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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89 : 일제강점기 34 (부르조아 민족주의운동의 분열과 쇠퇴)

 

 

 

한국의 역사 989 : 일제강점기 34 ( 부르조아 민족주의운동의 분열과 쇠퇴)

 

 

 

 

 

           

 

 

부르조아 민족주의운동의 분열과 쇠퇴

 

1. 민족개량주의와 실력양성운동

 

 

민족개량주의의 등장

 

3.1운동  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펼치면서 부르조아 민족주의세력은 '민족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조선인 대지주, 자본가와 일부 지식인들은 3.1운동이 좌절한 뒤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들은 총독부가 내건 '문화정치'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경제적으로는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했다. 호남 지방의 대지주이자 자본가인 김성수의 <동아일보> 계열은 민족개량주의의 본보기였다. 여기에 이광수.최남선.최린 등의 지식인, 종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이광수는 1921년 5월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간직을 팽개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되었다. 그는 1922년 5월 최린이 경영하던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실어 민족개량주의를 대중에게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3.1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옮겨 가는 변화"라고 하면서 "허위, 비사회적 이념, 나태, 무신(無信), 겁나(怯懦), 사회성의 결핍"등과 같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에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독립을 하려면 민족성부터 개조하고, '수양동우회'와 같은 단체가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1924년 무렵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민족독립을 드러내 놓고 부정하는 자치론을 주장하면서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광수는 1924년 <동아일보> 신년 사설로 '민족적 경륜'을 실어 "독립운동을 일본이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일제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자 했다. 이 무렵 김성수.송진우.최린 등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치운동을 펼쳐 나갈 정치결사로서 '연정회'를 조직하려 했다. 민족개량주의의 이러한 의도는 <동아일보> 불매운동과 같은 민중의 세찬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실력양성론'에서 '자치론'으로 이어진 '민족개량주의'는 민족독립을 포기한 '친일 타협노선'이었다. 3.1운동 뒤 고양되던 사회주의운동과 대립하면서 민중을 기만한 민족개량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의 열기를 시히려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이바지했다.

 

 

* 참고 : 부르주아지 어원

 

부르주아지(프랑스어: bourgeoisie)는 원래 중산층이란 뜻이었으나 무산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도입한 마르크스주의 이후 현대에는 자본가 계급을 뜻한다. 형용사형은 부르주아(프랑스어: bourgeois)이다.

 

프랑스어로 ‘성(城)’을 뜻하는 bourg에서 유래한다. 부를 축적한 계급은 안전하고 윤택한 성내에 살고 그렇지 못한 계급은 위험하고 척박한 성외에서 살았으므로 생긴 명칭이다. 이 유래를 좇아 부르주아는 자본가 계급을 뜻하게 되었고 반의어는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이다.

 

이 사람들은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등장했고 프랑스 혁명 역사에서는 영세한 상인이나 일용직 노동자인 민중과 기득권층(로마 가톨릭 교회 성직자, 왕족, 귀족) 사이의 제3계층을 뜻하였다. 민중과 달리 재산과 학식이 있었지만 기득권층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 부르주아혁명으로 기득권층이 몰락한 이후에는 자본가라는 이름으로 산업혁명 시대를 지배하는 계급이 되었고 노동자 계급와 갈등 탓에 사회주의에 도전받는다. 동음이의어로 다크 부르주호, 부르주호가 있다.

 

자본력을 토대로 한 부르주아는 기존 귀족과 갈등이 상존하였으며 부르주아혁명을 이용해 귀족의 세력이 축소되는 계기를 초래했다. 영국의 부르주아혁명은 부르주아계급과 귀족계급의 타협을 초래했는데 프랑스 혁명은 귀족계급의 철저한 타도로 귀족계급의 급속한 축소를 초래한다.

 

위에서 언급한 부르조아 민족주의 운동은 한마디로 당시 지식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의 민족운동을 말한다.

 

부르조아 민족주의세력 가운데 <조선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하는 신석우.안재홍.백관수.이상재 등이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문화정치의 기만성과 민족개량주의의 거짓됨을 폭로하면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의 길을 찿았다. 그리하여 1920년대 후반에는 사회주의세력과 함께 힘을 합하여 신간회운동에 참여하였다.

 

 

 

실력양성운동

 

1920년대 초 민족주의자들은 실력을 양성한다면서 여러 운동을 벌였는데 '물산정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그 본보기다. 처음 민중은 이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냈다. 민족주의자들은 반일운동 차원에서 문화정치의 열린 공간을 이용하려고 이 운동에 참가하였지만,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이 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3.1운동 뒤에 드높아진 반일운동을 문화운동에 묶어 두려 했다.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의 경제적 파탄을 구제하자면 외화를 배척하고 불편하나마 국산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일어났다. 1922년과 1923년 초 물산장려운동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활발히 벌어졌으나 곧 주춤해졌다. 이 운동이 퍼저 나가면서 그 피해가 노동자.농민 등 절대다수의 소비자인 민중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민족산업의 비중과 생산력이 매우 보잘것없던 식민지 경제에서 광목.모자.고무신 등의 생필품은 곧 바닥이 났고 가격도 치솟았다. 원산지에서 한 필에 1월 60~70전 하던 원목이 상점이서는 3원 안팎에 팔렸다. 결국 이 운동에서 나오는 이익은 상인이나 자본가 계급의 몫이었고 그 피해는 노동자.농민 등 식민지 민중에게 돌아갔다.

 

또 이 운동을 이끌던 '조선물산장려회'에 박영효.유성준 같은 친일파나 친일관료들이 적극 참여하였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슬로건도 '일본상품 배척'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지 않고 전국 어디에서나 강연회.시위행진 등과 같은 물산장려를 위한 행사를 성대히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일제와 타협하는 민족개량의 성격이 드러나면서 처음에 참여했던 이상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떨어져 나갔고 민중이 외면하면서 물산장려운동은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운동은 조선인 기업의 힘을 키워 보자는 뜻이었지만 자산가 계층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으로 여긴 한계가 있었다.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은 1천만 원을 모아 민족교육을 북돋우고 '민족간부'를 양성하자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도 처음에는 대중의 호응을 받았지만 얼마 못가 대중이 참여하지 않았다. 식민지 수탈체재 아래 일부 자산가 계층의 자녀를 빼고는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은 매우 한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 운동은 "시급한 것은 과다한 문맹인구를 퇴치시키기 위한 대중교육의 실시이며 고등교육은 그 다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력양성운동은 반일 성향을 지닌 사회운동을 통제하려던 일제의 속셈과 민중운동.사회주의운동의 힘을 누그러뜨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 민족개량주의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