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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73 : 일제강점기 18 (일제강점기 시대별 전개 6)

 

 

 

한국의 역사 973 : 일제강점기 18 (일제강점기 시대별 전개 6)

 

           

 

 

 

일제 통치의 시대별 전개 6

 

헌병 경찰 통치기 (무단 통치기, 1910년 ~ 1919년) 6

 

 

5. 공창

 

'유곽.공창을 도입한 이토, 색계로 한국을 타락시키다'

 

일제는 우리 밤문화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의 <밤의 일제 침략사>를 보면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문화를 창기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만몫했다. 원래 일본인들의 색에 대한 탐구력은 대단한데다 조선을 타락시키고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시에는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위안부를 동원하여 일본 군인들의 색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고 목숨을 희생시켰다.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76월 해군 중장 이도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이 유곽지대가 일본의 공창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와 일진회 송병준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개벽>48호(1924년 6월호)는 '경성의 화류계'란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필자인 일기자(필명)는 송병준을 '색작', 이토를 '색귀'라고 표현했다. 송병준이 망국 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가 1920년에 백작으로 승진한 것을 그의 엽색 행각에 빗대어 색작이라고 바꾼 것이다. 송병준은 1900년 10월 일본인 첩 가쓰오를 시켜서 요릿집 '청화정'을 열었다가 1906년에 '개진정'으로 확대했다. 충무로 2가의 개진정은 양식까지 제공하던 요릿집으로 친일파들의 단골 회식 장소였다.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같은 공식 수행원뿐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코 니혼시바 출신의 오카네, 표면상으로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 명인 요시다 다케코, 도코 신바시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 등이었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5원 정도였으니 쌀 900가마 값의 화대로 엄청났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낫다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대장과 무라다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여자, 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의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통치하의 조선>에서 "병합은 그 경과를 보더라도 일본군이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상층부 일부를 매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다"라고 썼는데, 한국 상층부 일부를 매수하는 방법이 술과 여자였던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을 초청해 연회할 때 게이샤를 한 명씩 옆에 앉혀 대접하게 했다. 일제가 경의선 부설권을 얻기 위해 내부대신 이재완(합방 후 자작 수여)에게 거금 5만원(쌀 1만 가마 금액)을 준 것도 이런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한국의 관료사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술과 여자, 그리고 비자금까지 받은 관료치고 비리와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관료가 없듯이 이런 관료 문화가 이때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본이 사실상 공창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이패.삼패'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갑오개혁 때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려난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으면서 가무만을 선보였던 예인들이다. 이들 중에는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이 바로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 또는 '은근짜'라고도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요즘은 대부분 삼패 창녀가 난무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매춘이 범람하는 이 시대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유흥가에 뛰어드는 것이 대부분인 현실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삼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 출신들이 '한성기생조합'을 만들었다. 이 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을 주축으로 만든 것이 '다동기생조합'이엇다. 그러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으로 바뀌면서 다동기생조합도 '대정권번'으로 바꾸었다.

 

1929년도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에는 1923년 창립한 경성권번이 자본금 2,200원의 합자회사로 버젓이 등재되어 있는데, 사업 목적은 '예기의 양성, 유흥업'으로 적혀 있다. 일제가 공창제도를 버젓이 운영하였다는 뜻인데, 경성권번의 대표 홍병은은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사무를 보던 인물이었다. 영,호남 출신 기생들이 주축인 '한남권번'이 있었고 '경화권번'도 있었다. 경화권번은 나중에 '조선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대표 하규일도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감독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송병준을 색작이라고 부른 데는 이런 까닭이 잇었다.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총감 와카바야시가 2대 통감 소네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던 전선시 상선으로 있으면서 이용구, 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 풍미하던 '명월관'이었다.

 

일제 진출 후 서울의 밤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 기예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황현의 <매천야록> '1906년' 조에는 미모에다 서예도 잘했던 진주 기생 산흥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지용(합방 후 백작 수여)이 첩으로 삼으려고 하자,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대감을 5적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비록 천한 기생일지라도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꾸짖자 그만 구타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지용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외부대신 임시서리로,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군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용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해준 댓가로 하여시 곤스케에게 1만 원을 받았는데, 이때 산홍에게 주려고 한 돈이 1만 원이었다는 뒷애기도 있다.

 

주요한 선생이 발행하던 <동광> 28호(1931년 12월호)에는 한청신이 쓴 '기생철폐론'이 실려 있다. 그는 옛날은 관기라고 해서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던 기생이 하루아침에 양반정치가 무너지고 섬 건너 양반정치가 된 뒤로 아주 철저한 민중화가 되어 이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양반.상놈 등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지만 예기 중심의 고급문화가 매춘 위주로 천박해졌다는 문제의식은 맞는 말이다.

 

앞에 인용한 <밤의 일제참략사>는 "많은 권번을 일본인 또는 준일본인이 경영하였다. 그의 세력이 화류계에서까지 위대한 것은 참 주목할 일이다"라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해 전개한 사업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이 주류였다. 임종국 선생은 1930년 무렵 한국인은 4만 3,700여 명에 한 명 꼴로 기생이 있었지만, 일본은 1,400여 명에 한 명 꼴로 30배 이상 많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기생이 없어져도 내외술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은군자가 있고 유곽이 있고 무엇이야 없으랴. 그러하나 공공연하게 사회가 허락하는 소위 요리관 교제만 없애도 우리 사회의 능률이 얼마나 증진되랴"면서 기생철폐론을 주장했다.

 

술자리에 여성을 동석시키는 조선의 문화가 예기를 중심으로 한 고급스런 문화였다면 일제는 천박한 매춘문화가 주류였다. 그만큼 일제의 사회문화가 장제되지 못한 미천하고 천박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인이 여체를 탐닉하는 매춘문화 수준은 가히 세계적이다. 현재의 밤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가 일제시대에 있다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1919년 3.1운동에 기생들이 대거 동참한 것은 밤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