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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81 : 일제강점기 26 (민족 저항의 시대 : 쌀소동과 3.1 운동)

 

 

한국의 역사 981 : 일제강점기 26 (민족 저항의 시대 : 쌀소동과 3.1 운동)

 

 

         

 

 

민족 저항의 시대 

 

 

 

쌀소동과 3.1 운동

 

  

'무사나라 ' 일본은 무력이면 조선을 영구히 통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헌병경찰제 아래서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실시하고, 초등학교 교원까지 긴 킬을 차고 교단에 서게 했다. 그러나 10년에 걸친 이런 폭압 통치는 한국인의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1918년 11월 1일 프랑스 파링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 국가가 선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삼국협상 국가에 맞서 식민지 및 시장을 분할하기 이해 전개한 전쟁이었다. 1914년부터 4년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2,000만여 명이라는 막대한 사상자를 남긴 채 그렇게 협상국의 승리도 끝났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무기 삼아 유럽 전선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도 막대한 이익을 본 수혜국이 됐다.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독일 조차지인 중국 산동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하고 청도를 차지했다. 독일은 산동반도에까지 군사를 보내 일본과 다툴 형편이 아니었다. 일본은 1915년 5월 25일 중국의 원세개 총통에게 21개 조항을 강요해 받아들이게 했다. 산동반도 내의 독일 이권은 물론 만주에 일본의 조차지를 설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21개 조항은 중국 내 반일감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군산복합체 성격이 강했던 일본 자본주의는 전쟁 특수로 급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에 11억 엔의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수출액이 4배 이상 증가해 1920년에는 27억 엔의 채무국으로 탈바꿈한다.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리던 미국에 대해 생사 수출이 급증하고 전쟁 당사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로도 수출이 증가했다.

 

유럽 열강이 전쟁에 전념하느라 아시아 시장에서 퇴조하자 일본의 수출이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군수품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크게 성장했다. 1913년 기선 건조는 5만 1,525톤에 불고했으나 1918년에는 62만 6,695톤으로 12배 이상 크게 급성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해운 조선국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화학공업과 전력산업도 발전해 도쿄에서 이나와시로까지 200킬로미터 장거리 고압 송전에도 성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했지만 그 이면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농촌에서 농토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고 사는 기생지주가 여전했다. 또 공장 노동자 수는 85만 명에서 178만 명으로 급증했는데, 농촌 인구가 공장 노동자로 빠져나가면서 임금과 물가가 동반 상승했다.

 

농촌 인구 감소와 함께 쌀 생산량이 급감함에 따라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16년 5,844만여 석에 달했던 쌀 생산량이 1917년과 1918년에는 각각 5,469만여 석으로 400만 석 가까이 감소했다. 1918년 3월 한 되에 20전 정도하던 백미가 7월에는 40~45전으로 치솟더니 8월 초순에는 50전으로 상승했다. 도시 노동자의 일급이 50전 정도였으니 하루 종일 일해 쌀 한 되 사면 끝이었다.

 

1918년 7월 23일 도야마 현 우즈 마을 부녀자들이 쌀값 폭등에 항의하면서 현 바깥으로 미곡을 반출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전국적으로 쌀소동으로 번진 것이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자연발생적이었던 쌀소동은 도시 노동자와 빈농이 대거 가세하면서 1도.3부.32현.33시의 500개소로 확대됐다.

 

일본 민중은 전국 곳곳에 집결해  쌀값 인상과 매점매석, 정부의 무대책을 비난했는데, 당시 일본 총리는 무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던 초대 조선 총독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다케였다. 조선 총독으로서 공적을 인정 받아 1916년 10월 일본 총리가 된 데라우치의 머리는 비리켄 인형의 머리와 비슷했다. 이 때문에 헌법도 무시하는 그의 내각을 '비입헌 내각'이라고 불렀다. 쌀소동이 격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고와 황실.재벌 자금까지 투입해 쌀값 안정에 나서는 한편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해 탄압했다.

 

 그러나 무력통치로 일관하던 데라우치 내각도 쌀소동이 확산되자 책임을 지고 1918년 9월 29일 총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쌀소동은 더 이상은 무력으로 민중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신미증식계획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데라우치의 뒤를 이어 입헌정우회 총재이자 온건파였던 하라다카시가 취임하면서 정당 내각 시대가 열렸다. 이 무렵 국제 정세가 요동을 쳤다.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볼세비키는 그해 말 무병합.무배상 강화, 러시아내 소수민족의 자결, 비밀외교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서 자본주의 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맞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평화원칙'에 민족자결주의를 집어 넣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던 독일 등이 지배하던 식민지 국가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민족자결'이란 언어 자체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8월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파리평회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한편 선우혁.김철 등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선우혁은 1919년 2월 초 평안북도 선천의 양전백 목사와 정주의 이승훈.김선주 목사 등을 만나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협의하고 김철은 서울에서 천도교 측과 협의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조용은(조소앙)과 장덕수.이광수등을 파견하였는데,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서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교헌.김규식.김동삼.김약연.김좌진.조용은.려준.유동열.이동녕.이동휘.이범윤.이상룡.이세영.이승만.이시영.문창범.박용만.박은식.박찬익.신채호.안정근.안창호.윤세복.허혁 등 39명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2월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는 항일 독립전쟁을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학도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1919년 1월 6일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은 도쿄의 조선기독교 청년회에 모여 최팔용.백관수.김상덕.김도연.전영백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및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병으로 사임한 전영택 대신 이광수.김철수가 더해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4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청년단 대회를 개최했다.

 

'조선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국장 최팔용의 사회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백관수는 이광수가 기초한 '됴션쳥년청독립단선언셔(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은 4개 항의결의문을 발표했다. 선언서는 "지난 10년간 독립을 회복하려다가 희생된 자 수십만"이라면서 "한일합병은  조선 민족의 의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서는 "합병 당시의 선언과 달리 일젱는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대하듯이 했으며, 참혹한 헌병정치하에서 참정권.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까지 억압당하였다.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본과 혈전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유학생들은 도쿄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27명이 체포돼 최팔용 등 9명이 금고 1년 정도의 형을 받았다. 당초 내란죄를 적용하려 하였으나 하나이 다쿠조, 후세 다쓰지 등 민권변호사들이 "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 어찌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하는가?"라며 무료 변론에 나서면서 비교적 처벌이 가벼운 출판법 위반죄가 적용된 것이다. 

 

2월 23일에는 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조선독립청년단 국민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인새물이 사전 발각되어 변희용.최승만. 등이 구금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후 2시에는 최재우가 150여 명의 유학생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며 시위했다.

 

이런 와중인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붕어 소식이 전해진다. '고종 독살설'은 불타오르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됐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천도교계 이종일은 <묵암비망록>에서 "이제 고종이 일본에 독살당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대한인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중 시위 구국운동은 이제 진정한 민중운동으로 성숙될 것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라고 예견했다.

 

3월 3일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3월1일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