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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4 : 일제강점기 49 (독립군, 내우외환으로 전력 약화)

 

 

 

한국의 역사 1,004 : 일제강점기 49 (독립군, 내우외환으로 전력 약화)

 

 

 

 

 

           

 

 

독립군, 내우외환으로 전력 약화

 

국내 진공작전을 주도한 참의부, 고마령참변으로 주요 간부를 잃다

 

 

상해가 외교독립론의 무대라면 만주는 무장투쟁의 무대로서 독립전쟁의 최전선이었다. 임시정부는 정부기구를 상해에 두는 대신 군정부는 만주에 두어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을 병행하려 했다. 압록강 대안에 있던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무장군대였다.

 

1924년 5월 19일 새벽.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을 필두로 이의준.이두성.전창식.김창균.현성묵 등 13명의 참의부 소속 독립군들은 봉천성 집안현 소량곡 팔합목 압록강 대안에 매복했다. 건너편이 평북 강계군 고산면 남산동 마시탄으로 만주 독립군들이 국내 진공작전 때 이용하던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

 

이들이 매복하면서 기다리는 인물은 다름 아닌 가이토 마코토 총독이었다. 참의부 총사령관인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윤의 지시로 사이토를 저격하기 위해 잠복 중이었다. 사이토는 다음 달 일본 국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식민통치가 성공적이었다고 강조하기 위해 국경 지대인 관북(함경도).관서(평안도) 순시를 강행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9시쯤 전 숙박지인 문흥을 출발해 벽동으로 향하던 총독 일행의 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시 30분쯤이었다. 유희마루와 아스카마루 두척이었는데, 유희마루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소대장 장창훈의 사격 지시를 신호로 13명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갑자기 총탄이 쏟아지자 사이토는 물론 평북경칠부의 모리니시 경부와 오카다 순사부장이 이끄는 경비경찰도 크게 당황했다. 대응사격에 나섰지만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마구 쏘는 응사일 뿐이었다.

 

두 척의 배는 달아나기 시작했고 참의부원들은 계속 사격을 가했다. 일제는 총독이 위험지대를 벗ㄱ어나자 "접전시간은 약 5분이었고 독립군은 모젤 권총 또는 장총으로 약 40~50발을 발사한 반면 우리 측은 모젤 권총 44발, 기총 28발로 모두 72발을 발사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축소 발표였다. 총독 순시선이 독립군의 저격에 쫓겨 도주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게다가 총독의 국경 시찰에 대비해 국내는 물론 입록강 대안인 중국 임강현과 집안현 등지까지 정사복 경찰을 삼엄하게 배치한 가운데 발생한 저격 사건이었다.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 토벌에 나선 것과 대조적으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자 머리기사는 '적괴 사이토를 습격'이란 제목이었다. 이때 '우리 의용군 제중대의 용투'라는 중제목을 뽑은 이유는 참의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였기 때문이다.

 

대한통의부 산하 의용군들은 통의부 지도부의 분열과 대립에 크게 실망해 통의부에서 갈라진 의병 계열의 의군부는 물론 통의부 지도부도 불신임하기로 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상부 기관으로 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런 방침에 동의한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는 1923년 8월 의용군 제1중대장 백관운과 노능식 등 5명의 대표를 상해로 파견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에 그 간의 경위를 진술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과거 만주에 있던 임시정부 산하의 전 광복군 사령부의 맥을 잇는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남만군단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임시정부에서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임시정부는 전에 고아복군사령부 설립을 주도했던 독립신문사 사장 김승학과 이유필을 만주에 파견해 이들을 도왔다. 드디어 1924년 4월 백광운을 비롯한 남만주의 군인 대표 78명 명의의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재중국 특명전권공사 요시자와 겐기치가 외무대신 마쓰이 게이지로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이 선언서의 공양 3장은 "1.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임을 적극 인정한다 2. 우리는 대동통일의 선봉이 된 것을 내외에 알리고 임시정부의 기치하에 통일이 되도록 힘쓴다 3. 우리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내외 무장 각 단체의 가입을 권유하여 가입시킨다"라는 내용이었다.

 

임시정부가 직접 조직한 것은 아니지만 임시정부는 만주에 직할 독립군 부대를 갖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당초 국제도시인 상해에 정부를 두는 대신 군사부는 만주나 러시아령에 두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드디어 1924년 5월. 대한통의부 의용군 1.2.3중대와 유격대.독립소대 대표들은 통의부 탈퇴를 선언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의용군 5중대도 6월에 동참을 선언함으로써 4중대를 제외한 모든 중대가 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약칭 참의부가 탄생한 것이다.

 

참의부는 무장투쟁을 우선했으므로 선임 중대장이 참의장을 겸임하고 행정조직으로는 군자금을 징수하는 민사부 정도만 설치했다. 국내 진공작전의 3분지 2 이상을 참의부에서 수행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수시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고 그때마다 국경지방은 전쟁터로 변했다.

 

그러나 참의부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통의부 잔존 세력은 참의부에 시종 적대적 태도를 취하다가 급기야 1924년 10월 18일 통의부 제6중대장 문학빈 일파가 참의장 백광운을 살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돼지족방을 뼈째 씹어서 먹는 장사'로 소문난 장사로 일제를 공포에 빠뜨렸던 그가 일제가 아닌 내부의 공격으로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일제는 참의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24년 7월에는 평북경찰부의 한인 경찰 김덕기가 홍인화를 매수하여 사이토 저격을 주도한 장창헌을 유인 살해했다. 홍인화는 그 대가로 순사로 특채되었으나 분노한 군중에 의해 주막거리에서 맞아 죽었다.

 

그러다가 1925년 3월 16일에는 참의부 최대의 비극인 고마령 참변이 발생했다. 참의부는 비밀 통신망을 통해 각지의 독립군 간부들에게 집안현 고마령 깊은 산 속의 비밀 아지트로 모이라고 통지했다. 참의장 최석순과 소대장 최항신.정창희.전덕명.안정길.김용무 등이 모여 국내 진공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으로 독립운동의 새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의 이 회의는 5~6일간 계속되었는데 회의 도중 일경에 정보가 들어갔다. 밀정 홍재윤의 밀고라는 설과 참의부 간부의 밀고라는 설이 각각 제시되고 있다.

 

3월 15일 밤. 평북 초산경찰서 산하 연담 주재소에 미즈노 경부보와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이 이끄는 6개 분대, 65명의 무장경찰이 모여 압록강을 건넜고 초산주둔군 120명이 지원했다. 밀정 이죽파를 향도로 삼은 이들은 참의부 통신원에게 발견될까 두려워 한밤중에 출발했다.

 

16일 새벽. 압록강에서 60리 떨어진 고마령에 도착한 일경 무리는 참의부 비밀 아지트를 포위하고 일제 사격을 가했다. 참의장 최석순과 소대장 최항신 등은 포위망을 뚫으려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전사하고 모두 4시간여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전창희.전덕명.안정길.김용무.김학송.반창병.최길성.백명호.장경환 등 29명이 전사했다. 고마령 전투는 참의부의 비극이자 만주 항일무장투쟁 전체의 비극이었다. 이렇게 주요 군사 간부 대부분이 전사한 참의부는 조직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6월과 7월 만주군벌 장작림 휘하의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 사이에 이른바 '삼시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협정에 따라 한인들의 무장이 강제로 해제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인계되었다.

 

잇따른 내우외환으로 참의부의 국내 진공작전은 1925년 이후 급감하게 된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24년에는 560여 건에 달하던 독립군의 국내 진공 횟수가 1925년 270여 건으로 반감했다가 1926년에는 69건으로 급감하게 된다. 그러나 참의부의 국내 진공작전은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18일자는 참의부 제3중대 별동대 6명이 평북에 진입하자 15개 경찰서가 총동원되어 3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 나머지 3명은 500여 명의 일경에게 포위되어 굶주린 채 8일간 항거하다가 끝내 체포되었다. 내우외환으로 전력이 약화된 참의부는 난국 타개를 위해 정의부.신민부 및 다른 군정부들과 통합에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