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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01 : 일제강점기 46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한국의 역사 1,001 : 일제강점기 46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봉오동, 청산리전투

 

'무적 황군' 신화 깬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

 

1910년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독립전쟁론의 씨가 뿌려졌다. 1919년부터 독립군은 압록.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했다. 일제는 만주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으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드디어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가 백두산 산록에서 벌어졌다.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한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1개 소대를 초토화했다. 일제는 즉각 육사 23기 출신의 아라요시 지로 중위에게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를 보내 뒤쫓게 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중대를 격멸시켰다. 아라요시는 잔존 병력을 끌고 급히 도주했다.

 

함북 종성군 나남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제19사단은 즉각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넜다. 19시단 보병 73연대 등에서 차출한 정예 부대였다.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는 "봉오동 방면의 적을추격해 일거에 적 근거지를 소탕한다"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갔다. 최진동과 함께 대한불로독군부를 이끌고 있던 홍범도는 주민들을 산중으로 대피시키고 각 중대를 산 위 요지에 매복시켰다. 홍범도도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면 북단에 매복했다. 군무국장 이원은 물자 보급과 만약에 대비해 퇴로를 확보했다. 홍범도는 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에게 일본군 유인을 맡겼는데 전의가 충천해 계획보다 더 큰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월강추격대대는 이화일 부대의 공격을 유인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봉오동 안까지 쫓아 들어왔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 장군은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가 2중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 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독립군을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비슷하게 얕보던 일제는 경악했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는 봉오동 패전 직후 육군대신에게 "대안 불령선인단......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 조직을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또한 '계총영사대리 제166호 전보'는 "금회의 추격이 도리어 나쁜 결과를 잉태했다"고 말했으며, '조선군사령관 제45호 전보'는 "재전투 준비를 신속히 행하고 있는 것 같고 장정들이 속속 독립군에 들어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일제는 독립군이 대거 도강해 한반도 내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그러나 대병력이 도강하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 중국 마적 두목 장강호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두만강 건너편 훈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펀찬한 <간도출병사>는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쯤 400여 명의 마적 떼가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40여 명을 살해하고 일본 영사관 분관과 그 소속 관사를 방화하고 일본인 1인과 수십 명의 한인.중국인을 납치해 퇴거했다"고 전한다.

 

일본은 미리 대기시켜놓은 대군을 즉각 투입햇는데, 조선군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포조군 14사단 4,000여 명, 11사단.19사단.20사단 병력을 포함하여, 그리고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각 1,000여 명등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대병력이었다.

 

일본군의 대불령선인 작전에 관한 훈령은 "해외로부터 무력 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에 대해서는 이를 섬멸한다"라고 해 도강 목적이 만주의 독립군 섬멸임을 분명히 적시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심양의 만주 군벌 장작립에게 여러 차례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색출하자"고 제의했다. 장작림은 마지 못해 우에다와 사카모토가 주도하는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했지만 길림성장 서정림이 '불령선인이라 하는 자는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는 등 내부 반발도 심했다. 봉오동전투 직후인 1920년 7월 16일 조선군 참모장 오노 등은 다시 심양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에 중국 보병단장 맹부덕은 독립군과 비빌협상을 벌여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 복장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진하지 않는다. 중국군은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를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 등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의 기지를 버리고 함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일시 백두산 지방에 들어가 있다가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 조선 땅에 들어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한 달 걸려 9월 20일 쯤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도착했다. 안무가 이끄는 군사들도 9월 말쯤 이도구 방면에 도착했다.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백두산으로 향했다. 이 부대도 다른 독립군처럼 중국과의 약속 때문에 야음을 틈타 주로 산길로 이동해 한 달 만에 450리 길을 걸어 10월 12~13일 쯤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다.

 

일본군과 독립군은 서로의 움직임을 정찰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란 판단 아래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여 결전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독립군들이 첯 번째 결전의 장소로 선탹한 곳이 청산리 백운평이었다. 상대는 도마사히코 소장이 이끄는 동지대였는데, 중화기로 무장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아마다 대좌의 연대는 야스카와 소좌의 부대를 전위부대로 삼아 들어왔다.

 

독립군은 10월 21일 아침 8시쯤 200여 명의 전위중대를 백운평 깊숙히 끌어들여 섬멸했다. 임시정부 군무부에 따르면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에 따르면 "명렬한 급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다"라고 전한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 부근으로 이동해 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일본군 동지대는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삼림지대로 들어왔다. 동지대는 이도구 완루구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 쪽으로 병력을 나누었는데 독립군은 먼저 남완루구의 일본군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자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사격했다. <독립신문>은 "적이 적군을 맹렬하게 사격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 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22일 아침에는 가도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 이렇게 또다시 매복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독립신문>은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드디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자서전 <우등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 고 회상한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기병 연내장 가노 대좌를 포함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청산리대첩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소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바로 '경신참변'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