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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85 : 일제강점기 30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한국의 역사 985 : 일제강점기 30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민족 저항의 시대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강우규 거사날, 민중 습격 두려워 총독부 건물 소등하다'

 

 

3.1운동이란 일격을 당한 일제는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과연 계속 한국을 통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의구심이 일었다. 문제는 문관총독 대신 해군대장 출신 사이토를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그의 부임길에서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의 폭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1919년 8월 칙령으로 "조선 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으로 임용할 수 있다"고 바꾸고서도 3대 조선 총독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했다. 여전히 한국을 군사점령지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사이토는 1906년 해군중장 때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해군대신에 임명된 데 이어 1921년에 해군대장으로 진급하는데, 1914년 야마모토 내각까지 5개 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재직했다. 그는 1914년 4월 '지멘스 사건'이란 암초를 만난다. 독일 지멘스 사는 군함 '금강함'을 수주하기 위해 해군 요로에 뇌물을 뿌렸다. 그러자 지멘스의 독일인 직원이 이 서류를 가지고 도쿄 지점장에게 돈을 뜯으려다 실패하자 로이터통신 특파원에게 이 정보를 팔았다. 그로 인해 그는 독일에서 공갈미수죄로 기소되었다.

 

 당시 해군 예산 증액에 비판적이었던 일본 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야당인 입헌동지회.입헌국민당.중정회는 내각 탄핵 결의안을 상정했다. 2월 10일 히비야공원에서 내각 탄핵 국민대회 개최 도중 164대 205표로 탄핵안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민중이 의사당으로 포위하고 구내로 들어가 경찰과 충돌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기는 햇지만, 영국 비커스사의 일본 대리점인 미쓰이물산이 해군중장 마쓰모토에게 40만 엔의 뇌물을 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야먀모토 내각은 1914년 3월 24일 무너졌다. 그 뒤를 이은 오쿠마 내각은 해군 숙정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해군대장 신분의 전 총리 야마모토와 사이토의 군복을 벗게 했다. 이로써 사이토의 정치 인생은 끝나는 듯했지만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행정.치안을 담당하는 부총관 격의 정무총감에는 동경제대 법학과 출신의 미즈노 렌타로가 임명됐다. 1919년 8월 12일 도쿄에서 신임 총독.정무총감 취임식을 치렀는데, 이때 사이토에게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3.1운동 이후에 일본 안팎에서 "일본이 한국을 계속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사이토와 미즈노는 신문기자들은 물론 추밀원.내각.법제국.척식국.대장성.내무성.육해군성 등 한국 지배와 관련이 있는 기관의 인사들과 잇따라 초대회를 열었고 사카타니.요시노 같은  조선 문제 전문가들의 의견도 경청했다.

 

8월 25일 하라 다카시 총리가 베푸는 만찬회가 있었다. 드디어 28일 사이토는 정무총감 미즈노, 경무국장(경찰총수) 노구치, 식산국장 나시무라, 비서관 모리야 등 20여 명의 일행과 함께 도쿄를 출발했다. 마치 전선이라도 가는 듯 수백 명이 역으로 나왔다. <삼천리> 1936년 11월호는 '남대문 역두일기'라는 사이토 부임 수기를 싣고 있는데, 교토로 가는 도중 이세산전에서 1박했다. 일본 왕실의 시조신인 야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이세신궁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사이토 일행과 함께했던 야마가미는 "조선 통치를 위해 지성을 경주할 것을 신 앞에 맹세하겠다"라는 뜻이라고 전한다.

 

교토로 가는 기차 안에서 미즈노 총감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 신심마져 감동하게 이루어 간다면 어찌 백성들이 복종하며 따라오지 않으리"라는 시가를 읆조렸다. 이에 아카이케는 "오랜 역사 속에서 거칠대로 거칠어진 고려 황야를 이침 햇살 눈부시는 국가로 성장시키리. 풍랑이 아무리 거칠게 밀어닥친다 해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고려 백성들(......) 조선에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줄 위업을 이루리"라는 시로 화답했다.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일본 국우파들의 정신병자 같은 의식 수준을 잘 보여주는 시구다.

 

교토 택문에 도착한 일행은 "조선의 형세가 아주 심각하고, 총독 암살 계획이 세상 풍문으로 들려오고 있으며, 각지에서 소요가 발발할 우려가 있다"는 서울발 전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사이토는 도조 해군 대좌와 후쿠토리 주우치를 먼저 한국으로 보냈다. 사이토는 8월 30일 일왕 메이지의 교토 모모야마릉을 참배하고 오사카 호텔에 투숙했다.

 

이곳에서 총독부 경무국장 노구치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경찰 총수가 급사하자 사이토 일행의 사기는 다시 꺽였다. 8월 31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는데, 새로 경무국장을 맡게된 아카이케가 배 안에서 경무관계자들과 조선 치안 방책을 논의했다. 아카이케는 "모두가 예상보다 형세가 훨씬 열악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회고했다.

 

부산.대구.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총독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란 정보가 전해지면서 사이토는 9월 2일 오전 7시에 부산을 출발하기로 했던 시간을 전격적으로 바꾸고 무장군대까지 탑승시켰다. 순종이 보낸 이왕직의 사무관 엄주승과 총독부 고쿠분, 조선 귀족 대표 이완용이 함께 탑승해 서울로 향했다. 야마가미는 이때 사이도가 수원에서 해군대장 군복으로 갈아입었다고 전한다. 문관총독 따위는 없다는 시위였다.

 

이날 오후 5시쯤 특별열차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찰하자 총독부 관리들과 조선 귀족, 이왕직의 직원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예포 17발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사이토와 미즈노가 마차로 바꿔 타고 출발한 직후 갑자기 폭발 소리가 들렸다. 예포가 계속되는지 의아해하는 와중에 갑자기 "폭탄이다!"라는 외침이 터져나오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라다 육군소장, 고무다 혼마치 경찰서장, 구보 만주철도 이사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이토의 뒤를 따라 도주하던 미즈노 총감마차의 마부도 파편에 맞았다. 미즈노는 "언덕 아래 문 앞에서 내려 도보로 관저까지 도보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카이케는 "경찰의 신용은 떨어지고, 인원도 부족했고,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며 "폭탄 투하 소문이 있었음에도 직접 뛰어들어 조사할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고 파탄에 달한 치안 상태를 전해준다.

 

아카이케는 "사방이 어두워졌는데도 총독부에서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점등을 금하고 있었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민중의 습격이 두려워 총독부의 불도 켜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카이케가 "폭탄 소동은 의외라면 의외였고, 예상이라 하면 예상했던대로였지만 이 사건으로 우리들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고 전하는 것처럼 일행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카이케는 다음 날인 9월 3일 "경성에 있는 대부분의 상가가 정치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철시했다"고 전한다. 또 "감옥 내에서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고, 이전까지 친밀했던 사람조차 일본인과 소식이나 왕래가 끊어졌다. 민족자결, 조선독립, 조선지치라는 말이 왕왕 제창되었다'고 전한다.

 

일본 경찰은 폭탄 투척 범인을 검거할 단서도 찿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었는데, 거사 보름 뒤인 9월 17일 친일 경찰 김태석이 서울 누하동 임재회의 집에서 64세의 노인 강우규 의사를 체포함으로써 무너져가던 일본 경찰의 체면을 살렸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역사가 김승학은 <한국독립사>에서 강 의사가 재거사를 준비하다가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조선독립운동비사>등에 따르면 평안도 덕천 출신의 이소교(기독교) 신도 강의규는 북간도로 이주해 교육 사업을 전개하다가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입해 블라디보스톡와 원산항을 거쳐 기차로 8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강우규는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폭탄을 선물로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가 부역배 김태석에게 체포된 것이다.

 

1920년 4월 27일 재판장 와타나베를 비롯해 5명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고등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강우규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 아들 중건이 종로로 뛰쳐나가 격렬한 항의 연설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일제는 1920년 11월 4일 '형사지 신취체법'이란 히한한 법률을 만들어 사형당한 자나 복역 중 사망자에 대해서 일체의 제사나 추도를 금지하는 법인데, <개벽> 7호(1921년 1월호)는 '경신년의 거둠'이란 기사에서 "강우규의 사형 집행을 위한 일종의 준비였다"고 제정 이유를 설명했다.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 당일 그는 의연히 성경을 탐독하면서 태연자약했다고 전한다.

 

아래는 그가 남긴 마지막 유서이다.

 

"동포들은 내 용모를 더듬거릴 수 없겠지만

 하늘이 내린 충렬 뼈에 새겼네

 죽음과 삶의 자취 지금 다시 찿아보니

 낙원에는 이미 의사림이 활짝 열렸네"         

                                           - 강우규 - 

 

 

왈우 강우규 의사 생애

 

 

 

왈우 강우규(1855~1920.11.29)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북도 덕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한 후에는 한약방을 차리고 한의사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동휘 선생과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의사는 이미 50 중반의 나이였으나 가산을 정리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의논합니다.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신한촌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됩니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고 그즈음 연해주로 가서 대한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강의사는 나이가 든 노인들도 독립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강의사는 그해 6월 25일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노인동맹단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독립 청원서 제출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회유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우기 위해 새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를 부임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 강의사는 자신이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러시안인으로부터 폭탄 하나를 구입합니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에 잠입한 강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인파들과 삼엄한 경계속에서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려는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 64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안중근 20살, 윤봉길 24살, 이봉창 32살. 1960년 통계청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가 51.1세, 여자가 53.7세였으니 1919년 당시 환갑을 넘긴 64세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총독 암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9월 9일 LA TIMES에 실린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거

 

 

 

강의사는 현장에서 몸을 피했으나 9월 17일 도피 15일 후에 가희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독립운동 탄압으로 유명한 악질 일제 고등계 형사인 김태석에게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강의사는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종일관 당당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강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변호사를 선임하자는 아들의 부탁에도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그의 유언에도 알 수 있듯이 강의사는 못다한 조선청년들의 교육을 아쉬워했습니다. 혼란한 시대속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조국의 미래인 청년들에게 일깨움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형 집행 전 간수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강의사는 짧은 시 한편을 남깁니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죄인들이 쓰던 용수를 쓰고 재판정에 출두하는 강우규 의사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운명을 마감합니다. 정부에서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구 서울역사 입구에 있는 강우규 의사 의거 기념 표지석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