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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4 : 일제강점기 39 (임시정부 국내 행정망 '연통제')

 

 

 

한국의 역사 994 : 일제강점기 39 (임시정부 국내 행정망 '연통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국내 행정망 '연통제'

 

 

'상해 임시정부, 비밀조직 '연통제'로 조선총독부에 맞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 비밀 행정조직인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도 설치해 국내를 놓고 총독부와 다퉜다. 총독부는 임시정부의 비밀 행정조직이 국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반면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국내 한인들은 총독부 지배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호가 연통제다. 연통제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1919년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해 7월 10일 공포한 국내 비밀 행정조직이었다. 임시정부는 전국을 13도 12부 215군으로 나누어 서울에는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각도에는 감독부, 각 부와 군에는 총감부, 각 면에는 사감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자료 부실 때문에 정확한 현황은 알 수 없지만 국경 부근인 함경도.평안도에서는 면 단위까지 연통제가 실시되었다. 연통제는 물론 비밀조직이었으나 1919년 9월 임시정부의 평안남도 특파원 유기준이 평양 기성의원에서 체포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유기준은 취조를 받던 도중 도주했지만 연통제 관련 서류들을 빼앗기면서 단서가 드러난 것이다.

 

연통제에 경악한 일제는 이를 뿌리 뽑기 위해서 수사망을 총가동해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연통제 조직을 찿아냈다. 함북 회령과 경성에서 김린서와 박원혁 등을 비롯하여 47명이 기소된 사건이 '함북 연통제 사건'이다. 7~8개월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은 후인 1920년 8월 4일부터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동아일보> 1920년 8월 22일자는 '세인을 경해(크게 놀람)케 한 연통제 공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온 세상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더욱 당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던 <신한일보> 9얼 23일자에도 거의 그대로 실렸다.

 

임시정부가 비밀리에 국내 행정조직망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기사는 "칠팔 삭 동안이나 철창 아래에서 신음한 까닭으로 얼굴에는 혈색이 하나도 없이 하얗게 세었고 그 중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있는 것이 한층 더 사람의 비애를 자아낸다"고 전했다. 회령 출신 68세 노인 강준규를 지칭한 것이다.

 

일본 육군성에서 하라 다카시 내각 총리대신에게 보낸 '연통제 조직의 독립기관 검거의 건'은 함경북도 총감독 강준규이고, 부감독이 김린서, 서기 박원혁이라고 보고했다. 체포된 47명 중 중형인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윤테선은 서울 가희동 취운정에서 강대호(개성), 박상목(평안도), 송범조(경상도), 강택진, 박시묵 등과 만나 서울에 (연통제)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13도 총감부 산하에 총무.노동.재무.경무.편집.교통.교섭의 7부를 설치하고 곽병도 등을 특파원으로 파견해 자금도 모집했다.

 

윤태선은 함북 연통제 사건 공판에서 "13도 총감부는 상해 가정부(임시정부)와 대립하는 관청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명령과 지휘를 받는 하급관청"이라고 답해서 상해 임시정부 산하 조직이란 사실을 밝혔다. 1919년 8월 4일 함흥지법 청진지청에서 열린 공판에서 이 당시 독립운동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각지에서 400여 명의 방청인이 몰렸지만 일제는 법정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이들을 막고 피고들만 입장시켰다. 재판장 이시바시, 배석판사 아사하라, 검사 진토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김린서는 임시정부의 경원선연변(서울-원산) 특파원 명제세를 통해 임시정부의 지령문인 '목록견서'를 받았다. 목록견서는 "1. 군자금 모집 2. 군사 경험 있는 자를 조사 통지할 것 3. 독립 시위운동을 행할 일 4. 각 관청과 군대에 있는 조선인의 상황을 조사 통지할 일 5. 병기.탄약에 관한 상황을 통지할 일 6. 구국금을 모집할 일 7. 시위운동으로 피해받은 상황을 조사 보고할 일" 등으로 임시정부가 연통제를 통해 실시하려던 사업이 열거되어 있다. 임시정부는 즉각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는 쪽과 외교독립운동 쪽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 지령은 독립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함경도 경성 총감 이상호의 진술에 따르면 경성은 오촌.주을온.주목.나남.용성.어량면 등 면 단위까지 조직망이 갖추어져 있었다. 일제는 공무원들까지 연통제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함북 연통제 사건의 특징은 모든 피고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이다. 김린서는 "이번 사건은 조선 독립을 도모한 것"이라면서 "서류의 적은 일본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상호는 "걸핏하면 우리 조선인이 안녕질서를 문란케 한다고 하지만 실상 일본인이 우리의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안녕질서를 위하여 독립하려 한다"고 답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이 행해졌으며 검찰도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도 폭로되었다. 군서기였던 이운혁은 "나남경찰서에서 몹시 얻어 맞아 허위자백을 했다. (......) 그날 다른 사람이 몹시 맞아 죽게 된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고, 김동식은 "검사가 나남경찰서에서 경찰관과 동석해 심문했다"며 검찰이 경찰의 고문을 묵인했다고 진술했다. 박원혁은 상해 임시정부의 상황을 "<독립신문>을 보고 알았다"고 답해서 연통제를 통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이 배포되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간도에서 무장단체인 '결사단지대'를 조직했던 이규철은 재판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였다. 재판장 이시바시가 "간도에서 독립운동 하던 사실을 진술하라"고 말하자 "간도 영사관에서 조사할 일이니 이 재판소에서 물을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재차 묻자 "지난 일이라 다 잊었다"고 거부했고, 통역이 답하라고 나서자, "통역이면 통역이나 하지 왜 나서는가?"라면서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이 기세에 위축된 통역이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친일파가 되어 통역을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체면을 차려서라도 잘 대답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자,  이규철은 "체면을 차리다니? 내가 이곳에 대접받으러 온 줄 아는가?"라고 꾸짖었다. 재판장이 "피고를 퇴정시키고 결석 재판을 하겠다"고 위협하자 "퇴정을 명하려거든 하라"고 맞섰다.

 

 '결사단지대'는 다른 자료에서 '한일결사대동맹'으로 나오는데, 재판장 아시바시가 "잘랐다는 손가락을 보이라"고 요구하자 이규철은 주먹을 단단히 쥐면서 "정 보겠다면 내려와서 보라"고 하자, 간수와 순사들이 이규철 곁으로 달려들어 "살기가 법정에 가득 찼다"고 기사는 전했다. "꿇은 손가락을 항상 보면서 결심을 계속하자는 것"이라고 단지 이유를 말한 이규철은 자신을 "강도 일본에게 붙잡혀 온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8월 7일 검사 진토는 "본 사건은 작년의 만세 소요와 그 취지가 달라서 상해 가정부와 연락하고 조직적으로 단체를 만들어서 성대하게 조선독립을 운동해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 이렇게 국가의 안녕질서를 문란케 해서 국가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자는 속히 박멸치 않을 수 없다"면서 징역 6년까지 구형했다.

 

6년형을 구형받은 윤태선은 "강탈한 나라를 도로 찿고자 함이 무슨 죄냐?"고 항의했고, 김린서는 "총독의 행정에 반감을 품고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번 사건은 총독의 죄"라면서 검사를 꾸짖었다. 5년형을 받은 김동식은 "우리는 적군의 포로가 된 몸이니 5년이 아니라 50년이라도 목역하겠다"고 맞섰고, 최종일이 "당신네는 우리를 피고, 피고 하는데, 제 것을 되찿고자 하는 우리가 원고인가, 남의 것을 빼앗은 일본이 원고인가?" 일본인은 재판장이 될 수가 없다"고 따지자 당황한 이시바시는 "이런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제지했다. 그러나 최종일은 "일본 형법이 사내(데라우치)와 당국자는 처형하지 않느냐?'고 절규했다.

 

 원고와 피고가 뒤바뀐 재판이었다. "삼천 리 강토가 다 유치장이요 감옥인데 나간들 무슨 자유와 행복이 있겠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앞집에서 뒷 집 것을 탈취해서 앞집 사람이 송사를 한다면 재판장은 어떻게 처결하겠는가?"라고 따져 묻는 사람도 있었다. 기사는 "재판장과 간수, 순사가 제지해도 듣지 않아서 법정은 소연하고 일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시바시는 "더 들을 필요가 없다"면서 페정을 선언하고 도망치듯이 뛰어 들어가야 했다.

 

'함북 연통제 사건'뿐 아니라 평북 중화군 출신의 목사 강시봉 등 8명이 징역 5년에서 2년까지 선고받은 '평북 연통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평북 영변 출신의 선규환은 연통제 사건으로 1927년까지 무려 8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일제는 연통제를 뿌리 뽑지 않으면 국내 통치 기반이 뿌리에서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정부'라는 이름을 내건 조직이 있다는 자체가 일제로서는 크나큰 위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