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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77 : 일제강점기 22 ( 민족 저항의 시대 : 3.1 운동 1)

 

 

 

한국의 역사 977 : 일제강점기 22 ( 민족 저항의 시대 : 3.1 운동 1)

 

 

         

 

 

민족 저항의 시대

 

 

3.1 운동  1

 

1. 개요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 또는 프랭크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신복룡 교수나 일본 측 야마기 겐타로 등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약 50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고,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서울 탑골 공원에 위치한 3·1 운동 서판

 

 

 

 

 

종로구 보신각앞 만세를 외치고 있는 민중들

 

 

 

2. 배경

 

 

 

 

무오독립선언서 석판 인쇄본

 

세계정세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당시 세계 정세는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변화된 세계 정세는 민족문제에 대해서 자각을 높이고 여러 지역에서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운동을 고무시켰다.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불균등 발전으로 인해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반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반식민지 민중은 이 전쟁을 전제정치와 식민지배에 대한 진보와 문명의 승리로 받아들여 민주주의와 민족국가의 건설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한편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한 1917년 러시아혁명도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7년 11월 말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한 소비에트공화국의 레닌이 제정러시아 치하 100여 개 이상의 억압받는 민족과 동양의 모든 근로자를 대상으로 선언한 '민족자결의 원칙'은 억압받는 민족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또 1917년 3월 미국은 '정의의 보편적 지배', '세계 자유의 실현', '평화와 안전 보장' 등을 내걸고 세계대전에 참가했지만 실제 이유는 공항 탈피.유럽 투자자본의 보호.볼세비키혁명의 영향을 받은 반전혁명운동의 고양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연합국인 영국.프랑스 등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병합하는 것을 저지하고 국제연맹을 통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내세우면서 전후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윌슨과 레닌이 식민지 약소국의 민족문제를 처리하는 원칙으로 내놓은 '민족자결' 은 표현은 같았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윌슨은 '민족자결'의 대상을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뺀 일부 패전국의 식민지 또는 이 전쟁에 이바지한 일부 약소국에만 국한 시킨 것이었다. 또한 윌슨의 선언은 세계대전 동안 드러난 여러 피압박민족의 독립 열망과 레닌의 민족자결 선언에 대한 제국주의의 대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을 선언한 레닌의 '민족자결'은 독립활동을 벌여 온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운동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었다.

 

세계대전 뒤에 새로운 사조로 나타난 '민족자결'은 나라 안팎의 우리 민족에게 반일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특히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세계개조의 신시대로 받아들여 세계 열강의 도움을 빌어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인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내막을 잘 모른채 한국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절묘하게 기회를 포착하였다.

 

 

고종 독살설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고종이 골치거리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성격의 고종은 무슨 일을 저지럴지 몰라 일제와 친일파는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일제와 친일파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고종이 독립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극도로 비밀리에 북경 망명을 준비하던 고종은 이완용이 숙직한 다응 날 알수 없는 원인으로 급서하고 말았다.

 

황제로서 시종 기회주의적이고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고종은 망국 후에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 고종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황실을 복위시키려는 복벽파뿐만 아니라 민주공화파들도 고종 망명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을 가장 먼저 추천한 세력은 1914년 이상설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고항복군 정부였다. 이상설은 1915년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학원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이춘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신한혁명단을 조직했다. 신한혁명단은 광복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계허ㅚㄱ하는 한편 고종 망염 계획을 수립했다. 신한혁명단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잠입시켜 고종을 신한혁명단 당수로 받들고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려 ㅜ했다.

 

성낙형 등은 1915년 7월 26일 내관 염덕인(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중한의방조약' 초안을 직접 가지고 와서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하던 '온여기옥'이라는 인영(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새어나가 고종 면담 직전 상낙형을 비롯해 김사준.김사홍.김승현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사건'이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것은 1918년에 우당 이회영이 중심이 된 세력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이규학의 아내 조계선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 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정규의 <우당 이회영 약전>과 구 한국군 부위였던 이관직의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 망명 계획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한다. 두 사람은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어서 이회영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기록은 모두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망명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이 선뜻 승낙했다고 전한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 외적인 조건은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였다. 여기서 피압박 민족들이 크게 고무되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과 왜 황실 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선생(이회영)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교영으로부터 고종의 승낙 의사를 전달받은 이회영이 홍증식과 함께 고종의 측근인 전 내부대신 면영달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다. <우당 이회영 악전>에 따르면, 망국 후 남작 직위를 거부했던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하된 나에게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니는 분골쇄신하더라도 황제의 뒤를 따르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 원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쯤에 이득년.홍증식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고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데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이란 점이다. 고종은 그다음 날 묘시(오전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는 것인데,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방법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김윤식이 <속음청사>에서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 아들들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기록하는 등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한 데 대한 의혹이 일면서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을 탄 식혜를 올리도록 하여 독살했는데,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회영의 이들 이규창 역시 자서전 <운명의 여진>에서 고종의 생질 조계진(형수)도 고종 사후 5일 후 운현궁에 갔다가 이런 내용을 듣고서 부친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듯이 왕실 사람들도 고종 독살설을 믿었다. 의병장 곽종석과 교류했던 송상도는 <기려수필>에서 '역신 윤덕영.한상학.이완용이 태황을 독살했다"고 독살 가담자의 이름까지 명기했다.

 

작자 미상인 <대동칠십일갑사>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전한다. 이완용이 어의 안상호로부터 집안에 미친개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무색무취한 독약 두 통을 구해 큰 개에게 사용해보니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이를 어주도감 한상학에게 올리게 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한다. 고종 독살설은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1919년 3월 15일,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왕직 명의의 해명 기사를 냈다. 그날 밤 고종이 식혜를 마시긴 했지만 여러 나인들과 함께 마셨으며, 그후 안락의자에 앉아 자다가 새벽 1시 15분경 갑자기 '어!'하는 소리와 함께 뇌일혈이 왔다는 것이다. 숙직사무관 한상학과 촉탁의 안상호의 조치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해 새벽 6시 30분 쯤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이들이 미천한 궁녀이기 때문에 어선에 참여할 수 없고, 입을 막기 위해 독살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변명했다. 일제는 독살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 기사를 게재했지만, 고종이 식혜를 마셨다는 사실과 두 궁녀가 고종 사후 석연치 않게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독살설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오흥순에 대한 '제2회 신문조서(1919년 4월 1일)'는 3.1운동 때 뿌려진 '국민회보'에 "고종이 천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여관(女官) 2명이 독살했는데, 그 여관도 비밀 누설 우려가 있어 죽여버렸고, 독살 수모자는 이완용 외1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의친왕 망명 긷조 사건(대동단 사건)에 관련되었던 '이재호 신문조서(1919년 111월 14일)'에도 고종 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이 있다. 이재호는 "덕수궁에서 이태왕(고종) 전하의 훙거 때 직접 모셨던 민영달 및 의사 안상호, 아울러 간호부를 데려와서 미국에 보내 이태왕 전하 독살 사건의 증인으로 알리려는 방책까지 준비해서 민영달과 교섭 중"이라고 진술했다. 이회영이 민영달을 통해 고종을 망명시키려 했던 계획이 사실이었음은 이 증언으로서도 드러난다.

 

백성들에게 큰 비난을 샀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자 을미의병이 일어났듯이, 고종도 왕위에 있을 때는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지만 그의 의문사는 3.1운동이 일어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고종 부부는 죽음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입히는 묘한 운명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