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98 : 일제강점기 43 (임시정부 내분과 국민대표회의)

 

 

 

한국의 역사 998 : 일제강점기 43 (임시정부 내분과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내분과 국민대표회의

 

 

'임시정부의 두 기둥, 이승만.이동휘, 돈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다'

 

3.1운동의 결과물로 임시정부가 결성되엇지만 상해 임지정부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독립 노선이 대립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이념 문제도 컸다. 또한 임시정부 수뇌부들도 임시정부 전체가 아니라 자파의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탄압이었다. 국내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경의 탄압으로 붕괴되었다. 그러자 국내에서 들어오는 자금줄이 대부분 차단되고 말았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본 외무차관에게 보낸 '대정 9년(1920) 3월 말 현재 가정부의 궁상'이란 보고문은 "상해에는 700여 명의 한인 중 70여 명이 임시정부에 근무하는데, 내무부에서 대정 9년 1월 이후 전 직원에게 봉급을 지급한다고 결정했지만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생활의 비참함은 전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라고 기술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두 수뇌인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모두 자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임된 직후인 1919년 5월 미국에 임시정부의 외교를 담당한다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그런데 구미위원부는 임시정부 외교위원부와 별도의 조직으로서 임시정부의 어떠한 법적 직제에도 포함되지 않은 이승만의 사조직 비슷한 기구였다. 이 구미위원부는 미주 교포들이 내는 애국후원금을 임시정부에 납부하지 않고 전용하면서 논란을 빚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애서 발간한 <독립운동사>(제4권 임시정부사, 1975)는 "구미위원부가 미주에서 정부 재정을 관장하면서 임시정부가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던 미주 동포사회로부터 재정 수입에 차질을 빚게되자 재정상 타격이 컸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항상 구미위원부의 폐지를 요구했다"고 전한다.

 

임시정부의 명의로 모금한 자금을 임시정부 재무부로 송금하지 않고 구미워원부가 단독으로 사용하면서 상해 임시정부 사람들은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크기지 시작했다. 1920년 5월 임시정부 국무차장 회의에서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한 것은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회의는 주미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따로 주미 재무관을 두자고 제안했는데, 임시정부 산하로 개편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상해 부임을 거듭 촉구했고 드디어 1920년 12월 8일 이슴만이 상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1919년 4월 대통령에 선출된 후 1925년 3월 의정원에서 탄핵될 때까지 6년 임기 동안 상해에는 고작 6개월(1920.12~1921.5)만 체류했다. 이승만이 1918년 정한경과 공동명의로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두라"고 청원한 것에 뒤늦게 큰 문제가 된 이면에도 이런 자금 문제가 걸려 있었다. 심산 김창숙은 자서전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나와 백암(박은식), 단재 신채호 등 여러 동지들은 이 박사가 조선 민족대표라 자칭하고 미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한 것은 우리 광복운동사상에 큰 치욕이기에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부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상해로 부임하자 문제를 원만히 불어보자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일제 고경(고등경찰)의 '상해에서의 이승만 환영회 상황(1921.1.14)'이란 보고서에서 이승만의 반대편이었던 박은식이 환영사를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합리적인 해결책을 비랐지만 이승만은 현상유지론을 주창해 임시정부 인사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미주 교포들의 애국후원금을 독단적으로 사용해 문제가 되었다면, 또 국무총리 이동휘는 레닌으로부터 지원받은 혁명자금 분배 문제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함경도 단천 출신의 이동휘는 안동 영장 등을 역임한 무관 출신이자 캐나다 전도사 크레션(한국 이름 구예선) 밑에서 전도사 생활도 했을 정도로 한떄는 기독교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해 일경에 체포되어 4년간 인천 앞바다 대부의도에 갇혀 있다가 석방 후 간도를 거쳐 시베리아로 망명했다. 사회주의와는 인연이 없을 듯한 이동휘는 1918년 6월 러시아령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한다.

 

이동휘는 제정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과 출신인 한인사회당 비서부장 박진순(미하일 박)에 의해 사회주의에 입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승만과 이동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국시가 서지 못했다"고 서술한 대로 임시정부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좌우 연합정부였다.

 

그러나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이동휘의 사회주의 인식이 낮았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군 중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홍일은 "이동휘가 레닌에서 '2단계 방법론을 무시하고 단번에 공산혁명으로 족하다'고 답했다가 레닌으로부터 '한국은 노동자 조직이 없고 반부격차도 크지 않기 때문에 공산혁명 전에 민족혁명을 먼저 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김홍일 '자유시참변 전후' <사상계> 1965년 2월호)"고 전한다.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이동휘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세계에서 유력한 정치가들 중에 레닌만이 한국 혁명을 물적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르크스의 예견대로라면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이나 독일에서 일어났어야 할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론은 이론일 뿐이었다.

 

레닌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간한 <고려공산당 및 전로공산당 개황>(1923)은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 가입하고 400만 루블의 활동자금을 지원받았다"고 전하지만 이는 크게 과장된 금액이다. 여러 보고서나 증언 등을 종합하면 레닌이 지원한 혁명자금은 대략 60만 루블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8월 30일 김립과 상해에 도착한 국무총리 이동휘는 그해 10월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과 모스코바에 임시정부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는 여운형, 인공근 한형권을 외교위원으로 선임했지만 한인사회당 소속의 한형권은 혼자 모스코바로 떠났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여운형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각각 "이동휘가 야심을 품고 한형권 한 사람만 모스코바로 보냈다"는 취지로 비난했다. 그런데 임시정부와 가까웠던 상해 불조계(프랑스조계)공무국에서 작성한 '상해 한인사회의 일반 정보에 관한 건'은 김립은 그의 친구 한형권을 임시정부 특사로 보내 자금을 얻어 오도록 모스코바에 파견했다"며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지목했다.

 

한형권은 모스코바에서 레닌과 외교인민위원 치체린을 만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앞의 <독립운동사>에서는 "한형권은 60만 루불을 받아서 20만 루불를 모스코바에 예금해두고 40만 루불을 상해로 가져다가 이동휘의 심복인 국무원 비서장 김립에게 수교했는데, 이동휘는 이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아 독립운동에 쓰지 않고 저희끼리 이른바 '고려공산당' 조직 활동을 위하여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세칭 '레닌 자금'이 임시정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국 보이친스키 동지에게'라는 문건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

 

-코민테른에서 이동휘와 박진순에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돈'을 주었지만 지극히 소액만 노동자 대중에게 들어갔고 대부분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직 각료들, 온갖 종류의 직업 없는 전도사들, 모험주의자들, 투기꾼들 그 외에 무뢰한들에게 어갔다. 이 돈으로 죽어가는 상해 임시정부를 인위적으로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비난은 상해 임시정부에도 상당한 자금이 흘러갔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공식 절차가 아니라 사적 루트를 통해서 지원된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자금 전용 의혹을 받은 김립은 상해 북사천로에서 오면적, 노종균 등에게 사살되었고 이동휘도 1922년 1월 25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노령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제의 탄압에다 내부적으로 노선 문제와 자금 문제까지 얽히면서 임시정부는 거의 활동이 불능한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거나 개조하지는 논의가 등장했다. 그래서 국민대표회의 주비회가 열리고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내는 물론 상해, 만주, 북경, 노령, 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 단체의 대표 120여 명이 모인 회의였다. 이 회의의 자금도 한형권이 가져온 레닌의 지원금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편을 주장하는 개조파 간에 의견대립으로 약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정부 구성에는 실패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전체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라는 위상이 약해지고 일부 세력의 대표로만 인식되면서 시련기에 잡어들게 되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