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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75 : 일제강점기 20 (일제강점기 시대별 전개 8)

 

 

 

한국의 역사 975 : 일제강점기 20 (일제강점기 시대별 전개 8)

 

           

 

 

 

일제 통치의 시대별 전개 8

 

헌병 경찰 통치기 (무단 통치기, 1910년 ~ 1919년) 8

 

 

7. 회사령 공포

 

'허가 없이 회사 세우면 징역, 민족자본에 족쇄 채우다'

 

식민지배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식민지를 키워서 단물을 빼먹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의 성장을 억제하여 저개발 상태로 두는 것이다. 이는 노동력이나 지하자원 따위를 갈취하는 방법이다. 일제는 두 번째 방법인 식민지 성장을 억제하면서 노동력과 지하자원을 갈취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수탈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국중에서는 최악의 국가였다. 정치 발전은 물론 경제 발전도 억압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대한제국 점령 불과 두 달 후인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에서 제령 제13호로 발포한 '회사령'이다. 회사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령인데, 이때 발포한 회사령은 자본주의의 꽃인 회사, 즉 기업 설립과 활동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희한한 법령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2월 30일자에 따르면, 회사령 제1조는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물론 일본 본토에서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였다.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령'으로 앞으로 설립할 사학은 물론 기존에 설립된 모든 사학까지 재심사하여 강제로 문을 닫게 한 것과 같은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회사령 제2조는 "조선 외에서 설립한 회사가 조선에 본점이나 지점을 개설하려고 할 때는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엇다. 지점 설치도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제5조는 "회사가 본령(회사령)이나 혹 본령에 근거해 발하는 명령과 허가 조건에 위반하거나, 또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을 반하는 행위가 있을 때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와 금지, 지점의 폐쇄와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허가한 회사 이외에는 회사 설립과 운영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가 있을 때"라는 모호한 단서로 조선 총독은 회사의 해체까지 명령할 수 있었다. '공공질서'는 일제의 통치 질서를, '선량한 풍속'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질서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했다. 회사령 제12조는 "제1조의 허가를 받지 않고 회사를 설립하는 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부실하게 신고해서 그 허가를 받은 자도 역시 동일하다"고 규정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업하려다가는 징역 5년을 각오해야 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나라에서 기업 설립을 억압하는 이상한 법률을 제정한 것이었다. 이는 민족자본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일본 기업, 일본 자본이 식민지를 지배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회사령 시행규칙 제1조  5항은 "합명회사에 있어서 그 사원이 될 자의 이름, 주소, 출자액과 합자회사에 있어서 무한 책임 사원이 될 자의 이름, 주소, 출자액"을 자세히 명기하게 했다. 주식회사에 관한 6항은 "주식회사나 주식합자회사에 있어서 발기인의 이름과 주소, 인수 주식의 수와 또 받을 특별 이익과 함께 보수액"까지 적어야 했다. 금전 이와의 재산으로 출자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립학교령에서 이미 설립되어 있던 사학도 재허가를 받아야 했듯이 회사령 역시 이미 설립된 회사도 재허가를 받아야 했다. '회사령 시행규칙' 제6조는 "회사령 시행 6개월 이내에 면허장, 정관과 '다음 사항'을 기제하여 조선 총독에게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음 사항이란 1. 회사 설립 후의 경과 2. 업무와 재산 상황 3. 업무 집행 역원의 이름과 주소 등이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있거나 한국의 독립을 원하는 인사는 회사를 설립하거나 임원이 될 생각을 말아야 했다. 대만에서는 회사령을 1912년에야 실시했다. 그만큼 일제는 한국의 민족자본 형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회사령 시행 직후인 1911년 1월 18일자 <매일신보>는 "윤치호 등이 광주군 분원 등지에 자기주식회사를 설립하겠다고 경기도청에 청원했으나 회사령에 의해서 다시 청원하라고 퇴각당했다."고 보도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회사 설립을 억제하니 회사령에 대한 비난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일본 중의원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제21회 제국회의 의사록'에 따르면, 1911년 3월 9일 중의원  의원 오다케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관한 질문에서 "조선 회사령은 그곳 실업계에 다대한 불편과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데 진상은 어떠한가?"라고 질문했다.

 

이때의 내각 총리대신은 대한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점령을 주장했던 육군대장 출신의 가쓰라 다로로서 조선 총독 데라우치와 한 몸이었다. 다로는 "조선 회사령의 목적은 조선 경제계의 온건한 발달을 기하는 것"이라면서 "합병 이래 조선 경제계는 더욱 좋아져 수출입 무역과 같은 것은 현저한 진보를 보여 질문 제출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때문에 식업계에 악영향을 미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고 태연히 답변했다.

 

일본 국회의원들이 회사령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본인의 회사 설립까지 제한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가쓰라는 "유익 착실한 회사의 설립은 정부가 가장 절실히 바라는 바"라고도 설명했다. 가쓰라가 말하는 "유익 착실한 회사"란 일본인이 설립하는 회사를 뜻한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한국인 기업은 억제하지만 일본인 기업의 설립은 환영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총독부는 후루가와광업이 설립한 귀성금산, 구하라광업의 갑산동산 같은 조슈군벌에 대해서는 총독부에서 불러들인 것처럼 일본 자본 형성을 적극 지원했다. 주목할 것은 자본에 투자해 생산품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땅에서 광물자원 등을 캐내는 원초적 기업들만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회사령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선관계 제31회 제국의회 의사경과 적록'에 따르면, 1914년에는 중의원 의원 모리야가 회사령 폐지 법률안을 제출했다고 전한다. 비록 특별위원회에서 질문만 했을 뿐 본회의에서는 회부되지 못했으나 일본 제국의회에서 폐지령을 거론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는 뜻이다.

 

1914년 12월 25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1914년 10월 현재 회사령 시행 이후 한국 내에 설립된 회사 수는 모두 109개였다. 자본금 합계 총액은 1,790만 7,220원인데,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 수는 68개에 자본금 합계는 918만 6,500원이고, 한국인이 설립한 회사 수는 21개에 자본금 합계는 177만 5,720원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합동으로 설립한 회사로서 20개 사 609만 5,500원이었다. 한국인.일본인이 합동으로 설립한 회사는 한국인 단독으로 설립을 신청했을 때 허가를 얻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사실상 일본인 회사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한국인이 설립한 회사는 21개 사에 자본금 총액이 180여만 원인데 비해 일본인 회사나 일본인이 지배하는 합동회사는 88개 사에 1,700여만 원으로 9배나 많았다.

 

일본인 회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철도주식회사 같은 대규모 회사였다. 게다가 일제는 1917년 7월 21`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영업 지역에 대한 제한을 철폐해 만주에서도 영업할 수 있게 허용했으며, 한 명은 한국인으로 선임되었던 부총재 2인을 1인으로 규정을 바꾸어 일본인이 독점했다.

 

미국 센프란시스코의 교민 단체 국민회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는 1914년 5월 28일자 '각 회사의 현상'이란 글에서 "총독부에서 소위 회사령이라는 것을 발포한 후로 한인의 회사는 큰 영향을 받아 손해가 적지 않아서 실업 사회에 원성이 자자하다"면서 "한인의 회사는 몇 개 되지도 못하는데 상업 경쟁에 밀리고 회사세 납부에 몰리어 도무지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보도했다.

 

회사령은 일본의 통치가 전 국민적인 반감을 사는 한 요소가 되었고, 3.1운동에 민족 개량주의자들까지 대거 참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회사령은 3.1운동 1년 후인 1920년 4월 1일 폐지된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 제6호는 '경신년의 거둠'이란 기사에서 "경신년 4월 1일 태형 및 회사령 폐지령이 발포되었다. 태형은 실로 비문명 형벌로 오직 조선인에게만 한해 시행해서 세간의 바난을 야기하던바 이제 폐기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회사령은 전 데라우치 총독 때 제정된 것으로 여러 곳에서 많은 비난을 받던 중 이제 폐지되었는데, 그 결과 사업이 적법하고 공익에 무해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폭압 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항거에 놀라 마지못해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꿨지만 민족 자본 형성을 억제하려는 기본 자세까지 바뀌지 않았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