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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6 : 일제강점기 41 (의친왕 망명 사건)

 

 

 

한국의 역사 996 : 일제강점기 41 (의친왕 망명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의친왕 '이강' 망명 사건

 

 

'상해 임시정부로 향하던 의친왕 '이강', 망명에 실패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었던 1차적인 요인은 막강한 국방력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과 집권당인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협력도 절대적인 요인이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이 두 축을 심하게 요동시켰고, 수많은 인사를 망명하게 만들었다.

 

돈농 김가진은 1887년 고종 24년 5월 주차일본 참찬관과 일본 주재 판사대신으로 4년 동안 일본에서 근무한 일본통이었다. 1894년 공조판서, 1900년 중추원 의장이 되엇다가 망국 후에는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았다. 이런 김가진이 상해 임시정부 합류를 결심하면서 금으로 만든 의치를 빼서 얼굴을 바꾸고 시골 사람 복장으로 위장한 후 1919년 10월 10일 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의 안내로 장남 김의한과 함께 일산역에서 신의주를 거쳐 만주의 안동(지금의 단동)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내무부 정문 제16호(1920.12.20)'는 "대한민국 원년(1919) 10월 29일 특파원 이종욱이 유력가 김가진을 동반해서 상해에 안착했다"고 보고했다. 김가진은 탈출 과정을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귀신처럼 탈출했도다. 그 누가 삼등 객실의 승객을 알아보랴. 찢긴 갓 누더기의 옛 대신인 줄"이라는 시로 남겼다.

 

김가진의 임시정부 합류에 일제는 경악했다. 며느리 정정화 여사는 자서전 <장강일기>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망명 사건이었다. 1877년 고종 14년 귀인 장씨에게서 태어난 의친왕은 해외통이었다. 1894년 고종 31년 일본으로 갔다가 1896년 고종 33년까지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미국 등지를 방문했다. 1900년 고종 37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나서서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교와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서 공부했다.

 

의친왕의 신학문은 망국과 더불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다. 미국 유학 때 의친왕으로 책봉되었지만 1910년 망국과 더불어 공으로 강등된 후 사실상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비록 술로 지새우며 잘못된 세상을 한탄했지만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는 유일한 황족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거처인 의화궁에는 항상 일경이 경호라는 명목으로 지키고 있을 정도로 감시가 삼엄했다.

 

대동단장 전협은 의친왕과 가까운 정운복에게 자신을 경상도 통영의 갑부 한 참판이라고 속인 후 의친왕이 통영에 가지고 있는 어업허가권인 어기권을 사겠다고 접근했다. 의친왕이 계약 기간이 남았다면서 거절하는 등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의친왕으로부터 11월 9일 전협이 임시로 빌린 공평동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받았다. 의친왕은 도중에 일경을 만난 것이 마음에 걸려 발길을 돌리려다가 여러 번 재촉을 받은 후 밤 11시쯤 공평동에 도착했다. 전협은 의친왕을 만나자 대뜸 "어기권은 거짓말"이라면서 "독립운동에 인물이 필요한 시기이니 떨치고 일어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일제의 '관련자 신문조서'에 따르면 의친왕은 "의외의 사태에 놀라지 않고 동행하겠다"고 승낙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협은 미리 준비한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우고 자하문을 빠져나와 세검정을 거쳐 새벽에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전협이 준비한 집으로 들어갔다. 의친왕은 안내했던 정남용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구기리에서 의친왕이 했던 말을 전한다.

 

의친왕은 "우리 집안은 조선 500년 동안 주인 집안인데...2,000만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하고 있는데 주인이 모르는 체할 수는 없다..... 또 이태왕(고종)의 붕어는 그들이 독살한 것으로서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주인집의 일원으로서 보통 사람의 열 배, 스무 배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길 안내를 할 사람도 잇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동행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에 정남용은 "전하 같은 분이 해외로 나가서 강화회의나 국제연맹회에 출석해 조선인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잇는 상황을 말하고 일본의 무단정치를 뒤집어야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때 의친왕은 후궁인 수인당 김홍인과 간호사 최효신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여인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태왕 전하께서 외국인에게 120만 원의 돈을 맡긴 증서가 있다"는 이유로 동행을 원했다. 고종의 비자금에 대한 아들의 증언이므로 이재호는 두 여인과 함께 서류가 든 가방을 가지고 구기리로 왔다. 

 

그러나 두 여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는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다음에 망명시키기로 하고 의친왕과 대동단원들만 10일 오전 11시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일행은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표를 사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삼등칸에 탔는데, 검문 때는 이을규가 백부라고 대신 대답했다.

 

의친왕이 열차를 타기 위해 구기리에서 수색으로 향하던 10일 아침, 일경 간부 지바는 귀족 저택을 경호하는 순사들을 집무실로 불러 시국의 중대함을 설명한 후 "귀족들의 경호에 만전을 기하고 만에 하나라도 부주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엄중히 훈시했다. 훈시 도중 제3부 경위반 주임이 귓속말로 "어젯밤에 이강 공이 공저를 탈출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왕직의 구로자키 사무관은 상해로 탈출했다면 그 결과가 조선 통치에 미칠 영향이 너무나도 막중하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사태를 파악하고 5시쯤 아카이케 경무국장에게 "중대사태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일제는 조선과 상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을 태운 열차는 11일 아침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열차 안에는 일경 수십 명이 올라타 검문하기 사작하였는데, 의친왕 일행은 미리 준비한 여행증명서를 보이고 통과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열차는 11일 오전 11시쯤 안동현역에 도착했다. 안동현에는 아일랜드인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이 있었는데,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였다. 이륭양행까지만 가면 이륭양행 소속의 기선을 타고 상해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면 상해와 서울에서 동시에 의친왕 명의의 유고문이 뿌려질 에정이엇다.

 

"통곡하면서 우리 2,000만 민중에게 고하노. 이번 만주행은..... 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로 시작되는 유고문은 고종 독살을 폭로하면서 "민중은 한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의 망명과 함께 유고문이 뿌려지면 국내외에서 엄청난 충격파가 일 것이었다. 그가 임시정부에 가담했다면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의친왕 일행은 안동현에 쫙 깔린 일경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의친왕과 정남용은 인력거에 강제로 실려 신의주 철도호텔로 압송되고 이을규는 역에서 탈출했으나 이내 체포되고 말았다. 의친왕 망명작전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제는 의친왕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거주하던 남산의 녹천정에 유페시켰다. 의친왕 명명작전이 실패하면서 대동단 조직도 뿌리가 뽑혔다. 일제는 대동단원 검거작전에 돌입해 단장 전협과 최익한.권태석.정남용.이을규 등 모두 37명을 '정치점죄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및 사기 피고 사건'으로 기소했다.

 

조선 총독부 판사 이토 준키치를 비롯해서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법정은 전협에게 징역 8년형을 선고하는 등 가담자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전협은 1927년 11월 9일 가출옥했다가 이틀 후인 11일 사망했다.

 

그런데 고종의 채권 서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친왕은 지바의 취조때 "태왕께서 이용익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하신 돈이 독일인이 상해에서 경영하는 덕화은행에 있을 것이니 그 유무를 찿아 받으라는 증서"라고 분명히 밝혔다. 체포 당시 이 서류를 갖고 있던 이을규는 가방을 든 채로 도망했으며 그 가방은 이륭양행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그 후 재판 과정에서 일제는 이 서류의 소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독립운동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제가 120만 원의 거금에 대해서는 침묵했다는 것은 서류 일체를 압수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이 돈의 행방에대해서 추적에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