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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87 : 일제강점기 32 (국외민족해방운동)

 

 

 

한국의 역사 987 : 일제강점기 32 (국외민족해방운동)

 

           

 

민족 저항의 시대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

 

  

2. 국외 반일민족해방운동

 

일제의 파쇼통치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만주와 연해주지방으로 망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은 일제의 침략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고, 특히 만주의 간도지방(두만강, 압록강 대안)은 대한제국시대에 우리 교민들이 많이 이주하여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곳으로 독립운동기지로서 적당한 곳이었다.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대종교를 신봉하던 열렬한 국수주의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간도를 독립기지로 하여 장차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인 만주를 되찿아 대조선을 세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많은 교육기관.군사기관.산업시설을 설치하였으며, 무력에 의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했다. 말하자면 한말의 의병전쟁을 계승하고 있었다.

 

대종교인들이 세운 독립운동기지로서 유명한 것은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 등이 서간도(유하현) 삼보현에 세운에 세운 경학사라는 자치기관이며 이를 모체로 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가 설치되었다. 그 뒤 경학사는 부민회.한족회로 발전하여 서간도의 주요 항일단체로 커 나갔고, 신흥학교 졸업생 가눙데 일부는 장백산으로 들어가 백산농장을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 던체들은 이주 동포들의 경제적 이익 향상.반일 민족의식 고취. 군사교육을 통해 서간도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 KBS 역사스페셜 :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제 1부 잊혀진 무장독립전쟁기지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제 2부 만주벌 이름 없는 독립전사들

 

 

북간도에서는 1906년 서진서숙 등이 항일교육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용정촌과 명동촌에서는 1909년부터 간민회.중관단 등의 단체가 생겨나 독립ㅇ누동의 싹을 틔웠다. 간민회는 교육.선전으로 인재를 양성했고, 옛 의병들을 모아 조직한 중관단은 무장활동을 하려 했다. 그러나 무기와 자금이 모자라 주변 지역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또 대종교 세력이 만든 학교와 포교당, 명동학교 등의 여러 교육기관에서는 민족의식을 높이는 교육을 했다. 이 밖에 북만주의 소.만 국경 지역인 밀산부의 한흥동도 주요한 독립군 근거지였다.

 

이밖에 윤세복(대종교 3세 교주)이 환인지방에 세운 동창학교(1911)에는 신채호.박은식 등 저명한 역사가들이 참여하여 여러 가지 위인전기를 편찬하여 교재로 사용하였으며, 김교현(대종교 2세 교주)이 지은 <신단실기>(1914).<신단민사>(1914) 등의 역사서도 재만교포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이 곳에서는 역사교육과 군사교육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재만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12월에 39명의 대표가 모여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를 발표하여 무력항쟁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연해주지방에는 이미 병합을 앞두고 의병항쟁이 활발히 벌어진 곳이었다. 국내에서 운동기반을 잃은 뒤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긴 유인석.홍범도 등은 간도관리사로 활동하던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1908년부터 국내 진공작전을 벌여 한.만국경의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 1911년 망명항일 인사들과 연해주 조선인 교포들은 '권업회'를 조직했다. 권업회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삼아 노령 조선인 사회의 경제이익 증진과 민족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을 했다. 이 단체는 1914년 이상설.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광복군정부'를 만들어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이 조직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제와 손을 잡은 제정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아 그해 9월 권업회와 함께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1905년에 한국인 자치기관인 '한민회'가 설치되었고, <해조신문>의 발행 등 언론활동과 한민학교(1909)를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도 활발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이상설.이동휘 등이 블라디보스톡에 '대한광복군정부'(1914)라는 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또 이상설은 만주 용정에 '서진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웠다. 또한 1917년에는 '대한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이밖에도 연해주에는 권업회(이상설).대한청년교육회.공공회.대한민공제회.철혈단 등 많은 단체들이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1918년 이동휘.박애 등은 바라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이 단체는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된다.

 

한편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편리한 상해도 해외독립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1921년 대종교의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는 대표적인 단체였다. 신규식은 신해혁명(1911)에도 참여하여 국민당 인사들과 친교가 많았는데, 그들 인사들 및 북경의 이상설 등과 연합하여 동제사를 '신아동제사'로 개편하고, 1915년에는 박은식과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진단>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외교적 활약은 뒷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상해의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1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미주.일본.멕시코 등지에서도 이주 조선인을 중심으로 항일단체들이 생겨났다. 미주 지역은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노동이민이 시작되어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한인 사회의 주요 단체인 하와이의 '협성협회', 미주의 '공립협회', '대동보국회' 등은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되었다. 조선 독립과 민주공화제 국가 건설을 내세운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북미.하와이. 시베리아.만주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었다.

 

그러나 국민회는 중앙총회와 지방총회가 제대로 연결되지 못했고, 독립전쟁을 지향하는 세력(박용만), 실력양성 세력(안창호), 외교를 통한 독립청원을 지향하는 세력(이승만) 등 내부의 운동노선 차이로 분열되어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햇다. 박용만은 하와이국민회 지방총회에서 활동하면서 1914년 6월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여 800여 명의 청장년에게 군사훈련을 했다. 멕시코에서도 '승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미국에서의 민족운동은 한국교민이 많아 거주하는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1903년에 '신민회', 1907년에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는 등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한편 미국 본토에서도 역시 한국교민이 있는 센프란시스코가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1905) 등이 조직되었는데, 교민 장인환.전명운이 스티브를 사살한 사건(1908)을 계기로 재미한국인의 단결이 공고해져 1909년에 하와이교민과 본토교민이 연합하여 '국민회'(뒤에' 대한인국민회로' 개칭)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심인물은 박용만.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 대학과 허버드 대학(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1910),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44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한편, 신민회의 회원이던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흥사단'(1913)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재미교포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군인양성과 외교활동에 역점을 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서는 젊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아동맹회'.'학우회'.'조선학회'와 같은 합법.비합법 단체를 조직했다. 동아동맹회는 국권을 회복하려는 비밀결사였으며, 합법적인 친목단체인 학우회는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여 동포들과 유학생에게 반일의식을 심는 데 힘썼다. 조선학회는 겉으로는 문화단체였으나 웅변대회 등 대중집회를 열어 유학생들에게 정치적인 계몽사업을 벌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점차 독립운동의 기운이 일어났다. 최팔용이 중심이 된 '조선청년독립당'은 해외의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러시아혁명에 고무되어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은 국내의 3.1운동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10년대 나라 밖 '민족해방운동의 방침'은 '독립전쟁론'이 많았다. 특히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일어난 독립기지 건설운동은 1920년대 무장투쟁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 단체들은 독립전쟁론과 실력양성론을 결합하여 독립을 준비했지만 일부 단체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복벽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