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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83 : 일제강점기 28 ( 무너지는 무단통치)

 

 

 

한국의 역사 983 : 일제강점기 28 ( 무너지는 무단통치)

 

 

         

 

 

민족 저항의 시대 

 

 

무너지는 무단통치

 

'하세가와 총독, 본국 군대 동원해 시위를 유혈 진압하다'

 

3.1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이다. 민족대표들이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시민.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전개했으며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일제의 총검에 맨몸으로 맞섰다. 일제 통치의 폭력성과 야수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마치 인간과 야수의 싸움처럼 전개되었다.

 

 

 

탐공공원(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하면서 탑골공원에서는 혼선이 생겼다.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선언서를 낭독했는데, 태화관으로 민족대표를 모시러 갔던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누가 선언서를 낭독했는가?"라는 경성지법의 '신문조서'에서 "모른다"거나 "자동차를 타고 온 일본 유학생이 낭독했다고 들었다"고 모호하게 답변했다. 낭독자는 오리무중이었다.

 

일제는 연행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는데, 박쾌인은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사범과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공원에 갔다"며 "육각당 위에서 중절모자를 쓴 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지만 누군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김교승과 의학전문대학교 유완영도 "낭독자는 누군지 모른다"고 답했다. 일제는 끝내 낭독자를 체포하지 못했는데, 1970년 고양군 백제면에 사는 해주 출신의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자신이 낭독했다고 증언했다(독립운동사 제2권 1975).

 

만세 행진 방향에 대해서는 박쾌인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로 나가 남대문, 의주통(무악재 부근), 영성문, 대한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서대문 밖 프랑스 영사관 앞을 지나 서대문정, 장곡천정(소공동)에 이르러 본정(충무로)으로 가니, 해산 명령이 내려 하숙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박쾌인은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체포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홍순복은 "영락정(저동), 황금정(을지로) 순서로 각 장안을 통과해 종로에서 해산했다" 고 전했지만 같은 학교 손덕기는 "본정 2정목(충무로 2가) 파출소 앞까지 갔다가 체포당했다"고 말해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날 경무총감부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을 비롯하여 모두 134명을 연행했지만, 이날만 해도 발포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언제 최초로 발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군대를 동원해 뿌리째 없앨 방침이었으나 조선 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가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다'고 거절해 하세가와가 본국 정부에 새로운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며 "새로운 군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전한다. 평화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자는 총독 하세가와란 뜻이다.

 

2007년에 발견된 '우쓰노미야 일기'는 그간 일본에서 부인해왔던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30여 명의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살해, 방화했다'고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제국의 입장에서 심각한 불이익이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려 간부들과 협의해 담당 중위에게 근신 30일간 처분을 내렸다고 자백했다.

 

만세 시위에 당황한 하세가와는 3월 3일 고종 장례식을 크게 우려했다. <조선총독부관보>는 하세가와가 3월 1일 "고종 인산일에 경거망동하거나 허설부언을 날조해 인심을 요란케 하는 것과 같은 언동을 감행하는 자는 본 총독이 직권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이라는 협박 유고를 발표했다고 전한다.

 

드디어 3월 3일 덕수궁과 훈련원(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하는 장례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 오전 6시 20분 덕수궁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8시쯤 재궁(시신)은 대한문 밖에 있는 대열로 옮겨져 유생.시민.학생들의 애도 속에 훈련원으로 운구되엇다. 오후 1시 30분에 훈련원을 출발한 운구는 오후 2시 40분쯤 청량리에서 노제를 지내고 5시 반쯤 망우리에서 진을 올린 후 밤 11시 10분쯤 명성황후가 누워 있는 금곡 홍릉에 안장되었다.

 

총독부는 국장 기간 내내 긴장했다. 하지만 <고등경찰관계연표>가 이날 경기도 개성에서 낮에 1,000여 명, 밤에 2,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에 나섰다고 전하는 것처럼 지방에서는 시위가 발생했지만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세가와의 협박에 겁먹은 것이 아니라 비운의 황제를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3월 5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등의 주도로 아침부터 남대문역(현 서울역) 공장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서 많은 시민이 부상을 입고 남자 40명과 여자 35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에 놀란 하세가와는 "앞으로 정학(동맹휴업), 페업(상가철시)하거나 광분하는 데 열중할 것 같으면 반드시 다른 날에 후회하게 될 것"이란 내용의 협박 유고를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3월 9일 서울 상인들이 "일체 페점하고 시위운동에 참여하자"는 내용이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를 발표하면서 일제 철시에 나섰다. 또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던 학생들과 고종 인산에 참여했던 시민.유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령 등 해외로도 파급되어 3월 12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서 첯 시위가 발생했다. 삼원포는 망국 직후 전국 각처에서 먕명한 사대부들이 1911년 4월 경학사를 조직했던 추가가의 길목이었다.

 

다음 날인 3월 13일에는 이상설이 망명해 서진서숙을 열었던 북간도 용정촌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렸다. 용정의 명동학교를 필두로 70~80리 거리로부터 280리 거리의 12개 한국인 학교 학생들은 물론 일본 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까지 모여들었다. 참석 인원에 대해 <독립신문>은 3만 명, 일제의 '제외 조선인 독립운동 개황'은 4,000명이라고 주장했다. 용정의 일본영사관은 연길 도윤 도빈에게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어서 경비업무를 맡겠다"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용정 교민들은 3월 17일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제창병원에서 4,000여 명이 운집해 일제를 성토하고 장레식을 치렀다. 서간도의 유하.통화.집안.흥경.관전.환인.정백.안도.무송현과 북간도의 연길.화룡.왕청.훈춘 등 한인들이 이주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도 태극기를 앞세운 시가 행진이 있었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건설한 신한촌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뿐 아니라 니콜리스크.라즈토리노예.스파스코 등 러시아령 각지에서도 만세 시위가 발생했다.

 

조선총독부 <시정 25년사>는 1919년의 시위 횟수가 617건, 참가 인원 58만 7,000명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자료 수집이 어려움 때문에 많은 부분이 빠졌다'면서 서울 57회 57만여 명, 경기 304회 67만여 명, 강원 57회 10만여 명, 충청 156회 12만여 명, 전라 216회 30만여 명, 경성 132회 11만여 명, 한경 94회 5만 7천여 명, 평안 314회 51만여 명, 황해 120회 9만 2천여 명 등 모두 1,393회 195만 4천여 명이다"라고 전한다.

 

일제가 평화 시위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는데, <시정 25년사>는 조선인 사상자 2,000여 명, 일본인 군인.헌병경찰 사상자 20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서울에 있는 통신원의 기록을 토대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치는 것이 마치 풀을 베듯 해서 즉사한 사람이 3,750명이고, 중상을 당해 며칠 후에 죽은 사람이 4,600여 명이다" 라고 전한다.

 

연행자들은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 해주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던 김명신은 3월 2일 연백군 벽란도에서 체포되었는데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그해 10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하체는 불구가 되었다.

 

일제는 평화 시위에 야수적인 폭력진압으로 대응했지만 이미 무단통치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로써 일제 10년 지배의 총체적인 파탄이 전 세계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