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가을 8 : 깊어가는 가을밤에......

 

 

강남의 가을 8 : 깊어가는 가을밤에......

 

                                 

 

 

                                                                  우면산의 가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지난번 우면산에 밤도 주울겸 해서 올라갔다. 밤송이는 아직 제대로 벌어지 않았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얼마간 주웠으나 대략 일주일 뒤면 제법 밤송이가 많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주를 기약하고 한 번 정도 삶아 먹을 정도만 주워서 둘레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여름 내내 마음껏 잎을 피웠던 초목들이 가을을 맞이하여 열매를 맺으면서 마지막 삶을 불태우는 모습이다. 그런데 며칠 후 산에서 밤을 주우면 벌금을 내게 된다는 뉴스를 보았고 그래서 산짐승을 위해서 밤 줍기는 포기하고 말았다. 야생 다람쥐나 청살모들이 배불리 잘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니 미련은 없다. 그런데 우면산의 밤은 내가 좁기도 전에 나이든 전문가들이 구석구석을 누비며 싹쓸이 해가는 곳이라 야생 동물들도 마음껏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며칠전에는 뉴스에서 한강 일대 자전거 코스를 소개하면서 맛집도 소개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는데, 주말이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먹는 맛집들을 소개했다. 칼국수집, 장터국수집 등등이 소개되면서 자전거 타고 온 중년 나이의 남여 커플과 인터뷰는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각자 자전거가 천만원이 넘는 자전거라고 소개했다. 보기에는 별로였는데 아마 가볍고 잘나가는 외제자전거 같았다. 기타 자전거 전용옷, 헬멧 등 장구까지 포함하면 3천만 원 가까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며 자랑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아마 여유있는 사람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어떻게 번 돈인지 몰라도 힘들게 번 돈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돈자랑하는 것 같아 미쳐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 배가 아팠다. 난 다 합쳐도 30만원도 안되는 자전거와 장비를 갖추고 타는데 비교가 되질 못하니 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 자신도 돈이 필요없는 수양된 사람이 되지 못하니 상대적 박탈감에 기분이 별로였다. 

 

 

 

   

 

 

자전거 사고

 

동아일보에 의하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면서 ‘난폭 운전’ 사고도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17일 입수한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특히 자전거 운전자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인 사고가 2005년 929건에서 2012년에는 3547건으로 약 4배로 늘었다. 올해는 1월부터 9월까지 3270건으로 2012년 같은 기간의 2733건보다 537건이 늘었다.

 

주말마다 서울 한강시민공원에서 조깅을 즐기는 직장인 구모 씨(30)는 지난달 말 뒤에서 갑자기 달려온 자전거에 치여 오른쪽 종아리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 후에도 종종 보행자전용로를 침범해 달리는 일부 몰지각한 ‘자전거족’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올 4월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군자동의 한 도로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대학생 문모 씨(24)가 건널목을 건너던 이모 씨(59·여)를 치었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이 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일주일여 만에 숨졌다. 문 씨는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일반적으로 자전거가 일으키는 사고는 자동차나 오토바이 사고에 비해 가볍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사상자 규모가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자전거에 치여 숨진 사람은 101명, 다친 사람은 3680명이다. ‘사람 잡는 난폭 자전거’다.

자전거와 관련된 안전사고 건수는 2005년 7976건에서 2012년 1만3252건으로 약 2배로 늘었다. 올해는 1월부터 9월까지 1만668건이 일어나 2012년 같은 기간(1만293건)보다 늘었다.

자전거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난폭 자전거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말마다 서울 서초 잠원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즐겨 타는 주부 장모 씨(45)는 “너무 빨리 달리면서 갑자기 추월하는 자전거 운전자들 때문에 무서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장 씨는 “사이클 선수처럼 선수복을 갖춰 입고 무리지어 이동하는 자전거들이 천천히 가는 자전거 운전자를 위협하듯 달리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라며 “빨리 가라고 뒤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경적을 울려대 깜짝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난폭 자전거족으로 인한 피해는 늘고 있지만 막상 사고가 나면 사고 처리와 보상 과정은 막막하다. 제대로 된 자전거보험이 없다.안전행정부 자전거정책과 관계자는 “국내 자전거 이용자는 약 1000만 명에 달하지만 그중 자전거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0.3%(3만 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결국 사고가 터지면 합의나 법정소송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경찰 관계자는 “도로교통법상 자전거는 ‘차마’이므로 인도에서 사람을 치어 다치거나 숨지게 하면 11대 중과실로 분류된다”며 “이를 모르는 시민이 많다”고 말했다. 우충일 한국자전거단체협의회 사무국장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을 시청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단속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이 발의한 ‘자전거 음주 운전’을 처벌하는 법안은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자전거 사고를 막기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규정해 놨다. 예를 들어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물건을 든 채로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등의 조항을 두어 장비와 운전자의 자세까지 꼼꼼하게 통제하고 있다.

 

자전거 타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우리나라 자전거 정책은 증가에 따르지 못하는 생색내기에 그치고 있는 듯하다. 시내주행은 목숨을 걸고 타야한다.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주차된 차량, 방치된 물건, 임시 주자장으로 방치되고 있고 도로는 굴곡, 웅덩이, 턱 등이 산재하여 노면이 극히 불량하다. 안전모를 쓰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거의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자전거 보험도 몇 개 보험사에서 내놓고 있지만 대인.대물보상 등 제대로 된 것이 없고 보험사에서는 수익이 없다고 있던 것도 폐지하고 있다. 음주자전거, 과속자전거, 자전거 절도, 자전거 유통구조, 자전거 정비업체, 자전거 전용도로, 자전거 사고 방지 및 안전대책, 자전거용 부품과 부수 장비 판매 점포 분포 등 자전거 관련 환경과 법규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실정이다. 

 

 

 

 

사회적 갈등구조로 멍드는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를 꺼려한다. 잘 살지도 못 살지도 않는 평범한 삶이지만 나와 다르면 통상 비난하거나 비하하기 마련일 것이다. 나보다 잘살면 상대적 박탈감에 비난하게 되고 나보다 못 살면 깔보고 비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가정사를 너무 밝히는 것도 호기심과 궁금증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인터넷 상에 달리는 수많은 덧글들이 모두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비하의 글이 대부분이다. 옛날부터 사람은 가족단위, 부족단위로 무리를 이루어 집단적인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모두가 생김새가 비슷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비슷하기 마련이고 관습과 풍습이 같은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그런데 지신들과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모두가 따돌리고 조롱하며 욕하고 폭행까지 서슴치 않는다. 왜 그렇까? 그것은 바로 집단동류의식과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이런 집단동류의식은 마을, 사회  더 나아가 민족공동체를 이루었고 역사가 깊을수록 그런 의식은 더욱 강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구분하여 파벌을 나누는 나쁜 습성이 강하다. 조선 오백년 동안 당쟁으로 인한 권력투쟁이 잘 보여주듯이 오늘날에는 지역.집단이기주의까지 가미되어 확산되면서 국가 공공사업까지도 지리한 논쟁과 저항을 불러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갈등지수로 나타나며 최근에는 사회적 갈등지수가 확산일로에 있다. 어느 사회나 사회적 갈등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도덕성과 불온세력이 그러한 갈등지수를 부추기고 가진자들의 탐욕이 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 비용

 

최근 한 연구소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갈등지수는 수천 년간 종교와 인종 갈등을 겪어온 터키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라 한다. 갈등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회적 갈등에 따른 경제적 비용은 적게는 연간 82조원에서 최대 246조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런데 갈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에만 머물러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21%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니 한국이 갈등의 교훈을 배우기 위해 내는 수업료가 얼마나 비싼지 짐작할 수 있다.

지난 4월 말 국무조정실에서는 범정부적 갈등관리를 지원·조정하기 위해 ‘갈등점검협의회’를 신설하고, 69개 주요 갈등과제를 선별했다. 대표적으로 수도권 쓰레기 매립장, 태안반도 기름 유출 피해보상,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을 꼽을 수 있고 담뱃값 인상, 군 가산점제 도입 등 특정 수요층이나 계층을 둘러싼 잠재적 갈등과제도 포함하고 있다. 소위 ‘전국 갈등 지도’를 그려보면 15개 시·도에 최소 51곳의 자치단체, 즉 전국 4분의 1가량이 직접적 갈등에 휩싸여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의 높은 갈등지수보다 더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갈등의 장기화’다. 고질적인 갈등을 야기하는 주된 요인은 정치적 쟁점과 시민단체의 개입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적 갈등에 정치적 쟁점이 결합되면 갈등은 증폭되는 양상을 띤다. 시민단체 개입도 갈등의 장기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8년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의 분석 결과 시민단체가 제3자로 갈등에 개입했을 경우 215일, 이해당사자일 경우 596일로 분쟁기간이 길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시민단체의 개입이 무조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당사자의 훌륭한 자문자로서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제 역할을 수행할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밀양 송전선로 공사도 5135억원이 투입된 국가기반사업이고, 그 목적 또한 ‘안정적인 전력공급’이라는 명백한 공공성에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탈핵, 탈원전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수차례 공사가 중단되기를 반복했다.

이달 초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재개됐지만 시민단체는 여전히 공사 중단을 외치고 있다. 시민단체는 하루빨리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 공공분쟁 해결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그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밀양 주민도 제3세력이 건네준 반대의 깃발을 내리고 스스로 갈등 해결을 위한 대화 노력에 나서야 한다.

 

 

 

 

 

고대 카르타고와 로마제국의 패권경쟁

고대 로마제국은 지중해 일대인 그리스, 중동, 스페인, 북아프리카, 이집트, 팔레스타인 반도 등을 포하하여 유럽, 영국까지 지배하며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강대국이었다. 로마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기전 당시 지중해 무역 최강국이었던 카르타고와 200년 가까이 벌인 1,2, 3차 포에니 전쟁이 전환점이 되었다. 최강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로마제국은 주변 도시국가와 인접한 나라를 정복하면서 로마연합체을 만들어 주변국의 인명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면서 로마군을 강세계 최강의 군대로 양성하였다. 로마제국은 한마디로 열린사회였으며 로마 시민이 되면 누구나 평등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최고 집정관도 로마군에서 일정한 경력을 쌓게 되면 절차에 따라 선거로 선출되었고 집정관은 전쟁시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게 되어 있었다.

 

카르타고와 전쟁은 시실리 섬 지배를 두고 대결하게 되는 데 시실리 섬 그리스 도시국가가 카르타고의 침공에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실리아 섬 일대에서 벌어진 육지전과 해전이다. 지리한 육지전이 전개되었고 당시 로마는 열세였던 해군력으로 당시 세계 최강의 카르타고 해군과 맞붙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절치부심하여 로마연합의 전력을 최대한 통합 발휘하면서 육전과 해전에서 경이적인 승리를 일구게 되어 승리로 장식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베리아 반도 식민지를 통치하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9만의 대군을 이끌고 프랑스 남부 밀림지대와 론 강을 건너 천혜의 겨울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한니발 전쟁이 시작된다. 밀림지대와 론강, 알프스를 넘어면서 한니발은 군대의 태반을 잃었고,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 일대의 갈리아족을 회유하여 용병으로 병력을 보충하여 약 5만 군대로 재편성했다. 한니발의 목표는 오직 한가지, 로마제국의 괴멸이었다. 그후 한니발은 장장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로마군을 무찔렀고,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칸내전투'에서는 5만의 용병으로 구성된 한니발군은 로마군 7만 명을 괴멸시키는 등 로마를 공포에 떨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자 로마군은 한니발군과 정면승부를 피하면서 꼬리를 물고 추격하는 지구전을 전개하였고 언제 한니발 군이 로마 시내를 공략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니발과 전투에서 죽은 로마 집정관만 10여 명, 군대를 10만 이상을 헤아렸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 한니발 본거지를 공격하여 전승을 구가한 로마군의 젊은 장수 스키피오가 새집정관에 당선되면서 그는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방법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치는 방법뿐이라고 원로원을 설득하지만 원로원은 그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자력으로 시실리 섬에서 군대를 양성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 권한을 위임받아 전쟁을 준비하여 수년 후 4만의 로마군을 이끌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로마군의 불시 침공을 받자 급거 한니발 장군을 본국으로 소집하게 된다. 이에 한니발은 정예병 1만 5천만 거느리고 배를 타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카르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니발의 마지막 전투, '자마회전'

카르타고에 도착한 한니발은 자신이 대리고 온 1만 5천의 정예병과 동생 마네고의 1만 병력, 기타 용병 및 지원병, 코끼리 80마리로 구성된 총 5만여 명의 병력으로 스키피오의 4만 로마군과 추격전을 벌인 끝에 북아프리카 '자마평원'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이게 된다. 

 

이탈리아를 떠나 한니발이 카르타고 남쪽 '하드로메툼'(오늘날 튀니지 수스)에 상륙하여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이 소식을 들은 카르타고는 로마와 강화회담에서 갑자기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스키피오'의 강화제의와 보급선 반환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니발과 일전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드루메툼'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한니발은 '제노바'에서 철수하다 죽은 동생 '마고네' 군대 1만명이 합류했다.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기원전 202년. 한니발 휘하에는 보병 4만 6천, 기병 4천 그리고 코끼리 80마리가 집결했다. 모국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은 한니발은 인접국 '시팍스' 왕의 아들과 협상하였으며 그가 2천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합류하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과 일전을 준비하면서 기병전력의 보강을 위하여 친구인 '누미디아'의 '마사니사' 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마시니사'는 보병 6천, 기병 4천명을 거느리고 참전하겠다고 통보가 왔다.

 

기원전 202년은 양쪽 군대가 지원군을 기다리며 '누미디아' 국경근처 가까이로 서로 이동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행군속도를 빨리하여 누미디아 지원군이 한니발에게 차단되지 않도록 서둘렀다. 고대 명장 열명을 꼽으라면 두 장수가 들어간다. 그러나 다섯명을 꼽으라 쳐도 두 장수는 포함된다. 두 명장끼리 전투는 곧 전개될 '자마전투'가 유일무일한 전투였다.

 

'자마'에 도착한 한니발은 로마군이 서북쪽 100키로미터쯤 떨어진 '나라가라'에 있다는 것을 정찰대를 통하여 알았다. 한니발이 사방에 보낸 척후병 중 세명이 로마군에 잡혔다. '스키피오'는 그들에게 로마진영을 마음껏 둘러보도록 한 사흘 후 그들을 환송하여 돌려 보냈다. 자마로 돌아온 척후병은 모든 사실을 한니발에게 보고하면서 '스키피오' 장군의 언행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한니발은 그 보고를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보고가 끝나자 한니발은 무언가 한참 생각하더니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제의하는 사절을 보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회담 제의를 수락하고 시간과 장소는 자신이 정하여 별도 통지하겠다고 사절에게 말했다.

 

자마평원에서 양군이 6키로미터쯤 서로 접근 되었을때 양군은 각각 그 자리에서 각자의 진영을 구축하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중간지점의 낮은 언덕에서 다음날 정오경 회담을 하자고 제의하여 양군 사령관은 각각 한무리의 기병대만 대동하고  회담장소인 언덕에서 만났다. 12살 아래의 창의력과 재능으로 뭉쳐진 젊은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과 로마인에게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비슷한 재능을 가진 장군끼리 대결도 드문데, 하물며 두 사령관이 대회전 전날 회담을 하는 것은 역사상  그 유래를 찿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한니발을 동행한 두 명의 기록 담당자가 쓴 것과 그 당시 로마 원로원이었던 '픽토르'의 '전쟁기'를 참고하였다는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의 저서에 따르면, 이 역사상 보기드문 회담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두 장군이 서로 마주한 상태에서 회담을 제의한 한니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아마 가장 행복한 선택은 로마인이 이탈리아 밖으로 촉수를 뻗지않고, 카르타고인이 아프리카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었을 거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의 다툼거리는 '시칠리아'이고 '샤르데냐'이고 '에스파냐'였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다 지난 일이고 문제는 현재요! 현재 우리는 둘 다 조국의 존망을 걸고 싸우게끔 되었소! 따라서 이 위험한 도박을 피하고 싶으면 양국간의 다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소. 나는 기꺼이 그럴만한 용의가 있소! 운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농락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이요! '스키피오' 장군! 젊은 그대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인지는 모르오. 그대는 에스파냐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오늘 이때까지 패배를 모르고 지냈기 때문에 더더욱 납득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굳이 과거의 역사에서 선례를 찿을 필요도 없소. 오늘날에도 그 좋은 예를 찿을 수 있으니까!

 

'칸나전투' 이후 나는 이탈리아 주인이었소. 수도 로마에 육박한 일까지 있었소. 당시에는 이 한니발이 로마인의 생명과 로마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자였소. 그런데 지금은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로마인인 그대와 함께 카르타고 운명에 관한 회담까지 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소! 이런 나를 교만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현재 상황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있고 좋은 것은 더 큰 쪽을 선택하고 나쁜 것은 더 작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유일한 대책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오. 그래서 나는 제안하고 싶소! 로마인은 '시칠리아'와 '샤르데냐','에스파냐' 등 지금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다툼거리가 된 모든 지방의 정식 소유자가 되는 거요. 카르타고인은 이런 지방을 탈환하기 위하여 두번다시 전쟁에 호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겠소. 이런 조건이라면 카르타고는 장래까지 계속되는 안전까지 보장받게 되고 그대와 로마인도 커다란 명예를 얻게 될 거라고 나는 확신하오!"

 

한니발은 진정으로 더 이상 로마와의 싸움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자신이 이곳에서 승리하더래도 얻을 것은 로마군 목숨과 전리품 뿐이나, 만약 자신이 이 전투에서 진다면 카르타고의 운명이 끝나는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스키피오'란 젊은 로마장군에게 풍기는 오랫동안 여러 전장터를 경험한  장수로써 느끼는 어떤 무언의 메세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니발 만이 느낄 수 있는 승패를 내다보는 어떤 영감이랄까? 마음속에는 이미 한니발은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스키피오의 대답이 이어졌다.

 

"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쪽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장군께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신들이 로마인을 도와서 승리로 이끌었다면, 그것은 신들 조차도 누가 잘못했는지를 알고 방어를 위하여 일어선 자를 편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게 분명하오! 만약 로마군이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에 장군께서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면, 그리고 내가 제안한 강화교섭이 결렬되기 전이였다면, 장군의 제안은 장군께서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졌을 거요. 그러나 장군께서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것은 장군의 뜻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소. 아프리카를 침공한 우리 로마군의 전과에 영향을 받아 철수한거요. 장군께서 제시한 강화조건도 우리가 보기에도 당연한 것이오. 게다가 로마에서는 민회까지 승인한 강화를 결렬시킨 것은 카르타고 쪽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주시오. 그런데 나더러 도데체 뭘 어찌라는거요? 장군께서 내 처지라면 어찌하겠소? 장군과 카르타고 정부가 아무리 승복할 수 없다해도, 내가 제시한 강화조건은 바끌 수가 없소. 한니발 장군! 장군께서 내일 전투를 준비하라고 권할 수 밖에 없소. 왜냐하면 카르타고인, 그 중에서도 특히 한니발 장군 그대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사는 데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니까!"

 

두 장군은 각자 헤어져 언덕을 내려왔다. 역사상 유명한 '자바전투'는 이튼날 아침에 결행될 예정이었다. 이번 전투는 카르타고와 로마, 5만의 병력과 4만의 병력이 맞붙는 대회전인 동시에 전쟁의 행방을 결정하지 못한 '칸나전투'와는 달리 '자마전투'는 전장의 행방을 결정짖는 동시에 지중해 세계 전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싸움이 되었다.

 

기원전 202년.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자마'와 '나라가라'의 중간에 펼쳐진 평원 전체에 양군이 포진했다.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6천명, 기병 4천명 도합 5만명에다 코끼리 80마리가 가세하고 있었다. '누미디아'의 전 왕인 '시팍스'의 아들이 기병 2천명을 데리고 오기로 했으나 도착하지 않았다.

 

한편 로마군은 '스키피오'가 총지휘를 맡고, 친구인 '라일리우스'가 좌익 기병을, 의형제인 '누미디아'의 '마사니사' 왕이 우익 기병을 맡아 보병 3만4천명, 기병 6천명으로 도합 4만명 규모였다.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카르타고군이 11:1인 반면 로마군은 6:1이었다. 병력 구성비가 이탈리아 반도와는 정반대였다. 한니발이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모를리는 없었다. 그는 평범한 장군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진형을 펼치고, 그것으로 승리를 거두려고 생각했다.

 

한니발은 선두에 80마리의 코끼리를 배치했다. 두번째 대열에는 1만 2천명의 용병 혼성군을, 세번째 대열에는 소수의 카르타고 시민병과 아프리카, 마케도니아 용병 등 1만 9천명의 보병을 배치하였다. 한니발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1만 5천명의 정예병력을 본대에서 200미터 후방에 배치했다.

 

 

 

로마군의 전투 한 장면

 

 

한니발의 작전은 이러했다.

우선 80마리의 코끼리떼를 돌격시켜 적진 중앙의 로마군 보병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런 다음 재빨리 둘째와 세째 대열의 용병대를 투입한다. 이 단계에서 양군의 전투력은 카르타고군이 3만 1천명인 반면 로마군은 3만 4천명이다. 싸움은 비록 로마군쪽이 우세하게 전개되더 래도 얼마 동안은 카르타고군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주력 중무장 보병대가 지치기를 기다린 다음 후위에 대기하고 있던 원기 왕성하고 전투경험도 많은 1만 5천명의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승리를 굳힌다는 작전이었다. 기병대가 열세하더래도 보병대의 양옆에서 떠나지 않고 버텨 주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로마군 장군들이었다면 이 전술은 성공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로마인이면서도 로마인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항상 로마인의 허를 찌르는 전술을 구사하였지만, '스키피오'는 그동안 세 번이나 한니발 군과 전투에 참가하여 패전한 경험이 있는 지라 한니발의 전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실리 섬에서 한니발의 코끼리와 기병을 이용한 양익포위 전술을 무너뜨리기 위해 절치부심 전술을 연구한 결과 주어진 조건을 독창적으로 이용하여 로마군이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한니발은 코끼리 떼가 최소한으로 로마군 보병대의 전열을 흩어려 주기를 기대하였으며, 또한 기병대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전장터에서 지휘관은 항상 전체 전장을 살피면서 자신이 기대했던 대로 전투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우발계획을 미리 세워 놓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니발은 패배를 해 본적이 없는 장군이다. 자신의 계획대로 항상 로마군이 전투를 응해왔고 의도하는 대로 전투는 진행되어 대부분 승리로 이어졌다. 자만심으로 가득찬 한니발은 적장인 '스키피오' 장군이 적이 생각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장군이라는 점과 창의적이고 시기적절하게 전투력을 구사하는 뛰어난 임기응변술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다는 점과 전술상황을 자신이 생각한대로 진행될 것으로만 낙관하고 있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고정관념과 창의력의 대결, 그리고 역전의 노장과 젊은 청년장군의 대결이었다.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은 전위에서 후위까지 '하스탈리', '프린키데스', '트리알리'의 3열 횡대로 포진하는 것이 정석이나 '스키피오'는 경무장 보병부대를 소대단위로 중무장 보병대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통상 소대별 간격은 두었으나 간격을 두지 않고 적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6천 명의 기병은 우익과 좌익으로 배치하고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에게 각각 지휘를 맡겼다.

 

양군은 포진을 끝내고 사령관들의 훈시가 이어졌다. '스키피오'는

 

" 지금까지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에서 거둔 전과를 병사들에게 상기시키고 우리에게는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고 있으며 오늘의 전투는 강화를 요구해온 적과 싸우는 전투라고 설명했다. 특히 중무장 보병의 주력을 맡은 칸나전투 패배 장병들에게는 그동안의 고생도 오늘로 끝나게 될 것"이라면서 선전을 당부했다.

 

한편 한니발은 용병들은 부하장군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오랜 부하들 한테만 연설했다.

 

" 16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이탈리아 땅에서 어떤 로마군도, 어떤 로마 장군과 싸움을 해도 진 적이 없었다. 오늘 싸우는 적장은 '티치노'와 '트레비아' 전투에서 우리에게 패배한 적장의 아들이고, '칸나'에서 전사한 집정관 사위이다. 오늘도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와 여러분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자!"

 

한니발의 연설은 1만 5천명의 정예중에도 16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고참병 8천명의 가슴에 더욱 강하게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한니발에게 목숨을 걸기로 하였다.

 

싸움은 먼저 로마군의 좌.우익 기병대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도 코끼리 부대의 돌격을 명령했다. 80마리의 코끼리가 달리면서 일으킨 흙먼지가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흙먼지를 날리며 돌진해오는 코끼리 떼가 달려오자 '스키피오'의 명령에 따라 경무장 보병소대가 중무장 보병소대 사이로 파고 들었다. 이리하여 가로횡대의 긴 로마군 전열이 소대별 간격을 형성했다.

 

이 통로가 코끼리의 돌진력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코끼리가 경무장 보병소대가 형성한 간격 사이로 그대로 지나쳤다. 코끼리는 전차와 달리 일단 돌격이 시작되면 도중에 멈추기가 어렵다. 통로를 통과한 코끼리들이 부리는 병사가 간신히 멈추었을때, 경보병 부대가 꽹과리와 나팔로 소음을 내고 투창을 던지고 활을 쏘면서 코끼리를 공격했다. 그 결과 코끼리 떼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도망치거나 사로잡혀 전선에서 완전히 탈락하여 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양군 중앙의 보병대 끼리 접전이 시작됐다.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 2만2천, 누미디아 병사 6천명을 합친 2만 8천명이 한니발 보병3만 1천명과의 접전이었다. 로마의 좌.우익 기병들도 카르타고 기병을 압도하여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무장 보병으로 하여금 카르타고군 좌.우측 빈 공간인 측면을 공격토록 하였다. 3면에서 공격을 당하는 카르타고 용병부대의 전열이 당황하여 후방으로 도망치려 해도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후방에서 칼을 빼들고 독려하고 있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카르타고 혼성 용병부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로 도입한 로마군의 양날검인 '에스파냐 검'이 접근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한니발은 로마 중보병들이 지친 지금이야 말로 정예 주력을 투입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200미터 까지 접근한 카르타고군을 보고 '스키피오'는 보병대에 전열을 다시 짜도록 지시했다. 부상자를 후송하고 적의 시체를 치운 다음 로마군은 중앙이 들어간 활 모양으로 빠른시간내에 진형을 편성했다. 숫적으로 우세한 아군의 잇점을 살리고, 좌.우익 기병이 합류하기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진형이었다. 경무장 보병과 누미디아 보병이 합류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을 때 좌.우익 기병대가 한니발의 기병대를 격파하고 싸움터로 되돌아 왔다. 14년전 '칸나전투'의 재현이었다. 다만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45세의 한니발은 1만 5천의 정예병들이 무참하게 쓰러져 가는 모습을 비통한 심경으로 지켜 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하나 둘 쓰러지면서 모두 전멸했다.

 

카르타고쪽 전사자는 2만명이 훨씬 넘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 일부 카르타고 병사들은 수도 카르타고로 도망쳤다. 한니발도 기병대 수 명만 데리고 '하드로메툼'으로 도망쳤다. 로마쪽 전사자는 1천500명.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니발이 '자마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알렉산드 대왕'이나 '마케도니아'의 '피로소' 왕보다 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그는 자바전투에서 패장이 되었다.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적을 포위섬멸시키는 전술의 효율성을 어쨌던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이 창안한 이러한 전술을 한니발을 상대로 구사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인 중에서도 '루키아노스'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로마인이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 보다 적장인 한니발을 더 뛰어난 장군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 한니발의 불행은 우수한 제자가 적군쪽에서 나타나 버렸다는 것이다.

 

                               

                                                                                           영화 한 장면                                             

 

 

강화조약

카르타고 정부는 '자마전투' 패전 소식에 완전히 당황하여 버렸다. 로마군이 금방이라도 수도 카르타고로 진격해 올 것 같았기 때문에 전 도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때 한니발이 수도로 돌아왔다. 장로회의 석상에서 한니발은 로마와 강화를 맺을 수 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에 카르타고 장로회의도 강화제의에 동의하여 한니발은  '코르넬리우스 진지'에 주둔하고 있는 '스키피오'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두사람이 강화회담 대표로 마주했다. 강화조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독립 동맹국 간주.자치인정 및 존중.카르

    타고에 로마군 기지 건설 및 로마군 주둔 금지

2)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샤르데냐,에스파냐에 대한 기득권 완전포기

3) 마사니사 왕의 누미디아왕국 인정

4) 카르타고는 로마 동맹국에 대한 전쟁 금지

5) 상호 포로 석방

6) 군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군선과 군용 코끼리 로마에 양도

7) 카르타고는 로마의 승인없이 어떠한 국가와도 전쟁금지

8) 강화성립 완료시까지 로마군 군량제공

9) 배상금 1만 탈렌트 50년 분활 상환

10)카르타고 상류층 자제 100명 로마에 인질로 보낼것

 

'자마전투' 이전에 '스키피오'가 제시한 강화조건과 별반 차이가 없으나 7항의 전쟁금지 항목은 '자마패전'의 진정한 결과였다. 이것은 자주적인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10항의 인질은 로마가 패전국에게 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로마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로마의 명문가정에 기거하면서 로마문화와 문명을 배우도록 하여 완전히 로마맨을 만들기 위한 동화정책이며 지지자를 양산하는 방식이다. 특히 조약내용에서 승자와 패자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패전국에 대한 로마의 기본적인 동화정책이다. 배상금도 분할 상환하도록 한 것은 상환기간 동안 조약이행을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한 방책이다. 로마는 16년 동안 치런 희생인 전사자 10만, 10명 이상의 집정관의 죽음, 공포에 떨었던 로마시민 등을 생각하면 카르타고에 대한 너무나 관대한 처분이었다.

 

카르타고 장로회의에서 강화조약에 대한 승인여부 토의시 강화를 반대한 사람은 '스키피오'와의 전투에서 여러차례 패한 이력이 있는 '시스코네'가 반대 연설을 하였는데, 한니발이 듣던 도중에 나가서 '시스코네'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장로회는 아연실색을 하였으나 바로 들어온 한니발이 강경한 어조로 연설했다.

 

"나는 36년 동안 조국 카르타고를 위하여 로마와 전투를 벌이면서 찬바람 눈.비 맞으며 오로지 조국 카르타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다시 로마와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탁상공론만 할게 아니라 지금 강화를 하지 않으면 카르타고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로마와 강화를 하는 길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랄게 없다. 본인은 로마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강화조약만이 카르타고가 살 수 있는 길이다!" 

 

한니발이 회의장을 떠나자 장로회의는 강화조약을 승인했다. 그래서 양국은 강화조약을 승인하고 16년 만에 다시 평화가 찿아왔다.

 

강화성립을 지켜본 '스키피오'는 로마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떠나 시칠리아-메시나-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육로로 '아키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로 귀환하는 도로 연변에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꽃가루를 뿌리고 환호성을 지르며 백마를 타고 지나가는 젊은 개선정군을 영접하였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의미로 '아프리카 누스'란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키피오'에게는 기원전 202년-기원전 201년이 생애 가장 행복한 최고의 1년이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2차 포에니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한니발의 망명과 죽음

자마평원에서 벌어진 스키피오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한 한니발은 결국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로마의 배려 아래 카르타고의 재상이 되어 몇 년간 조국 카르타고를 통치하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소아시아 왕과 로마 타도의 밀약을 추진하다 반대파의 모함과 고변으로 위기가 닥치자 조국을 탈출하여 서아시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는 그후 스키피오 장군과 그곳에서 재차 상면하였으나 비타비아 국가로 망명하여 피신하여 있던 중 공명심에 불탄 로마 장교의 추적을 받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조국 카르타고도 약 50년 후 로마에 반기를 들다 멸망을 길을 가게 된다. 바로 제3차 포에니 전쟁이다.

 

그후 로마제국은 영웅 시이저가 나타나면서 지금의 영국을 포함한 유럽 지역인 갈리아 지역을 시이저에 의해 정벌하면서 도로를 닦고 숙영지를 건설하였는데 바로 오늘날의 대부분의 도로와 도시가 당시에 건설된 곳이다. 정벌지역에는 로마 문화가 전수되었고 융성하던 로마가 점차 권력투쟁과 사치방탕으로 부패해지면서 국력이 나약해지자 이민족들의 침공으로 결국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되지만 남은 동로마 제국은 그후 천여 년을 더 존속하게 된다. 동로마 시절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그리스도교가 유럽 지역에 전파되면서 유럽 지역은 그리스도 왕국들이 건설된다. 로마 교황이 전세계를 통치하는 그야말로 그리스도 대제국을 건설한 것인데 종교적 통치시대인 중세의 암흑기 거치면서 타락하게 되고 그들은 이민족인 이슬람족의 급성장으로 십자군 전쟁 등 패권을 다투다가 지중해와 발칸 반도를 연한 선에서 종교적 국경선을 이루게 되었다.

 

 

 

   

 

 

강대국의 부침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던 중세 암흑기를 지나 중계무역업으로 최강국을 자랑하던 네들란드가 부침하자 이어서 최강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는 바로 영국이었다. 전 세계 식민지 개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임을 자랑하던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상당히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이유도 조선과 러시아 간 밀약설(1884년 조러수호조약)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요즘 ‘외교의 달인’처럼 소개되는 고종은 당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더니 러시아공사로 아관파천(1896년)을 했고, 1904년까지 친러정책을 폈다. 영국 입장에서 역린(逆鱗)이었다.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길 원하지 않았던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 영국이 먼저 1901년 7월 주영 일본공사를 불러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익 보호’는 받아들여졌다.

제1차 영일동맹은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으로 강화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3개월 전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용인받은 것이다. 이 동맹은 비극으로 끝났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함께했던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을 배신했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전을 위협했다.

21세기 최강국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나라는 G2로 떠오른 중국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는 20세기 말에 막을 내렸지만,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팽창은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G2 중국의 등장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올 초부터 아베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받아들인 일명 ‘평화헌법’을 개정해 집단 자위권을 획득하겠다는 입장을 꾸준히 주장했다. ‘보통국가’가 되겠다는 의미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데 평화헌법은 맥아더 장군이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물어 패전국 일본에 부여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잘못된 역사 인식에 기반한 아베 정부의 일본 재무장에 대해 일제에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의 우려와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자신감의 배경은 미국의 지지였다.

한국의 ‘혈맹’ 미국은 한국정부와 국민의 우려, 걱정에 동조하지 않고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미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지난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에서 “미국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포함한 일본의 방위력 증강 구상을 환영한다”고 공동성명을 내 일본의 재무장을 공식화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미국이나 한국 등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반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바 “적극적 평화주의”인 것인데,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군대가 진주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 결과를 두고 우리 정부나 외교부 등은 ‘아차’ 싶겠지만, 이미 깨진 항아리다. 한국인들의 반발을 우려한 우리 정부는 “아니다”라고 반박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보를 강조하는 한국의 보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물론 자녀도 군 복무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정부는 전시작전권도 미국에서 찾아가라고 하는데 연기를 요청했다. 전시작전권 연기와 연계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편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중국에 던져줘 갈등의 소지도 남겼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고, 대처할 수 있는 외교적 능력이 절실한 시기이다. 100여년 전 개항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겪은 어려움을 21세기에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홍콩밍보 ‘한반도 급변사태 대비’ 칼럼

 

“북한 붕괴에 철저히 대비하라.”

홍콩 밍(明)보가 16일 한반도 유사시 인민해방군을 북한에 진주시키라고 중국 정부에 촉구하는 과격한 주장을 담은 전문가 칼럼을 게재했다. 중국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는 인민해방군 북한 진입을 거론한 데다 중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기고자는 량궈량(梁國樑) 홍콩 월간지 징(鏡)보 부편집장. 징보는 중국 지배층의 내부 소식을 종종 보도하는 잡지다. 그는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최근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은 어떠한 전조 없이 갑자기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랜드연구소는 지난달 346쪽에 이르는 ‘북한 붕괴 가능성 대비 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랜드연구소는 1950년 6·25전쟁 때도 중국군의 참전을 정확히 예측한 곳”이라며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지 않으려면 양자가 반드시 사전 협의를 통해 (북한 붕괴와 관련한) 각종 규칙과 대처 방안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량 부편집장은 “최근 난징(南京)군구 전 부사령원(부사령관)의 글처럼 중국은 역사상 한반도에 말려들어 손해를 봤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中예비역 장성, 런민일보 잡지에 기고

“조선반도(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 중앙 정권에 종종 위협이 됐고 심지어 치명적 결과를 불러왔다.”

런민(人民)망 등 중국 언론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비역 장군이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의 잡지 ‘국가인문역사’ 최신호에 기고한 이런 내용의 글을 9일 전재했다. 글의 제목은 ‘조선반도(한반도), 역사적으로 중국의 부담’이다. 글쓴이는 전 난징(南京)군구 부사령원 왕훙광(王洪光) 예비역 중장(64·사진).

그는 중국 역사에서 한반도 문제에 휘말려 중국 중앙정권이 흔들렸던 사례를 간추려 중국 중앙정권이 한반도 문제에 갖는 부담을 설명했다. 나아가 북한 핵문제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한(漢)나라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를 집중 조명했다.

한나라에서 당(唐)나라 때까지 조선반도는 매우 불안정해 대륙 중앙정권에 위협이 됐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수(隋)나라와 당나라의 황제 6명이 9차례에 걸쳐 요동(고구려)과 조선반도를 정벌하러 나섰지만 백성이 급감했고 농민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산둥(山東)의 농민군 우두머리는 ‘무향료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라는 글을 지었는데 “요동에 가면 전쟁으로 죽는데 지금 머리가 잘리면 어떠냐”란 뜻이다. 당나라 황제들은 5차례 출정했으나 전쟁에서 큰 압박을 받았다. 직접 정벌에 당 태종(太宗)이 나섰다가 52세에 죽는 등 조선반도의 전쟁은 큰 부담이었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도 조선반도 문제에 휘말려 무너졌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했다가 국력이 크게 소모되고 국고가 비었다. 조선에 군대를 보낸 황제인 만력제(萬曆帝)는 국고가 비어 황궁의 건물 2채가 화재로 불탔는데도 이를 수리할 자금도 없었다는 것. 임진왜란 파병은 명나라에 치명적 결과를 불러왔다. 청나라 때도 조선 동학농민군의 반란에 군대를 보냈다가 패해 국력이 크게 쇠락하고 중국의 식민지화가 더욱 빨라졌다.

현대에 들어서도 1950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6·25전쟁)’은 갓 건국한 중국에 엄중한 대가를 불러왔다. 이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면서 대만 통일 기회를 놓쳤다. 종전 60년이 지났지만 중국의 한국전 개입은 현재까지 중국의 국가통일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조선반도가 이처럼 역사상 중국에 누를 끼쳤고 현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현재 조선(북한)의 핵 보유 결심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한국군의 북진을 유발해 큰 혼란과 심지어 대규모 내전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한국이 북한을 끌어안을 힘이 없다는 게 주요 근거다. 서독은 동독보다 3배 큰 국토와 4배 많은 인구를 갖고도 통일 후 20년 이상 지나서야 동독을 완전히 ‘소화’했는데 한국은 면적은 북한보다 작고 인구도 2배 정도라는 것. 게다가 남북한 경제수준 차이는 통일 전 동서독보다 커 통일 후 모순도 더 클 것이라고 량 부편집장은 추정했다. 또 북한은 오랜 선군정치로 무장집단인 군인집단이 광범위하게 존재해 내전이 폭발하기 쉬울뿐더러 핵무기까지 있는 국가라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량 부편집장은 “중국은 반드시 주도면밀한 대비책을 세워 북한 붕괴로 인한 핵무기 유실과 난민 발생, 한국의 ‘경거망동’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인민해방군을 훈련시키라고 촉구했다. 상황 발생 시 1개 여단을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투입해 장악하고 두만강 하구를 막아 미국과 일본 잠수함의 침입을 차단하라는 것. 또 다른 1개 여단을 신의주로 진주시켜 난민의 중국 유입을 막고 해병대로 톈진(天津), 산둥(山東) 반도와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인 황해도 장산곶을 점령하라는 주장도 폈다.

한편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NK뉴스’는 북한이 고려항공사의 화물기를 군용기로 위장해 ‘전승절(정전협정 체결일·7월 27일)’ 퍼레이드 행사에 동원했다고 15일 전했다. 최근 러시아 공항에 착륙한 고려항공 화물기 사진을 판독한 결과 꼬리날개 부분에 군용 수송기로 위장하기 위해 사용한 페인트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국군포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공안(公安)에 체포돼 강제 북송된 국군포로 정모 씨(85)가 북한 교화소에서 3년째 복역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 씨는 4년 전 체포 당시에도 얼굴 한쪽이 마비돼 있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고령과 혹독한 수감생활로 인해 영영 귀향(歸鄕)의 한을 풀지 못할 수 있다. 6·25전쟁 때 조국의 부름을 받고 전선(戰線)으로 달려갔다가 60년이 넘도록 고초를 겪고 있는 국군포로를 국가가 모른 체해서야 되겠는가. 정부는 노병의 조속한 귀환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정 씨는 아오지탄광에서 노역을 하다 2009년 8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공안에 붙잡혔다. 중국은 6개월간 정 씨를 억류하다 북한으로 보냈다. 우리 정부는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중국의 비인도적 처사를 막았어야 했다. 국민 보호의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이다.

늙고 병든 노인을 억류하고 있는 것은 북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지레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송환의 길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 북한에 정 씨의 석방을 요구할 명분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정부가 1993년 이인모 씨 송환을 시작으로 2000년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북송한 사실을 북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달 초 국군포로 손동식 씨의 유해가 60년 만에 국내로 봉환됐다. 손 씨는 “유해라도 고향땅에 묻어 달라”는 애통한 유언을 남겼다. 손 씨의 딸은 유해를 중국으로 숨겨 나온 뒤 사단법인 물망초의 도움을 받아 국내로 모셔왔다. 정 씨의 수감 사실도 함께 복역하던 지인이 남한의 대북소식통에게 알려 확인됐다. 정부는 언제까지 이런 일을 민간에만 맡기려는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지난달 탈북 국군포로들을 초청해 “국가가 너무 소홀했고, 대한민국이 비겁했다”며 사과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그제 국정감사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프라이카우프를 비롯한 여러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프라이카우프는 경제적인 대가를 지불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방안이다. 전임 이명박 정부에서도 시도했고 야당까지 지지하고 있다. 국군포로만큼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반드시 모셔 와야 한다. 그게 국가가 할 일이다.

 

   

 

 

 

지자체 매관매직, 민주주의가 뿌리채 썩어가고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지방자치단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지방 공무원들의 줄서기와 선 대기가 고개를 들고 있고, 이를 빌미로 한 매관매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6년 전 ‘5급(사무관) 승진에 5000만원, 4급(서기관) 승진에 7000만원을 상납한다’고 했던 박성철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의 폭로가 안겨주었던 충격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검찰이 최근 승진 인사를 대가로 금품을 받은 혐의로 정종해 전남 보성군수와 부인 등 40여명에 대해 대대적 수사에 나섰다고 하나 각 지역사회에선 매관매직이 비단 이곳만의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앞서 2011년 최병국 전 경북 경산시장이 승진을 대가로 부하직원에게서 8000만원을 받아 구속된 바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 더 많은 매관매직과 인사 비리가 수사 당국의 그물을 피해 전국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각 지자체의 매관매직이 더욱 성행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막대한 선거자금을 끌어모아야 하는 지자체장과 이를 승진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공무원들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수 천만원을 갖다 바치더라도 승진만 하면 정년과 공무원 연금이 부쩍 늘어나게 되니 돈 주고 자리를 사는 게 결코 손해가 아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부패 구조가 이런 비리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굳이 매관매직까지는 아니더라도 선거를 앞두고 새로 줄을 서고 선을 대기 위해 뒷돈을 주고받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힘 센 자리, ‘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함이다.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뒷돈으로 자리를 사거나 줄을 대는 이들이 무엇으로 빈 주머니를 채울지는 뻔한 일이다. 불법·탈법으로 이권을 챙기고, 이를 통해 지방행정을 근본적으로 어지럽히게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다. 선거를 앞둔 지자체장들은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없는 선거제도의 문제점과 막대한 공천 헌금이 드는 현실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어불성설이다. 그것이 불·탈법을 용인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흔들리는 지방자치를 바로잡도록 정부와 사정 당국은 강도 높은 대응에 나서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은?

 

카르타고는 로마타도를 외치며 결연한 의지로 전가족이 동원되어 로마와 전투를 벌였던 위대한 전쟁 영웅 한니발 장군에게 지원은 커녕 사치와 향락에 빠져 한니발의 꿈을 좌절시켰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도 국론은 통일 못하고 무력함에 빠져 있던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장군의 본토 침공에 용병으로 대처했지만 무력하게 무너졌다. 그래서 한니발을 불렀다. 그러나 한니발도 마지막 전투인 자마회전에서 창의성이 넘치는 젊은 로마 장군 스키피오에게 일생일대의 패전을 당하고 조국 카르타고는 로마에 무릎을 끓어야 했다. 시네스코 같은 무능한 장수가 로마와 강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외치다가 한니발에게 멱살까지 잡혀 끌려 나갔다. 힘도 능력도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우리들과 무엇이 다른가?

 

카르타고는 지중해 일대에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였고 5단층 갤러리 함정 등 강력한 해군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모두 용병으로 채용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해군은 로마 연맹 도시로부터 지원받고 선단을 급조하여 편성한 3단층 갤러리 선에 불과한 신생 로마 해군은 까마귀라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카르타고 선단을 공격하였는데, 폼만 잡고 큰소리치던 카르타고 해군은 여지없이 까마귀를 타고 넘어온 로마 중기병에 의해 여지없이 공략당했던 것이다. 카르타고는 대부분의 해군을 잃은 후 1차 강화조약을 맺고 시칠리아를 로마에 양도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군대의 무능력과 안일함, 정부의 부패와 타락, 국론분열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한반도는 아직 전쟁 중이다.

 

그동안 국방력 증강에 최선을 다해온 우리 군대는 믿을 만 한가?

 

아직은 아니다. 정치군인과 진급, 보직에만 신경쓰고 출세에만 신경쓰지 책을 읽지 않는 군인들이며 전략,전술의 대가도 없고 부패와 비리만 연일터지고 있다. 지상,공중, 해상에서 터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떨어지고 침몰하는 군대다. 허위보고와 책임회피에 연연하고 단호함이나 준비된 군대로는 미흡하다. 미국을 믿는다고? 글쎄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언제던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한반도에서 발을 뺀다. 그순간 다른 강대국이 달려든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그러면 정부는 믿을 만한가?

 

역사적으로 무능한 정권의 연속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은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경이적인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만들었다.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 월남 파병, 대일차관 등 젊은이들의 피의 댓가로 이룬 경제발전이었다. 가난에서 탈피하였고 배고픔을 극복하게 만들었다. 장기집권야욕으로 비록 무너졌지만 그의 업적은 우리 역사레 역대 어느 정권보다 길이 남을 위업을 달성한 사람이다. 이슴만은 창업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자유당 집권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 심각한 비리와 부패로 무너졌다., 윤보선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 전두환의 군부반역 및 폭압정치, 노태우의 북방 수교와 물타기 정치, 김영삼의 나라부도와 측근비리, 김대중의 북한 퍼주기 남북정상회담 및 평화상 수상 비리, 지역 파벌을 위한 파벌정치와 측근비리, 노무현의 이념투쟁의 허송세월과 비도덕성, 그리고 측근비리, 이명박의 토목정치와 권력형 측근비리 등 나라의 발전보다는 자신과 주변, 지역, 혈연, 측근들의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정권 뿐이다. 

 

무능한 조선이 일제에 망한 뒤에 6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탄광에서 죽고, 전선에서 위안부로 아까운 목숨을 버렸다. 500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하며 임진왜란/정유재란, 정묘/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녀자들은 강간을 당하고 끌려가 그들의 애첩이 되고 노예가 되었다. 그 당시 이미 망했어야 했던 조선이었다. 수많은 정변과 당파싸움질에 많은 선량한 선비들이 죽숨을 잃었고, 그리고 무능한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던 무수한 반정의 무리들이 실패하여 산하에 피를 뿌렸다. 비리와 부패의 극을 달리던 외척들이 왕권을 뒤흔들고 흥선과 민비의 권력다툼 와중에 이 나라의 마지막 장은 나라를 망해먹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위화도회군'이라고 그럴듯한 명칭을 붙인 반역으로 고려를 뒤엎고 왕씨들을 모조리 서해 앞 바다에 수장시키고 조선을 창업하고 통치했던  이씨들의 책임이 절대적이다. 그러다가 일제치하에서 노예처럼 살던 이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 36년만에 어느날 갑자기 해방이 찿아왔다. 미.소군정을 등에 업고 나타난 남북의  정권들에 의해 한반도는 반토막 나고 한국전쟁까지 일어나 수백만 장병과 백성들이 피를 뿌렸다. 그리고 62년이 흘렀다.  

 

북쪽의 김씨 세습 정권은 핵무기 등 점점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고 공갈과 협박, 심지어 연평도에 170여 발의 해안포 사격으로 애굿은 장병과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과거부터 북한 정권은 수많은 도발을 자행하여 왔다. 김신조 일당 청와대 기습 사건을 포함하여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프에블로호 사건, 미 정찰기 격추 사건,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서해에서 수차례 해상 교전, 천안함 사건으로 함정이 어뢰를 맞고 침몰하여 46명의 젊은이들이 서해바다에 수장되었다. 언제까지 그들의 만행에 국민들과 장병들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 단호한 응징? 천만의 말씀이다. 역대 어느 정권도 단호한 응징을 못했다.

 

겨우 창업 64여 년이 지난 대한민국, 고려 무신정권 80년, 몽고지배 100여 년보다 짧다. 어느날 나라가 망하고 사라져도 수백년 후 역사에는 겨우 한줄로 남을지도 모른다. 해방 후 한반도 남쪽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부패와 비리, 갈등으로 국론이 분렬되고 적에게 동조하는 친북.종북세력들이 사회 곳곳에 침투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며 정권을 흔들다가 결국에는 중국이나 일본, 아니면 북한에 흡수되어버린 나라 정도? 그리고 경제발전 좀 했다고 거드럼 피우며 사치와 향락으로 미국을 등에 업고 설쳐대다가 망해버린 나라, 정도? 아마 역사적으로 중국의 신나라나 우리 역사에서 후삼국 정도에도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수도 서울에 연평도 처럼 휴전선 이북에 배치된 적의 장사정포와 방사포가 포격, 아니면 소형 핵탄두나, 스커드 미사일, 화학탄, 특수부대 침투조에 의해 발전소/변전소. 고압선로.수원지/급수원, 가스 저장소 및 공급시설.지하 전력구/통신구 .전철 중앙통제실.한국전력 중앙통제실 등 각종 중앙제어시설 등을 파괴.무력화시킨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서울 수도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마 서울은 아비규환이 벌어질 것이다. 대피공간은 지하철과 터널, 건물 지하층 뿐이다. 그곳에는 비상대책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도 않다. 비상시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도 마실것도 없고 전기,통신이 두절되고 급수마져 단수된다면 천 만이 넘는 서울 시민들은 탈서울 사태에 도로마다 북새통이 벌어질 것이고, 때를 맞춰 일부 버림받아온 하층 시민들은 방화와 약탈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재난.구호는 물론이고 주민통제능력을 상실할 것은 뻔하다. 고층아파트나 빌딩의 주민들은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난방, 전기, 급수가 차단되면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를 정부와 군은 얼마나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접적지역의 연평도가 저 정도니 서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도 서울에 국력의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대단히 취약한 구조의 안보 상황이다. 확전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도권이 포격당할 경우에는 예기치 못할 엄청난 상황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불굴의 노력으로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오늘의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이러한 경제적 풍요와 사치가 언제 물거품처럼 추락할지 아무도 모른다. 해상무역로 봉쇄, 북한의 도발, 미군의 철수, 북한 급변사태 등 언제 위기상황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가 붉게 물들고 맑스.레닌의 공산주의 이념과 김일성 교조사상에 빠진 종북.친북 세력이 정치권을 포함하여 사회 곳곳에 침투하여 암암리에 정부 전복을 기도하기 위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무능한 정권과 지도층은 국민들의 목숨을, 재산을, 명예를, 자존심을 송두리채 버리게 만들고 눈물과 한으로 세월을 보내게 만들고 권력과 가진자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만들고 있는 현실이다.

 

국민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정신이 없다. 다이어트.성형에 전력을 투자하고 연예인, 언론인들이 최고의 가치를 구가하고 있는 시대다. 공직사회를 포함한 사회 곳곳이 비리와 부패로 썩지 않은 곳이 없고 나라돈이 쌈지돈이 된지 오래다. 먼저보는 놈이 임자인 나랏돈, 한수원 원전비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끝이 없고 언제 원전이 폭발할지 알 수가 없다. 전기불랙아웃 사태가 매번 다가오고 위기를 실감하면서도 특단의 대책이 없다. 각종 병원, 재조사, 통신사, 정유사, 건설사, 백화점, 제약사, 법조계, 교육계, 문화예술단체, 정부 공기업, 은행 등 금융기관, 법조계, 경찰, 군대, 대학, 대기업, 재단법인, 체육계, 마사회, 상조회사, 사채업체, 증권사, 농.축.수협 등등 제대로 반듯한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이 폭리, 비리와 부패로 썩어가고 있다. 권력형 비리가 역대 정권마다 불거터지고 애굿은 국민들만 피해자로 전락하고 있다. 군대를 무시하고 불신하며 깔보고 있는 현실에서 군대가 갈 곳이 없다. 군개혁은 까마득하고 내부비리는 연일 계속되고 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노출되었는지 모른다. 무역로 확보, 해양영토수호 등 대양해군건설을 위해 국가적인 안보전략차원에서 건설하는 제주해군기지를 불순세력과 친북.용공세력 등이 합류하여 지리한 싸움질을 계속해왔다. 북한은 계속 강력한 핵무기, 화학탄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고 주변 해양영토는 중국과 일본 어선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어획자원을 싹쓸이 해 가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고 이어도와 독도는 언제 중국과 일본의 먹이가 될지 모른다. 중국과 북한의 위협이 가중되고 우리가 자력으로 안보 능력이 부족하다면 미국은 유사시 일본군을 한반도에는 진주시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말의 재판이 될 공산이 크다. 부패한 나라는 반드시 망했고 그러한 역사는 반드시 반복될 것이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들 인생시간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조선이 무능하여 망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들이 분단된 한반도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우리들이 다시 오류를 범하게 되면 우리들 후손들은 더 아픈 고통을 겪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