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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5 : 일제강점기 40 (대동단)

 

 

 

한국의 역사 995 : 일제강점기 40 (대동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동단

 

 

'대동단 출범을 계기로 황족.귀족도 독립운동에 가세하다'

 

친일파 중에는 일본이 대한제국보다 더 나은 정치를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인물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무단통치로 일관했고, 그에 반발해 3.1 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까지 수립되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 후 매국적 중에서도 일부는 후회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신정은 커녕 식민지로 무단통치를 실시하자 속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진회 출신 전협이었다. 전협은 일진회 이용구.송병준 등의 총애를 받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부평군수로 나가고, 일진회의 '합방청원서'에도 세 번째로 서명했던 매국적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삼킨 후 일진회까지도 해산시키자, 끈 떨어진 신세가 된 전협은 만주 유하현으로 이주했다. 전협은 '경찰 신문 조서'에서 "당시 그 지방에는 배일 조선인 두목 이시영.이회영.이동녕.이윤일 등의 일파가 극히 왕성했는데, 나는 일진회원이었다는 이유로 큰 박해를 받아 견딜수가 없어 명치 46년(1913) 여름 경성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일진회 출신이 만주에서 목숨을 건사한 것만도 다행이엇다. 전협은 또 부평군수 시절 관내에 있던 윤치호의 토지를 전국환이란 가명으로 사취한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이 드러나 2년 4개월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석방 후 그는 만주.상해.국내를 오가며 할 일을 모색하다가, 3.1 운동이 발생하자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래서 1919년 4월쯤 최익환, 승려 정남용, 보부상 우두머리 양정 등과 '조선민족대동단'(약칭 '대동단')을 결성했다. 3.1운동으로 일경의 감시가 강화된 상황에서 대동단은 뱃놀이를 가장해 한강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일제의 허를 찌르는 전략을 펼쳤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과 구분되는 특징은 황족.귀족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전협이 대동단의 활동자금을 확보한 것도 남작 정주영의 장남 정두화를 통해서였다. 정주영은 충청도.경기도 관찰사와 귀족원경을 역임한 귀족이고 그 아들 정두화도 충청도 호서은행 취체역에 종오위(從五位) 위기(位記)를 가진 상류층이었다. 그는 나중에 일제 신문조서에 "성질이 완고하여 시세를 깨닫지 못하고 국권 회복을 꿈꾸다가 불량배의 꾐에 빠져 독립자금을 공급했다는 의문이 수차 일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정두화는 항일 의지가 있었다.

 

정두화가 처음에는 "아직 부친의 감독 밑에 있기 때문에 출자를 할 수가 없다"면서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1만 100여 원의 거금을 전협 등에게 제공했다고 기록도이어 있다. '대동(大同)'은 원래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자가 말한 '이상사회'를 뜻하지만 전협은 '온 민족의 대동단결'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일제 당국의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대동단의 3대 강령은 "1.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 2.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3. 사회주의를 철저하게 실행할 것" 등이었다. 대동단은 총독정치의 철폐, 일본 군대의 철거 등을 결의하면서 "완전한 독립정부를 성립시킬 때까지 가정부(임시정부)를 원조할 것 "도 규정했다. 또 전협은 "상공단, 청년단, 유림단, 진신단을 결속해 하나의 단체로 만들어 운동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공단은 전 보부상 두목인 피고 양정에게, 청년단은 피고 나창헌에게, 유림단은 이래수에게, 전신단은 김가진 및 이달하에게 서로 연락하면서 일치된 운동을 할 것을 약속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동단 활동은 대담했다. 증인 조종윤 신문조서에 따르면 대동단은 원은동 159번지 조은성 소유 점포를 월세 10원에 빌리고, 황금장 이건호의 집과 주교정 최익환의 셋집에도 인쇄기와 활자를 비롯한 인쇄 시설을 갖춰놓고, 겉으로는 인쇄업자로 가장했다. 그러곤 비밀리에 <대동신보> 1만 매를 인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대동신보> 외에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보내는 '진정서', '일본 국민에게 고함'과 같은 경고문도 작성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되는 최익환은 '관망하면서 정담만 하는 자들에게 경고함'이란 경고문도 작성했는데, 그 말미에 "최근 10년간 학정의 자취는 우리 민족을 박멸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면서 "차라리 일본의 칼에 옥쇄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역시 사회주의자가 되는 권태석 등은 '등교 학생 제군에게' 라는 글에서 동맹 휴학을 계속하라고 권고했다. 이 유인물은 훗날 아나키스트가 되는 이을규가 중심이 되어 각지에 배포했다.

 

이런 활동들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대동단이 총재가 김가진이고, 그가 상해로 망명한다는 사실이었다. <공판시말서>에 따르면 전협은 원래 김가진과 알고 있었는데, "전협이 방문해 대동단에서 발행한 문서를 보자 적극 찬성하면서 참가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김가진은 1985년 고종 32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1900년에는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망국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은 거물이었다. 대동단에는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도 가입했는데, 일제에 따르면 앞의 '등교 학생 제군', '일본 국민에게 고함', '관망하면서 정담만 하는 자들에게 경고함' 이란 글도 모두 김가진의 동의를 얻은 후 최익환이 인쇄했다고 전한다. <대동신보>도 김가진.전협.정남용이 집필했으며, 대동단 규칙도 김가진이 지었고 체부동 김가진의 집에서 인쇄했다고 하여 김가진이 명목상 총재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적시했다. 

 

1919년 5월 23일 최익환과 권태석이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대동단에 위기가 찿아왔다. 김가진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연통제 특파원 이종옥을 밀파해 저명인사들을 망명시키려 했다. 김가진의 망명은 이런 움직임과 맞아떨어지면서 폭발력을 갖게 되었다.

 

전협은 신문조서에서 "상해 가정부에서 이종욱이 입경해 나를 양정의 집으로 찿아왔다"고 말해 대동단이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또 "전협은 이종욱이 상해에서  가지고 온 30여 명의 망명 대상자 명단을 보았다"면서 "지금 기억나는 인명은 이강 공(의친왕), 박영효, 김가진, 김윤식, 이용식, 이능화, 이용태, 정운복, 윤치호, 이상재 등이었다'고 말했다.

 

대동단의 정남용은 신문조서에서 "이종욱이 내게 '가정부의 각원(국무위원)으로부터 왕족.귀족 중 상해로 올 만한 사람이 잇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안내해 데리고 오라는 부탁이 있었서 왔다'고 말했다" 면서 저명 인사 망명 계획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협은 상해에서 온 이종욱이 자신에게 "김 남작을 동행하기 위해 왔다고 하기에 이종욱에게 체부동 김 남작의 집을 가르쳐주었다"고 진술해 자신이 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과 김가진을 연결시켰음을 시인했다.

 

그런데 정남용은 "김가진에게 상해로 갈 것을 권유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발의에 의해 대동단 본부를 상해에 두기 위해 가게 되었다"면서 임시정부의 권유 이전에 김가진이 상해 망명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이 망명 시키려 한 주요 인물 중에는 고종의 친아들인 의친왕 이강도 있었다. 그러나 두 거물을 한꺼번에 망명시키기가 쉽지 않자 이종욱이 먼저 김가진을 망명시키고 난 후 전협이 의친왕 이강을 망명시키기로 역활을 분담했다.

 

전협은 경신학교 북쪽 모퉁이 이종욱의 기와집 숙소에서 상해로 망명하는 김가진이 아들을 통해 의친왕 이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이강에게 전한 편지는 "소인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인데 전하께서도 따라서 왕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고, 편지 끝에는 김가진이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가진은 서울을 떠났다. 그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커녕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고 비난받던 황족.귀족들의 망명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