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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1 : 일제강점기 36 ( 만주지역 무장투쟁)

 

 

 

한국의 역사 991 : 일제강점기 36 ( 만주지역 민족해방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 만주지역 민족해방운동

 

 

만주 지역 항일독립군 투쟁

 

3.1운동은 1910년대 이미 100만 명에 가까운 이주 동포사회를 바탕으로 성장한 서북간도.노령(러시아령)의 수많은 민족주의 독립단체를 크게 고무시켰다. 망명 인사와 동포들이 힘을 합쳐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군대를 양성하여 독립전쟁 기지를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 단체들은 비폭력 노선에 한계를 느끼고 '독립전쟁론'을 내세우며 국내 진공을 목적으로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는 약 3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국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종교인 대종교를 신봉하던 박은식, 신채호, 김교한 등이 쓴 역사책을 교재로 하여 정신적으로도 강인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본국의 해방뿐 아니라, 우리의 옛 강토였던 만주지역을 수복하여 장차 대조선을 건설한다는 웅대한 목표를 세우고, 만주에 살고 있던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고족 등을 우리와 핏줄을 같이하는 배달겨레로 간주하여 동화시켜 나가기도 하였다. 대종교인들이 쓴 역사책이 우리 역사의 중심무대를 만주에 두고,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한국사로 편입시켜 서술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에 활동한 독립군부대 가운데 가장 명성을 높인 것은 서간도(압록강 이북)와 북간도(두만강 이북) 지역의 '군정부'(軍政府, 뒤에 서로군정서로 개편), '대한국민회군',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의용군', '광복군총영' 등이었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때로는 국경을 넘어와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했다. 독립군부대가 싸운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것은 1920년 6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 전투'에서 거둔 승리('봉오동 전투')로 일본군 1개 대대를 격파했으며, 7월에 다시 4개 대대규모로 쳐들어 온 일본군을 완전히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는 1920년 8월 소속병력이 1,600여 명이나 되는 동북만주에서 가장 강한 무장단체였다.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피해 장백산의 안전지대로 이동하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조선인을 학살하고 이들 구실로 3개 사단 병력으로 독립군이 모여 있던 청산리를 공격해 왔다. 그해 10월 18일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화룡현 삼도구의 청산리 계곡에서 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1,254명이나 사살했지만 독립군은 전사 60명, 부상 90명에 지나지 않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청산리 전투')

 

둑립군부대와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대한 침략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20년 10월에 '훈춘사건'을 조작했다.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게 한 후, 이를 한인 동포에게 뒤집어 씌우고 군대를 보내 3만여 명의 동포를 학살하고 수천 채의 민가와 30여 채의 학교를 불태워버렸다. 이 시건을 '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이라고 부른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일제의 보복공격을 피해 소.만 국경 가까운 밀산 지방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모인 36개의 독립군 단체는 1921년 초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김좌진.홍범도.조성환, 총사령에 김규식, 여단장에 이청천을 간부진으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독립전쟁을 벌이려고 수십만 동포가 살고 있는 소련 땅인 흑룡강 근방의 연해주 자유시 '일렉세프스코'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련내 적군(혁명군)과 백군(구 러시아군) 사이에 내분에 말려들어 이른바 '자유시참변'(1921.6.28)을 겪고,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애로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의 옛 근거지였던 만주로 돌아온 독림군은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흩어진 독립군부대를 흡수하여 통일하려 했다. 남만주에서는 1923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의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했다. 지안과 통화를 중심으로 활동한 '통군부'는 조직을 개편했으나 다시 의견이 갈리어 집안시 일대에서 활동하던 채찬.김승학 등이 중심이 된 '참의부'(1924)가 결성되어 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가고, 길림성과 봉천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오동진,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되어 '정의부'(1925)로 나뉘었다. 같은 해 북만주에서도 자유시 참변을 겪고 돌아온 김혁, 김좌진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 '신민부'(1925)를 결성했다.

 

이러한 독립군 단체들은 상하이 임정과는 달리 모두 만주 교포사회를 바탕으로 행정.입법.사법부를 갖춘 일종의 자치정부였고, 교포사회에서 거둔 세금으로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분산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려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벌어졌지만 건설 방법을 둘러싼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해 실패했다. 그뒤 이들 독립군 단체들은 각 활동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항쟁을 벌였지만, 끊임없는 일본군의 토벌과 지도부 대립으로 차츰 쇠퇴했다.

 

나중에 이 세 조직은 1929년에 '국민부'로 통합되어 어느 정도 정부기능을 갖추고 동포사회를 관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