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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79 : 일제강점기 24 (민족 저항의 시대 : 3.1 운동 3)

 

 

 

한국의 역사 979 : 일제강점기 24 (민족 저항의 시대 :  3.1 운동 3)

 

 

         

 

 

민족 저항의 시대

3.1 운동 3

 

 

6.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 진압

 

 

 

종로구 보신각앞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경성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독립선언서가 본래 낭독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 시위가 발생하였다. 몇십 만명이 동시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빠른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들은 진압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그에 더 자극 받은 한국인들의 운동이 그 규모를 더하였다.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 일시: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 장소: 천안 아우내 장터
  • 경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 일시: 1919년 3월 4일
  • 장소: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 경과: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때 사천시장 부근에 있던 사천헌병대에 이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던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사전 적발되어 구금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천헌병주재소의 일본인 소장 사토 지쓰고로(일본어: 佐藤實五郞)와 조선인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참가자 수십명을 살상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시위대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 관련자: 조진탁 (사형), 고지형, 지석용

 

 

삼진 의거

  • 일시: 1919년 3월 28일, 4월 3일
  • 장소: 경상남도 창원
  • 경과: 제1차와 제2차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삼진의거는 창원 일대의 연합 대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연고지에 돌아온 변상태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에서 동조하는 인사들을 모아 모의했다. 단일 시위로는 마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였으며,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연합시위로 기록되었다.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한 주모자들이 태극기를 제작해 제2차 삼진 의거(4·3 삼진의거)를 재차 계획했으며,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서 약 3천여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일본 헌병대와 유혈 충돌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 관련자: 변상태, 변갑섭(사살), 변상복(사살) 등

 

 

제암리 학살 사건

  • 일시: 1919년 4월 15일
  • 장소: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
  • 경과: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 향남면 제암리(지금의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곽산 학살 사건

  • 일시: 1919년 3월 6일
  • 장소: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
  • 경과: 곽산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점차 수천명이 시위에 동참하자, 일제는 독립운동가 박지협(朴志協)을 주동 혐의로 체포 직후 타살(打殺)하고, 체포한 시위군중 100여명 중 50여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일제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군중에 대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광견(狂犬)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쇠갈고리로 시위군중 수천명을 참살했다. 일명 곽산의 참살(郭山一慘殺)이라고도 불린다.
  • 관련자:박지협(타살)

 

 

사천 학살 사건

  • 일시: 1919년 3월 3일
  • 장소: 평안남도 사천
  • 경과: 개신교 목사 한예헌(韓禮憲)과 천도교 교구장(敎區長)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김병주(金炳疇) 등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으로 73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학살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여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打殺)했다.
  • 관련자: 한예헌(韓禮憲),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김병주(金炳疇) 등

 

 

화수리 학살 사건

  • 일시: 1919년 4월 11일
  • 장소: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 경과: 4월 3일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마을 주민 수십여명을 학살했다. 40가구가 모여살던 화수리는 사건 이후 모두 불타 18가구만 남았으며, 사건 이전까지는 비교적 부촌(富村)이었으나 이후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맹산 학살 사건

 

평안남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헌병이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대구 학살 사건

 

대구에서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일본군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시위의 주모자로 독립선언을 낭독했는데, 김용해는 체포하러온 일본군과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자가 투옥되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합천 학살 사건

 

3월 16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3월 18일 합천군 강양면의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쇠몽둥이나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했다. 3월 19일에는 합천군 대정면에서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를 벌여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3월 22일에는 상백,백산,가회,삼가 등 다섯 면의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질서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일본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유림과 학생의 주도로 8천여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자 역시 일본군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

 

 

 

남원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가 관청 행사였던 식수 기념식이 예정되어 있던 4월 3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19개 면에 격문과 참가 취지서를 보냈다. 나무 심기를 핑계로 군중 800여명을 모아 식수기념식이 끝나자 19개 면장 등이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이 호응하여 남원-전주 간 도로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소식은 곧 남원군 전체에 퍼졌으며, 다음날인 남원읍 장날에 장터에서 또다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장날 오후에는 광한루 앞 광장에서 군중 1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자 수천여명의 주민들이 다시 합세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읍내 전체가 시위 군중으로 가득했다. 일본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이 과정에서 방진형(房鎭炯), 방명숙(房明淑) 등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황일환(黃日換), 이성기(李成器), 형갑수(邢甲洙) 등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익산 이리장날 만세운동

 

기독교인이었던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과 장경춘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12시 쯤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쇠갈고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문용기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군산 3·5 만세운동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중·고교), 구암교회 교인,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군산의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시위는 이후에도 28차례에 걸쳐 계속되어 시민 3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당시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해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라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한강 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그 의미가 크다.

 

 

 

만주 용정 만세운동

 

만주지역에서의 대표적인 만세시위는 3월 13일 용정에서 3만여명이 참가한 시위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시가행진을 하지 중국군대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3·1 운동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조선인회를 열었다. 조선인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의 차별 철폐를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