태계 보호구역 설정/화합의 장 건설/문화.예술 공연장 건설 등이다. 무리하고 엄청난 일 같지만 지도층이 이러한 구상과 전략을 가지고 휴전선을 평화지대로 만들고 유엔 및 국제적인 각종 단체 및 외자를 유치하고 각종 회의장, 교역장, 문화.예술 공연장, 생태공원 조성 등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비용절감 노력을 지금부터라도 기울여야 한다.,

 

셋째, 외교.국방 대미종속 탈피 및 다변 외교.국방 전개

외교.국방력, 무기개발 및 구매, 판매, 동맹관계 등에서 미국 일변도에서 벗어나  자주적이고 다변적인 외교.국방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미국이 미군 전면 철수 등 강하게 압박하며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방력이 자력으로 북한의 위협을 억지할 수 있는 자주국방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미국의 각종 군비통제 속에 외교.국방을 의지만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영원히 미국의 안보.국방종속국이 되어 각종 불평등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둔군 비용 사용내역에 대한 국정감사 불가는 물론,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미군 폐기내지 노후 무기도입 압력, 다국적 기업의 국내 기업 사냥 및 국부유출, 각종 일방적인 무역장벽 및 경제재제,  지적재산권 침해 시비, 불량 품질의 상품 수출, 미사일 사거리 개발 통제, 원자력 이용과 개발 통제, 우주 발사체 개발 제한, 한국의 무기수출 통제 등에 각종 이유를 들먹이며 제동을 걸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 동남아.호주 등 아세안 국가, 유럽국가 등과 다변외교를 전개하고 그들 주변국과 경제.군사동맹내지 각종 경제.군사교류 및 지원을 확대하여 다국간의 다자동맹관계도 구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지혜롭게 판단하고 전문가들의 중지를 모아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자가 반드시 역사에 남게 되어 있다.

 

넷째, 스위스형 중립국 형태의 자주국방 체제 도입

상비병력 감축 및 전문화, 예비군 제도 전면 개혁을 통해 해.공군력을 증강하고 첨단화해야 한다. 아직 제작도 하지 않은 최신 전투기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무기 판매 후 기술이전은 미미하고 각종 제동을 걸면서 미국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수리부속을 고가에 판매하는 대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 나로호 발사체 문제로 러시아에게 굴욕적인 각종 거절과 발뺌, 재제를 받고 있는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전 국민을 상비군에 버금가는 스위스형 국민방위군으로 개혁하고 군 개혁도 강력하게 시행하여야 한다. 정치군인을 속아내고 전문성을 가진 참군인을 선벌하여 군개혁에 투입해야 한다. 군은 군에 맡기고 정치권의 개입을 차단하고 자주적인 첨단군으로 정예화해야 한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 연구소, 대학,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과 장려가 필요하다.

 

 

 

 

 

 

월남전쟁과 참군인 채명신 장군

 

 

월남전쟁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大韓民國軍 베트남戰 參戰) 또는 월남전 참전(越南戰 參戰), 월남 참전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도발할 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한국이 공산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시아지역의 안보와 자유수호를 위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한편 야당인사인 윤보선, 장준하, 김준연 등은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대한민국 9보병사단 베트남 전쟁 참전의 군인

 

 

개괄

 

 

 

주월 한국군 초대사령관 겸 통합사령관 채명신 육군 중장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다. 1964년 9월 11일 1개 의무중대(醫務中隊) 및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는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지원단(軍需支援團) 및 백구부대 등 1개군단 병력을 파견하여,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미국 다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파월 후 한국군은 월남평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월남문제에 대해서 큰 발언권을 행사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전쟁 참전 수당과 차관을 받아내게 되었다.

 

1966년 10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참전국 정상회담에서는 주도적 지원국가라는 점에서 박대통령이 기조연설 행하고, 월남평화방안으로서 협상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중지 등 구체적 성의를 보일 것, 월남의 의사를 존중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경부고속도로 노선 지도
(월남 파병의 댓가로 지불받은 지원금과 차관이 투입되었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미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군의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에의 참전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 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며, 한반도 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고, 전투 경험을 얻었다. 반면, 파병된 대한민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WIA)를 기록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자를 낳았으며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유명인사로는 전두환이 이 전쟁에 연대장의 신분으로 참전하였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미국의 월남전의 월남화계획에 발맞추어 한국도 점차 주월군 철수를 시작, 1973년까지는 완전히 철수했고, 그 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2005년 8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배경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을 받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강화하여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당시 전 세계가 공산화 도미노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뒤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를 케네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 미국은 한국에게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을 하였고, 미국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군의 참전은 조약상의 의무에서가 아니라 미국측이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발전에 소요되는 차관공여를 약속함으로써 이루어졌고, 미국이 한국군을 참전시킨 이유는 1차적으로 미국내에서 광범위하게 일고 있던 반전여론을 무마시키고 미국군 봉급의 1/3 수준인 한국군을 전선에 투입함으로써 전비절감을 꾀하고자 한 계산에서였다. 이에 따라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4년 10월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 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백마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하였다.

 

 

참전 일지

2005년 8월 26일 공개된 베트남 참전 외교문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1964년 5월 9일 존슨 미국 대통령 자유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요청
  • 1964년 7월 15일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 한국군 파병 요청
  • 1964년 7월 31일 국회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 1964년 9월 12일 제1차 파병단 사이공 도착(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
  • 1965년 1월 26일 국회 제2차 파병동의안 가결
  • 1965년 3월 16일 건설지원단(비둘기 부대) 사이공 도착
  • 1965년 8월 13일 국회 제3차 파병(전투부대) 동의안 가결
  • 1965년 10월 14일 제2해병대여단(청룡부대) 깜리인 상륙
  • 1965년 10월 20일 주월 한국군 사령부 사이공 개소
  • 1965년 11월 2일 수도사단(맹호부대) 본대 뀌년 상륙
  • 1966년 3월 20일 국회 제4차 파병동의안 가결(전투부대 증파)
  • 1966년 4월 19일 수도사단 제26연대 본대 뀌년 상륙
  • 1966년 10월 3일 제9사단(백마부대) 닌호아 및 깜라인 상륙
  • 1966년 10월 21일 박정희 대통령 남베트남 방문
  • 1971년 12월 4일 주월 한국군 제1단계 철수 시작(제2해병 여단)
  • 1972년 4월 13일 주월 한국군 제1차 철군 완료
  • 1973년 1월 28일 베트남 전쟁 평화협정 발효
  • 1973년 3월 13일 주월 한국군 제2차 철군 완료(본대)
  • 1973년 3월 23일 주월 한국군 후발대 철수 완료
  •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에 의한 사이공 점령

 

 

파병

 

1964년 5월 9일 미국은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964년 9월 11일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는 맹호,청룡부대 그리고 1966년에는 백마부대의 파견으로 연인원 30만 명, 최대 5만 명이 파병되었다.

 

 

제1차 파병

1964년 5월 9일 미국이 보낸 서한에는 "1개 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을 했다. 그리하여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6월 10일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하겠다고 통보를 하고, 1964년 7월 31일에는 파병동의안을 국회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1964년 9월 11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23일 환영행사에 참가한 대한민국군은 9월 25일 붕따우에 도착하여, 9월 28일부터 업무를 시작하였다.

 

 

제2차 파병

1964년 8월 2일과 4일 통킹만 사건이 발발한 후 본격적인 미국의 군사 개입과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미군은 후방지원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게 되자,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Winthrop G. Brown) 주한미군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남베트남에서 후방지원을 담당할 비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1965년 1월 2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한국군 2차 파병 요청을 서한으로 접수하고,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동의를 받았다.

 

국회에서 파병안이 가결되자, 국방부는 강원도 현리에 있는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비둘기부대》로 명명했다. 이 부대는 건설지원단으로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와 수송자동차, 공병 등으로 편성되었다.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는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제3차 파병

2차 파병이후 베트남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호찌민 루트를 통한 북베트남 정규군의 남하가 계속되자 남베트남의 곳곳에서 지상군 전투가 격화되고 있었다. 1965년 3월 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으며, 이동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의 다음과 같이 협상을 한다.

  1. 파병 상한선은 5만명이내
  2.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3.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4.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위와 같은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년 5월 17일에서 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8월 13일에 국회의결을 얻었다. 국방부는 수도사단과 해병대 제2여단을 파병부대로 선정하고,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로 각각 명명하였다. 9월 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0월 9일 청룡부대는 남베트남 깜란에 상륙하여 9월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문을 열었고, 11월 1일 맹호부대가 뀌년에 상륙을 하였다.

 

 

제4차 파병

1965년 말까지 184,300여명을 파병한 미국 내에서는 반전여론으로 인해 추가 파병이 한계에 봉착했다. 그리하여 존슨 정부는 반전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1965년 12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이동원 외무부장관에게 러스크 국무부 장관이 전투부대 추가파병을 공식 요청하였다.

 

느긋해진 한국은 3차 파병시 합의했던 한국군 장비현대화 등의 약속이행을 촉구하며, 〈선약속 이행, 후파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선파병, 후약속이행〉을 주장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다급해진 미국은 1966년 1월 1일2월 22일 험프리 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여 약속 이행을 선언하며,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브라운 미국대사와의 협상을 통해 한국에 약속한 내용을 서면화한 《브라운각서》를 받아내었다.

1966년 2월 22일 남베트남 정부가 추가 파병을 요청하자, 3월 22일 국회 의결을 거쳐 그리하여 제9사단(백마부대)과 제26연대 파병을 결정한다. 4월 19일 제26연대가 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닌호아 일대로 진군한다.

 

 

연도별 참전병력 현황

1964년부터 1972년까지 9년에 걸친 연도별 참전현황은 다음과 같다.

 

년도 총계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기타
1964년 140 140 0 0 0 -
1965년 20,541 15,973 261 21 4,286 -
1966년 45,605 40,534 722 54 4,295 -
1967년 48,839 41,877 735 83 6,144 -
1968년 49,869 42,745 785 93 6,215 31
1969년 49,755 42,772 767 85 6,096 35
1970년 48,512 41,503 772 107 6,096 34
1971년 45,663 42,354 622 98 2,558 31
1972년 37,438 36,871 411 95 28 33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피해 현황은 다음과 같다.

군별 참전 병력 사망자(KIA) 부상자(WIA) 실종자
325,517 5,099 11,232 4
육군 288,656 3,859 8,211 4
해군(해병) 36,246 1,124 3,021 -
공군 615 - - -

 

육군은 23.9명당 1명꼴로 전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해군(해병)측은 8명당 1명 측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고엽제에 의한 피해자수도 2007년을 기준으로 159,132명이나 된다.

 

 

파급 효과

 

베트남 전쟁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정부로부터 한국군의 현대화 장비를 지원받았고, 해외전투수당과 원조수당 등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파월 한국군의 일체의 경비를 미국이 부담한 상태에서 해외전투수당 및 추가지원금은 대한민국의 경제력 육성에 활용되었다.

 

이후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지원받은 해외전투수당 및 지원금으로 박정희 정권은 경공업 육성에 투자, 수출 장려정책을 폈고, 파병수당의 일부로는 국토개발사업에 충당하였다. 당시 국토개발사업에 투입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지원금이었다. 그 밖에 미국으로부터 경제개발 차관을 제공받기도 했다.

 

 

기타

1964년에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는 맹호, 청룡부대를 파병하였고 1966년에는 백마부대의 파견으로 연인원 5만 명, 최대 30만 명을 파병하였다. 이 중 5,099명의 사망자(KIA)가 발생했으며, 11,2320명의 사상자(WIA)와 4명의 실종자(MIA) 그리고 참전 군인 중 이후 159,132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용사가 발생하였다.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실제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그 대가로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참전 군인 중 이후 2만여 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용사가 많다.

 

파병기간 중 베트콩 게릴라의 한국군 부대 습격과 함께 미군의 미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남한)군에 의한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빈호아 학살 사건(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 있었다.

 

 

국교 회복

1975년 베트남에서 대사관을 철수한 이래, 1992년 4월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때 양국 연락대표부 설치를 합의하였고, 12월에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양국의 불행에 대해 사과를 하였고, 2001년에는 양국의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였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을 하고, 호찌민 묘소에 헌화를 하고 묵념을 했다.

 

2009년 10월 20일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국가유공자법 개정 과정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한국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에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자부하고 있던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일단락 지었다. 11월 2일 라디오 연설에서 "베트남과는 러시아, 중국과 같은 최고 수준의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베트남 주석과는 형-동생하는 관계를 맺었다"고 소개를 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외교적 과오와 실책을 공개하지도 않고 자화자찬했다고 비난하였다.

 

 

 

평가

 

성과

집요한 참전 의사를 밝히던 박정희 정부는 1964년 5월 9일 미국의 정식 파병 요청에 따라 1964년 9월 11일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파병하였다.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한미외교의 강화와 일제 강점기6·25 전쟁 이후 기근과 고아의 나라로 인식되던 대한민국이 타국의 전쟁에 대규모 파병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등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나라로 인식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월남 참전의 경제적인 기여로는 미국으로부터 파병 대가로 받은 경제적 비용 획득이 있다. 2005년 8월 26일 브라운 각서와 함께 공개된 외교통상부의 베트남전쟁 관련 자료에서 미국에서 지급한 연도별 해외근무 수당지급 총액과 국내 송금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위 $100)

 

 

년도 수당지급액 본국송금액(%) 현지소비액(%)
총계 2,355,684 1,951,108(82.8%) 408,390(17.3%)
1965년 30,591 17,973(58.8%) 408,390(41.2%)
1966년 197,576 148,822(75.3%) 48,754(24.7%)
1967년 339,068 276,892(81.7%) 62,176(18.3%)
1968년 365,995 294,098(80.4%) 71,897(19.6%)
1969년 369,827 316,258(85.5%) 53,569(14.5%)
1970년 361,286 293,729(81.3%) 67,557(18.7%)
1971년 356,680 302,946(84.9%) 53,734(15.1%)
1972년 295,192 257,107(87.0%) 38,085(13.0%)
1973년 39,469 43,283(109.6%) -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되었다.

 

또한 월남 참전으로 M1 개런드등 재래식 병기와 군용장비에서 M16 소총 등으로 병기와 군용장비의 근대화와 개량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부정적 시각

 

 

정계

 

 

 

야당 지도자 윤보선

 

 

야당인사인 윤보선, 장준하, 김대중, 김준연 등은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들은 박정희가 젊은 장정들의 피를 팔아서 정권연장에 활용하려 든다며 비난한 것이다.

 

베트남 파병 당시 야당인 신한당신민당의 지도자였던 윤보선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과 비판은 당시 미국과 한국의 국제적인 관계를 단순하게 보고 판단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역사는 항상 세로운 모험과 시도로부터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미국의 미군 철수 압력에 박정희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에 따른 국익은 엄청났다. 결과론적이지만 월남전으로 인한 한국의 경제발전 밑거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우너남파병을 결정하지 않았더리면 지금쯤 북에 의해 적회되었거나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다가 아직도 동남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경제후진국 수준에 멀물고 있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야당 의원 김대중은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군의 파병이 안 되면 주한미군을 빼내어 베트남으로 보내겠다는 반협박적인 상황에서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대중은 당내 의견 수렴과 국회대정부 정책질의를 통해 예비역ㆍ퇴역군인 가운데 지원자를 모집해서 의용군을 파견하자고 제안했다.

 

전두환은 이 전쟁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여 세운 무훈으로 군대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절대화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학계

 

 

 

김대중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사과를 하였다.

 

 

학계에서는 베트남 참전을 베트남민족 해방 운동을 방해하였다며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인 한국전쟁도 같은 시각일 것이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시민사회단체 운동가인 강정구 등에 의해 베트남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사건의 책임자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였고, 2000년 한국 대통령 김대중은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고,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 단체에서는 그 이상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리도 있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편 전쟁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군인들이 현지에서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 낳은 2세들인 라이따이한(Lai大韓, Lai Daihan)과 대한민국군 일부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부녀강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양국 관계에 잠재적 문제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1999년 이래 한국의 언론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MBC 방송국에 난입하기도 했다.

 

 

문학 작품

 

전쟁의 일반적인 참혹함 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한반도의 역사적 유사성 때문에 참전했던 작가들에 의해 이 전쟁은 각종 문학, 영화, 만화의 소재가 되었다.

 

 

소설

  • 《무기의 그늘》, 황석영
  • 《하얀 전쟁》, 안정효
  • 《머나먼 쏭바강》, 박영한
  • 《인간의 새벽》, 박영한
  • 《황색인》, 이상문

 

영화 드라마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71년 이성구 감독
  • 《푸른 옷소매》, 1991, 김유민 감독
  • 하얀 전쟁》, 1992, 정지영 감독, 안정효 원작
  • 머나먼 쏭바강》, 1994, SBS TV 특집드라마
  • 알포인트》, 2004년, 공수창 감독
  • 님은 먼곳에》, 2008년, 이준익 감독

 

노래 / 뮤비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71년 김추자
  • 《아시나요》, 2000년, 조성모
  • 《님은 먼곳에》, 2008년, 신애

 

만화

  • 《저강은 알고 있다》, 이현세
  • 《황색탄환》, 김형배

 

뮤지컬

  • 《천국의 눈물(Tears Of Heaven)》2010년, 정상윤, 전동석, 김준수, 윤공주, 브래드 리틀, 이해리

 

 

 

 

참군인, 채명신 장군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전쟁은 더욱 그렇다.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 갈리아 정복 영웅 시이저, 몽고제국을 건설한 징키스칸,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임진왜란의 이순신, 세계 1,2차 대전의 수많은 영웅들, 한국전쟁의 영웅들, 월남전쟁의 영웅들이 그렇다. 물론 일부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웅도 있다. 이들 영웅들은 용맹과 전략, 희생과 전우애, 집념과 모범 같은 군인정신을 구비한 사람들이었다. 전쟁영웅 가운데 권력자로,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지 않고 끝까지 군인의 길만 걸은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참군인이다.

서울 국립현충원 사병묘지에 영면한 채명신 전 육군중장을 통해 전쟁영웅의 면면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1965~1969년 초대 주월(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그는 당연히 그에게 주어진 넓은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단지 3.3㎡의 사병묘역에 누웠다. 살아서 눈물지으며 그리워하곤 했던 사병 전우들 곁에 눕겠다는 고인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월남전 사령관으로 이름 석 자를 날린 그는 전쟁 이후에도 군인답게 처신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3성 장군 채명신은 그 전쟁에서 희생된 971명의 사병들과 더불어 영원한 오(伍)와 열(列)을 맞춰 마지막 길에서까지 군인의 표상을 보여줬다. 그의 유언을 보면 육군장 영결식장에서 들린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이란 조사가 결코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런 참군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해도 마지막 날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반도에도 통일을 향한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함면서 우리의 통일을 염원해본다.

 

지혜로운 지도자의 결단과 포용력, 진심어린 마음으로 북한을 끌어안고  아사자와 탈북자, 북한 인권을 지원하기 위한 대중, 러, 미, 일에 대한 유연하고 지혜로운 외교, 국제기구를 이용한 다각적인 대북정책,  제2,3,4의 개성공단을 추진함은 물론, 금강산, 백두산 등 관광산업 확대, 시베리아와 중국으로 연결되는 남북 철도부설, 상호군사력 감축 및  비무장지대 개발과 이용 등 북 체제를 유지시켜주면서 시간이 지나면 북한이 저절로 개방.개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통일 비용을 줄이고 남북이 공동으로 발전을 꾀함으로써 평화로운 한반도의 통일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의 역사에서 후삼국시대 강력한 군사력으로 왕건을 죽음 직전의 궁지까지 몰았던 견훤이 내부분열로 하루 아침에  후백제가 멸망의 길로 간 것이나 특유의 포용력과 친화력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을 그려본다.  

 

1000여 년전 고려 무신정권 80년, 몽고지배 100년을 거치면서 고려 시대 우리 선조들은 당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려 했을 것이다. 호족, 문신귀족, 무인시대, 권문세가로 이어지는 고려의 지배층 사회는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사회구조를 이루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시대상황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1000여 년 후 우리들의 후대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역사를 보면 좁은 한반도에 유신사대주의에 빠진 선비들이 500년 간 지배하던  조선이 외척의 준동과 왕실의 무능, 부패로 무너지고 유교가 지배하던 양반.선비 사회는 오늘날 가진자 1%가 99%의 부를 가지고 지금의 사회를 지배하는 양극화 사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분제를 벗어날 수 없는 봉건사회였으며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썩어들어간 조선이 망하자 일제가 36년 동안 지배하였고 일제가 패망하자 미.소에 의해 남북이 분단된 체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강대국의 대리전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제 겨우 66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다. 고려 시대 60년 최씨 무인집권 시기에 불과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며 북한 정권이 몇 년을 더 지탱하던지 역사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궁예의 마진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들이 받고 있는 고통이 망이.망소이가 받던 고려 민초들이 받고 있던 고통에 비교하기나 할까? 

 

부패하고 무능하고 지혜롭지 못한 지도자,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 사회 곳곳에 만연한 비리와 부패, 국가의 위기에 먼저 앞장서지 못하는 썩을대로 썩은 지도층을 만나면 나라가 망하거나 전쟁이 발생하면 우리들 선조들이 피땀흘려 이룩한 오늘의 풍요로운 삶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지도자의 탐욕, 민족통일이라는 구호아래, 정의라는 미명하에, 애국이라는 미사여구에 잘못 벌어질 전쟁은 우리들의 삶과 목숨까지 잃게 만들지도 모름니다.

 

새로운 사고와 혁신으로 급변하는 동북아 국제정세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다변외교와 지혜로운 정책 구상으로 이 난국을 돌파하지 못하면 우리는 강대국의 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꼴이 될지도 모르고 북한의 불장난에 수도권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에도 사상과 이념, 자신만의 생각이 옳다는 식의 사고, 갈등을 조장하며 겉으로는 정의를 앞세운  종교인,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는 자들이 정치.사회 지도층에 머물고 있는 한 이 나라는 조선말 망국의 길을 다시 걸을 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우리 모두가 한 발 물러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의 욕심을 내려 놓자. 앞으로 거세게 몰려올 쓰나미를 생각하자. 보트피플이 되어 현해탄을 떠도는 신세가 되는 날 조국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31회 : 군인의 길 - 채명신 장군 1부  
방송일: 20110904  


군인의 길

 

채명신 장군

 

1부

 


베트남의 밀림을 헤치고 다니던

영원한 야전 사나이, 채명신

6.25전쟁 중대장에서 주월 총사령관까지...


굳은 신념과 의지로 지켜온 참 군인의 길

채명신장군 3회 연속 인터뷰를 통해

현대사 속 그의 발자국을 되짚어 본다



◆ 채명신, 김일성을 만난 사연

 

“처음 본 김일성은 얼굴이 둥근 편인데 미남은 아니지만

호남형의.. 웃을 적에 덧니가 굉장히 많이 보였어요”

“‘동무, 나하고 평양 가서 같이 일 합시다’ 하더라고”


 

   독립운동가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찬 어머니 사이에서 지조와 신앙을 함께 배우며 자라난 채명신. 그는 조국이 해방되면서 용강 덕해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일성의 오른팔, 김책과 우연한 계기로 인연을 맺는다. 군 간부 양성을 위해 세워진 평양학원. 그 곳의 초대 원장이었던 김책은 학원 홍보를 담당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원의 개원 직전 채명신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회주의 용어에 해박한데다 교사였던 채명신은 공산당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적격이었고, 이에 김책은 그의 중용을 결심했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 평양학원 개원식날. 공산당 간부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김책은 그에게 누군가를 소개하는데.. 바로 김일성이었다. 박식하고 거침 없는 성격의 채명신을 보며 김일성은 깊은 인상을 받았고 주저 없이 자신의 동지가 되어 함께 평양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인생의 갈림길에 선 채명신의 결정은? 그가 소개하는 김일성과의 만남에 얽힌 이야기를 공개한다.


◆ 1948년 4월 제주도에 가다

 

“졸업하고 사령장을 보니까 내가 제주도래요.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너희들의 신임 소대장 채명신이다.’ 시선이 집중되는데 호기심이 아닌 증오와 살기가 찬”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남한. 채명신의 기대와는 달리 거리는 온통 이념 대립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좌, 우 편가르기에 바빴다. 채명신은 목사가 되겠다는 애초의 꿈 대신 1948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지원한다. 강도 높은 훈련에 식량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400명 중 26번째 군번을 받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다. 그러나 졸업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 그에게 첫 발령지가 제주도로 결정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평소 동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제주도 보내버린다’는 말이 반 협박처럼 쓰일 만큼 제주도는 그들 사이에서 기피의 대상이었다. 채명신은 1948년 동기 8명과 함께 낯선 섬 제주도에 상륙한다. 4.3 사태가 일어난지 고작 1주일 만이었다. 이미 부대 내에는 남로당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방의 적의로 가득 찬 눈길들이 그를 따라다녔고 심지어 직속상사마저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렸다. 궁지에 몰린 채명신은 마음을 다해 소대원들을 대한다. 아픈 병사에게는 죽을 먹였으며 병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의 노력은 이념을 넘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일촉즉발의 순간에서 그를 구해내는데.. 9연대 초짜 소대장 채명신, 목욕을 하는 사이에도 총알이 날아들고 미인계까지 동원되어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첫 부임지에서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가 본다. 



◆ 민족의 분열. 한국전쟁 전후
 

“어머니하고 3주일을 같이 있었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


   채명신은 1949년 11월 남파된 북한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 태백산에 투입된다. 당시 강원도와 경북 산악지대엔 남파된 유격대와 지역 빨치산이 합세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이 매일 펼쳐지는 상황이었다. 그 곳에서 채명신은 1947년 월남 이후 2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한다. 어렵게 아들을 찾은 어머니는 그의 부대원들까지 세심하게 돌보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다. 채명신은 그의 1개 중대 병력으로 삼척에 상륙한 정규군 3000명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승산 없는 싸움. 그는 후퇴를 거듭한다. 그리고 그 해 12월,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적지에 고립된 연대장을 위해 채명신은 특공대를 이끌고 나섰다. 어렵게 그를 구했으나 이 때 채명신은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른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 고기를 먹고 싶다는 연대장을 위해 민가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적에게 둘러쌓인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특공대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었지만 연대장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채명신도 죽음의 문턱에 선다. 또 다시 채명신과 부하 두 명은 민가에서 인민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아찔한 순간, 그를 구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듣는다.

 

 

  32회 : 군인의 길 - 채명신 장군 2부  
방송일: 20110911  

 

군인의 길

 

채명신 장군

 

2부

 


베트남의 밀림을 헤치고 다니던

영원한 야전 사나이, 채명신

6.25전쟁 중대장에서 주월 총사령관까지...


굳은 신념과 의지로 지켜온 참 군인의 길

채명신장군 3회 연속 인터뷰를 통해

현대사 속 그의 발자국을 되짚어 본다



 


◆ 한국 최초의 유격 특수부대, 백골병단

 

“군인다운 군인이었어. 적이지만 아주 훌륭한 적이야”

“내가 적의 시체에 경례한 건 그게 처음이에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1951년 1.4후퇴 무렵. 군은 중공의 개입으로 급박해진 전세에 맞춰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선발해 기초적인 제식훈련도 거치지 않고 전선으로 내보낼 준비를 했다. 채명신은 이 오합지졸의 연대장을 자처하고 나선다. 지도를 볼 줄 모르는 간부들과 총을 제대로 쏘지도 못하는 사병들. 그의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지만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11연대와 함께 죽을 각오를 다진다. 상부로부터는 계속해서 출동 압력이 가해지는 상황.. 결국 채명신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결사 11연대를 이끌고 출정길에 올랐다.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향하는 길, 그의 부대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적인 동상과 싸웠다. 그렇게 11연대가 악전고투하는 동안 차례로 12,13연대도 11연대에 합류한다. 채명신은 졸지에 생긴 이 대부대에 ‘백골병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던 중, 적의 후방에서 반란 인민군 행세를 하며 매복하던 그들에게 기밀이 들어온다. 백골병단이 머무르던 인제 근처 군량밭 마을에 공산당의 거물급 간부가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 길원팔을 생포하라! 김일성의 오른팔 길원팔을 잡기 위해 펼쳐진 치밀한 작전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채명신이 적에게 경례를 바친 사연 등이 백골부대 창설 60주년을 맞아 함께 공개된다.

 


◆ 논산에서 맞은 위기, 밀가루 사건

“논산의 별명이 돈산이야, 돈산. 모든 부정행위가 거기서 진행되는 겁니다”

“‘빽 있는 자식들 다 빠지고 나면 누가 여기서 훈련받아? 안 돼! 한 명도 안 돼!’”


   1955년 10월, 채명신은 육군본부 작전기획과장을 거쳐 논산훈련소로 부임한다. 당시 논산은 ‘돈산’이라고 불릴 만큼 온갖 부정부패의 현장이었다. ‘돈 있고 빽 있는’ 집 자식들이 먼저 군적에서 빼돌려 지는 것은 물론이고, 훈련병에게 폭리를 취하기 위해 식사 대신 지급되는 빵을 가지고도 비리가 행해지고 있었다. 채명신은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다. 먼저 유령 훈련병을 잡아 차례로 재입소 시켰다. 그를 향해 날아드는 온갖 회유와 협박... 하지만 채명신은 굴하지 않았다. 그렇게 200여명의 병적을 새로 정리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을 없앴다. 또한 군용으로 지급받은 밀가루가 있어도 가공비가 없어 굶주려야만 하는 병사들을 위해 약간의 편법을 사용했는데, 훗날 그것은 채명신의 발목을 잡는 화근이 되고.. 한순간에 구속 위기에 처한 논산훈련소 제2참모장 채명신, 그를 위기로 몰아넣은 ‘밀가루 사건’의 전말을 따라가 본다.


 


◆ 박정희와의 인연과 5.16

“조창대 중령이 박정희 장군의 밀서를 가지고 왔더라고. 그 밤중에”

“‘뭐야! 내 명령 없이 단 한명이라도 혁명 대열에 가담한다면 전부 총살하겠어!!’”


   백골부대와 함께 크고 작은 승전을 이끌어낸 채명신은 설악산 능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강릉 9사단에 인계된다. 당시 9사단의 참모장은 채명신의 육사 선배였던 박정희 대령이었다. 그는 지친 채명신을 불고기집으로 데려가 적군의 핏자국이 얼룩진 후배의 점퍼를 자신의 고급 점퍼와 바꾸며 다독였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진다. 시간이 흘러 1953년 남과 북이 휴전에 조인한 후 한국 사회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무능력한 장면 정부를 향한 불만이 고조되던 1961년 5월의 어느 밤, 채명신은 육사 후배 조창대 중령으로부터 은밀한 편지를 건네 받는다. 하루 앞으로 닥친 ‘거사’를 알리는 박정희의 밀서였다. 이미 CIC(방첩대)에 그들의 계획이 누설돼 자칫하면 모두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 채명신은 서둘러 이한림 1군사령관과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결국 1961년 5월 18일 0시 채명신이 이끄는 5사단은 성공적으로 서울에 입성하는데.. 촌각을 다투는 ‘그 날’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다.

 

 

  33회 : 군인의 길 - 채명신 장군 3부  
방송일: 20110918  

 

군인의 길

 

채명신 장군

 

3부

 


베트남의 밀림을 헤치고 다니던

영원한 야전 사나이, 채명신

6.25전쟁 중대장에서 주월 총사령관까지...


굳은 신념과 의지로 지켜온 참 군인의 길

채명신장군 3회 연속 인터뷰를 통해

현대사 속 그의 발자국을 되짚어 본다



 


◆ 베트남 밀림의 사령관 (1)

 

“박정희 대통령이 ‘채명신, 당신이 가라’.. 좀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웠죠”

 

 

    1965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채명신을 청와대로 호출한다. 월남전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채명신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명분 없는 전쟁에 참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한국전쟁을 통해 게릴라전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월남전에 국군이 참여한다면 호치민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와 울창한 밀림과 같은 천혜의 요새를 가진 베트콩을 상대로 험난한 싸움을 치를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 파병을 거부할 경우 한국에 주둔하던 미 2·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킬 태세였다. 여전히 북한과 비교해 군사적 열세였던 한국에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곧 국가적인 위기를 의미했다. 그리고 결국 그 해 8월, 채명신은 파월부대의 총사령관을 맡아달라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는다. 진퇴양난의 상황, 그의 결정은 무엇이었을까. 채명신이 파병 직전까지 숨가쁘게 돌아간 국내 상황과 당시의 심경을 술회했다.

 


◆ 베트남 밀림의 사령관 (2)

“우리 이제 월남 불 속에 화약을 짊어지고 기어들어간다. ”

“‘어차피 너희 중 죽을 놈은 월남에 안 가도 여기 국내에서 죽는 거야. 어떠냐. 날 따라 올래?”


   어렵게 파병을 결정하자 이번엔 미군 측에서는 2만의 국군 병력을 미군 통제 하에 둘 것을 강요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명분이 타당하지 못한 것을 들어 국군의 작전권을 독립적으로 확보해야만 참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 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 결국 그는 월남에 건너가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과 라슨 장군을 만나 담판을 짓는다. 그에게 주어진 20분의 시간, 고집 센 미군들을 설득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채명신이 당시의 비화를 공개한다. 한국군은 1964년 9월 첫 파병 이후 1972년 3월 국군사령부가 최종 철수할 때까지 월남에서 신화적인 무공을 세우며 ‘따이한’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런 국군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는데.. 베트남에서 우리 군을 가장 괴롭혔던 ‘보이지 않는 적’, 무좀을 퇴치하라! 채명신이 직접 나서 지휘한 무좀 퇴치 작전을 비롯해 우리 장병들이 고국에 TV 한 대를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애틋한 사연들이 함께 공개된다.


 


◆ 월남전 비사와 1972년 예편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


   채명신의 삶에 이정표가 되었던 월남전. 그는 1969년 5월 베트남에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한다. 그리고 같은 달 바로 대구 2군사령부로 발령을 받았다. 그 곳에서 채명신은 시찰을 나온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에서 4년 만에 재회하는데.. 박정희는 그에게 집권연장의 뜻을 내비쳤다. 신의가 정치인의 생명이라고 믿었던 채명신은 강하게 반대한다. 두 번의 독대, 분노에 찬 대통령 앞에서도 채명신은 충언을 서슴치 않았다. 결국 채명신은 1972년 5월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중장으로 예편한다. 24년간 지켜온 연병장을 떠나는 순간 장군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는데.. 갑작스럽게 닥친 예편, 그 날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