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93 : 일제강점기 38 (국내외 민족협동운동의 진전)

 

 

 

한국의 역사 993 : 일제강점기 38 (국내외 민족협동운동의 진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 국내외 민족협동운동의 진전

 

 

신간회운동(1927~1931)

 

3.1운동 후 일제의 유화적이고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우파에서는 타협주의 세력이 늘어나고, 여기에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좌파가 민족운동에 참가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지하로 숨어들면서 독립운동에 큰 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우가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펴야 독립역량을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이 양심적인 우파와 온건한 좌파 사이에 확산되어 갔다. 연합의 방법으로 우파는 좌우를 통합하는 중도이념을 내세웠고, 좌파는 이념통합보다는 전략적 제휴를 희망했다.

 

좌우협력운동은 1925년에 결성된 '조선사정연구회'와 1926년에 조직된 '정우회'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이 더욱 확산되어 1927년 2월에는 드디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이를 주도한 인사는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홍명희, 문일평, 한기악 등 <조선일보> 계열의 인사, 이갑성,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 권동진 등 천도교구파 인사,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 그리고 와세다대학 출신의 한위건을 비롯한 공산당원 등으로 발기인은 28명이었다. 회장은 88세의 이상재, 부회장은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한 홍명희가 맡았다.

 

신간회는 전국에 약 140여 개소의 지회를 두고, 약 4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는데, 농민이 가장 많고, 노동자, 상인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밖에 기자, 교원, 사업가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었다. 그리고 자매단체로 유영준과 김활란 등 여성들이 조직한 '근우회'가 있었다. 여성운동이 시작된 것도 특기할 일이었다.

 

신간회는 각 지방을 순화하면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그 요지는, 1) 조선인에 대한착취기관 철폐, 2)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3)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기회주의 배겨), 4)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5) 사상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 그밖에 신간회는 노동쟁의와 동맹휴학을 지도했는데, 원산노동자 총파업(1928~1929)과 단천의 농민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1929.11.3)을 지원한 것은 그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계열의 참여가 점차 커지면서 신간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929년 6월에는 좌파계열의 허현이 집행위원장이 되어 운동노선을 대규모 민중집회로 몰고 갔다. 처음에는 신간회를 관망하고 있던 총독부는 신간회가 좌파의 민중운동으로 기울고, 특히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군중대회를 열려고 하자 탄압에 나섰다.

 

이에 신가노히는 다시 온건하고 합법적인 노선으로 돌아가서 김병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간부진은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천도교 신파(최린 등)와 손을 잡았다. 이에 적극적인 투쟁을 주장하는 좌파들은 온건하고 합법적인 운동에 반대하며 신간회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때마침 모스코바 코민테른도 1927년에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고, 우파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노선을 취하여 공산당의 해체를 명령하자 좌파는 신간회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마침내 해산했다.

 

신간회운동은 비록 4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처음으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대규모 민족협동전선을 구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특히 안재홍을 비롯한 우파인사들이 극우와 극좌의 이념을 배격하고, 중간이념을 가지고 중앙당 또는 민족유일당을 만들려고 시도한 것은  새로운 실험으로서, 해방후에도 중도정당과 좌우합작운동이 열리는 길을 터 놓았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1929)

 

일제시대 학생운동은 1919년 3.1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도 학생이었다. 그런데 1929년에 이르러 학생운동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났다.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광주중학교 학생 '후쿠타'가 통학 기차 안에서 한국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 '박기옥'을 희롱하자, 이를 본 여학생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혼내준 데서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을 게기로 두 나라 학생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11월 3일에는 광주지방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 소방대와 충돌했다.

 

그후 학생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서 1930년 3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참가 학생수는 5만 4천여 명,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구금 1,642명에 이르렀다. 이는 3.1 운동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저항운동이었다.

 

학생운동은 단순한 동맹휴학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되고, 격문을 통해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식민지 교육제도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주장은 신간회의 지도를 받은 것이기도 했다.

 

해방 후 1953년에 국회는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행사를 해 왔는데, 1973년 유신선포로 폐지되었다가 1984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해외의 민족협동과 '의열단'

 

1920년대 후반기 국내에서 '신간회운동'이 전개될 무렵에 해외에서도 좌파와 우파 사이에 '협동운동'이 추진되었다.  

 

중국의 북경, 상해, 남경, 무한 등지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은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유일당을 건설할 것을 선언하고 나섰다. 1926년 북경에서 장건상, 원세훈, 조성환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를 조직한 것이 그 시초를 이루었다.

 

한편, 만주에서도 18개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여 유일당 조직을 협의했는데, 그 결과 1929년에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 해체되어 '국민부'로 통합되고, 1930년에는 김좌진(1889~1930)이 중심이 되어 '한족총연합회'가 발족하여 크게 두 단체로 통합되었다. 그 뒤 한족총연합회는 홍진, 이청천(1888~1959) 등이 주도하여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만주 동북지방에서 독립전쟁을 계속했다. 한편,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되어 남만주 일대에서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1920년대 민족운동단체의 하나인 '의열단'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1919년 11월에 김원봉(1898~1958)이 만주 길림시에서 조직한 이 단체는 1923년에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에 잘 나타 있듯이 민중의 직접폭력혁명에 따라 강도 일본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조선'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무정부주의(아카니즘) 노선을 따르는 독립운동방법으로서 과감한 테러를 통하여 시설을 파괴하거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실제로 이들은 부산, 밀양,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등에 권총을 난사하기도 했다(1920~1926).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는 조직적인 무장운동으로 방향을 바꾸고, 1926년에는 계급타파와 토지평균 등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20개조의 행동강령을 만들고 민족협동운동에 참여할 것을 선언하였다.

 

1920년대 해외의 민족운동은 이렇게 좌우가 대동단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갔으나 단체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고, 단체마다 노선과 출신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명실상부한 민족유일당 건설에는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