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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3 : 일제강점기 48 (독립군의 전열 재정비)

 

 

 

한국의 역사 1,003 : 일제강점기 48 (독립군의 전열 재정비)

 

 

 

 

 

           

 

 

독립군의 전열 재정비

 

통의부로 뭉쳤다. 그러나 청사진이 달랐다

 

독립운동의 최종 목적은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자력으로 광복을 되찿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에서는 각종 무장 항일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각 단체의 통합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독립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건설할 나라에 대한 그림이 서로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고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전열 재정비에 나섰다.

 

당시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남만주)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망국 직후 집단 망명해 '경학사(부민단.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를 만든 '서로군정서' 세력으로 광복 후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공화주의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의병전쟁 끝에 만주로 망명한 유림 계열의 '대한독립군단'으로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오동진 등이 조직한 '광복군사령부(광복군총영)'와 서로군정서 소장파가 결성한 '광한단' 등도 있었는데, 이들도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각 단체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광복군총영 경리부장인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이 1921년 말 국내로 들어가 신민회 간부였던 양기탁을 안내해 건너오면서 통합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양기탁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1917년 11월 윤치호.안태국.이승훈 등과 4년 7개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양기탁은 망국 직후 안동의 이상룡이 만주로 망명하는 도중 서울에서 만났을 정도로 집단 망명에 깊숙히 개입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일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도위원장에 양기탁을 선임한 것도 통합운동에서 그의 비중을 잘 말해준다.

 

통일위원회는 통합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선전공작대를 두고 대장에 진덕명을 선임했는데, 그는 유인석의 문인으로 대한독립단을 이끌던 전덕원의 종제였다. 그 결과 1922년 봄, 길림성 환인현에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광복군총영, 광한단, 평안북도독판부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남만통일회'를 개최하고 통합 행정.군사조직인 '대한통군부'를 결성했다.

 

통군부는 총장에 대한독립단의 채상덕을 선임하고 비서장에는 서로군정서 고할신, 사령관에는 서로군정서 김창환을 선임했다. 그 외에 민사부, 교무부, 실업부 등의 행정조직도 갖춘 사실상의 정부조직이었다.

 

<독립신문>은 1922년 6월 3일 통군부 중앙직원회의에서 통군부를 대개방하고 다른 기관과 더불어 무조건 통일하되 일체의 공적인 결정에 복종하자고 결의하고 연통제 측과 군정서 측에 위원을 파견해 통합을 권유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에서 8단 9회, 17개 단체들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대한통의부(약칭 통의부)'를 결성하게 된다. 각 단체의 명의를 모두 취소하고 통의부로 단일화하는 한편 군대의 명칭을 '의용군'으로 결정했다. 통의부는 총장에 서로군정서의 김동삼, 부총장에 대한독립단의 채상덕을 선출해 계파를 안배했다.

 

그러나 군사부장 양규열, 참모부장 이천민, 사령장 김창환 등 군부 3인은 모두 서로군정서 출신이었다. 민사부장 이웅해와 재무부장 이병기는 대한독립단 출신이지만 전체적으로 공화주의를 추구하는 서로군정서의 우위가 관철된 인선이었다. 이는 대한독립단을 의도적으로 소외시켰다기보다 남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실제 지형을 반영한 인선이었다. 이무렵 통의부 의용군에 가담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정이형의 <나의망명추억기>에는 통의부와 의용군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의용군 사령부는 일제가 정보망을 총동원해 소재를 알려고 하는 곳이므로 기밀 유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보안에 특히 철저한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의용군을 찿아가 가담한 정이형은 훗날 정의부 중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는 독립군 맹장으로 성장했다. 통의부 의용군은 사령관 김창환, 제1대대장 강남도 휘하에 5개 중대와 유격중대, 헌병대를 두었다. 각 중대는 3개 소대씩 두었는데, 1중대장 백관윤, 2중대장 최석순, 3중대장 최시흥, 4중대장 홍기주, 5중대장 김명봉이었다.의용군 지휘관은 중국군과 비슷한 다갈색 군복에 중국군과 비슷하게 무장했다. 각 중대는 또 관할구역이 있었는데, 1중대는 800~900여 명 규모로 서로군정서 출신들로 집안현과 통화현 일대, 2중대는 600~700여 명 규모로 대한독립단 출신으로 구성되어 환인현 이구 일대, 3중대는 500~600여 명이 천마산대 출신들로 환인현 북전자 일대, 4중대는 500여 명으로 독립단 출신이며 집안현 노아령 일대, 5중대는 500여 명으로 의병 출신들로 구성되어 홍경현 왕창문 일대였다. 따라서 의용군의 전성기 때 총병력 규모는 3,000~3,500여 명이었다.

 

여기에는 예비병력도 포함된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 동북항일연군이 수백 명의 병력이면 사단이나 군단으로 호칭했던 것과 비교하면 소박한 명칭이엇다.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 1923년에만 만주 독립군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한 횟수는 모두 735회에 달한다.

 

1923년 6월 28일 의용군 제2중대장 신도성 등은 초산군 서면 연담리에서 일본 경찰대 10여 명과 교전 끝에 3명을 사살하고 정경순 등은 초산군 서면 무학동과 중은촌에서 다시 전투를 벌여 4명을 사살했는데, 국경 지역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이런 총격전에 대해 <독립신문>은 "우리 무장대원 30여 명은 9월 21일 평북 희천군 북면 명문동에 도착해 먼저 전신.전화선을 끊고 적경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자 적경이 곧 응전했고 적경 1명이 즉사했다. 아군이 여러 곳을 방화하며 총격전을 벌여 적 1명을 추가로 사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아군은 무사했다. 그 후 아군이 다시 화경면을 습격한다는 설이 낭자해 부근 일대의 인심이 흉흉하고 우편송달이 못 되었다"고 전한다. 

 

국경 부근은 매일같이 출동하는 통의부 의용군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통의부 내부의 이념 갈등이 불거졌다. 복벽주의자들의 불만이 쌓여가면서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 계열의 대한독립단 군인 20여 명이 관전현 이종성 집을 습격해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사살하고 양기탁과 통의부 법무부장 현정경, 비서과장 고할신 등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신문>은 이를 '서간도 사건'으로 보도하면서 "통의부가 국체를 민국(공화국)으로 규정하고 대부분의 요직도 신진인사들에게 배정된 데 배한 불만이 표출된 사건"으로 해석했다. 두 당사자인 양기탁과 전덕원이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조문단과 진상조사단을 파견했지만 그해 12월 다시 쌍방 간에 총격전이 발생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전덕원을 비롯한 채상덕.김평식.오석영.박대호 등의 복벽주의자들은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에서 통의부를 탈퇴를 선언하고 '의군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1924년 8월에는 통의부 내의 파쟁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참의부'를 건설해 임시정부 산하라고 선언했다. 그해 12월 나머지 남은 세력이 '정의부'를 건설되면서 한때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를 대표했던 통의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