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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76 : 일제강점기 21 (일제강점기 시대별 전개 9)

 

 

 

한국의 역사 976 : 일제강점기 21 (일제강점기 시대별 전개 9)

 

           

 

 

 

일제 통치의 시대별 전개 9

 

헌병 경찰 통치기 (무단 통치기, 1910년 ~ 1919년) 9

 

 

8. 언론에 물린 재갈

 

'항일 선봉 <대한매일신보>, 일제의 농간으로 친일 매체로 둔갑하다'

 

사무라이(무사)의 나라인 일본은 대한제국 점령 후 총칼을 앞세우고 식민지 백성을 위협하며 모든 언론을 폐간시켜 입을 막으면서 백성들이 무조건 복종할 것으로 착각했다. 무사 정치에 익숙했던 일본 백성과 여론 정치에 익숙했던 조선 백성 사이의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였다.

 

 

일제는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직후 언론 통제에 들어갔다. 통감부 경시총감 와카바야시는 2대 통감 소네에게 "한국인이 내국(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지는 경시청 또는 도 경찰부에서 인쇄 전에 원고를 검열해 과격한 문자를 삭제하고 게재시키기 때문에 기사는 대개 평온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검열하기 어려운 신문들이 있었다. 와카바야시는 "경성에서 영국인 만함(베델이 후임 사장)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나 제외 한국인이 경영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화와이의 <신한국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는 매 호 거의 배일적인 언론을 싣지 않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운영하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통감부 '경찰 기밀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국한문 7,500부, 언문(한글) 4,500부, 영문 500부로 합계 1만 2,500부였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많은 부수였고, 구독자 대부분이 여론 주도층이었다.

 

그래서 조선통감 이토는 1905년 5월 1일 하야시 다다스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 "외국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그대로 두면 치안 유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며 신문지법을 개정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이른바 '광무신문지법' 제34조로서 "외국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 또는 외국인이 내국인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으로 치안을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내부대신은 발매 및 반포를 금하고 그 신문을 압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35조와 제36조는 그 벌칙이었다.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때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가 그해 7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토는 1908년 5월 2일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인을 교사하여 무기를 잡고 일어나 국적을 물리치라면서 암살을 종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등 한시도 방치해두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며 "근본적으로 해독을 제거하려면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고 신문 간행을 정지하지 않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이토는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더라도 "경성 주재 영국 총영사가 베델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를 해주지 않가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영일동맹 당사국이었던 영국의 주 상해 총영사 코크번은 일본에 협조적이었지만 자국민추방에 무작정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통감부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1908년 5월 27일 영국 상하이고등법원 검사 윌킨슨과 함께 베델을 제소했다. 6월 15일부터 사흘간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재판장 본은 베델에게 경범죄 위반으로 3주일 금고를 선고했다. 베델은 상해로 압송돼 수감했는데, 이때 통감부는 베델의 처벌에 대한 전국 각지의 <대한매일신보>독자들의 반응까지 세밀하게 조사하기도 했다.

 

조선통감부 자료에 따르면 1909년에만 모두 137건, 2만 947부의 신문을 압수했다. <대한매일신보>와 해외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이 압수 대상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던 <대동공보>는 거의 매 호 압수됐다. 압수된 내용은 "일본의 보호를 한국 병탄이라고 무고한다"는 것과 "암살자를 의사라고 일컫고 이런 사상의 고취에 힘쓰는 것", "폭도를 국가에 충성된 자라고 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이완용을 처단하려 한 이재명,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 등을 의사라고 지칭하고 의병을 국가에 충성된 자라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대동공보>는 "블라디보스톡 지방을 한국인 국권 회복 단체의 근거지로 할 것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압수했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론을 실어도 압수 대상이었다. 이토는 러시아.청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함북.평북을 통해 "신문이 몰래 수입될 염려가 없지 않다"며 관계 경찰부에 엄중한 주의를 명령했다. 또 "우편으로 보내오는 신문도 경무국의 검열을 받은 뒤 배달하라"고 덧붙였다.

 

일본이 호시탐탐 추방을 노리던 베델에게 더 큰 문제는 심장병이었다. 헌벙 기밀문서 제907호(1909년 5월 20일) '베델은 대한매일신문사 사장으로, 악덕 기자로 유명했는데 지난 1월 오전 11시 30분 결국 병사했다"고 보고했다. 그이 나이 불과 만 37세였다. 헌병기밀문서는 "베델의 장례식 뒤 외국인 묘지(현 양화진)에 매장했는데, 외국인과 한국인 300여 명이 모여 성대하게 치렀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베델의 사망으로 <대한매일신보>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외피가 벗겨졌다. 일제는 그전에도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으나 베델이 허위 조작이란 증거를 제시해 풀려난 적이 있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만한이 임무를 중단하고 귀국했다"며 이에 사원 이장훈 등이 그 혈판을 4만 원에 매입한 후 사옥을 포전으로 옮겨 문을 열고, 이장훈이 주필을 맡아 이달 14일부터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대한매일신보>가 이장훈 명의로 발행되자 양기탁은 자신은 손을 똈다는 사실을 각 신문에 광고로 알렸다. <매천야록>이 "그 논설은 옛날에 비해 조금 온건해졌다"고 전하는 대로 이미 신문의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한국인 손으로 발행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종순은 주요한이 발행하던 <동광> 28호(1931년 12월호)에 게재한 '조선신문사, 사상 발달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대한매일신보는 이장훈씨가 맡아서 하다가 합병될 때 총독부에 매수되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되어버렸다"고 전한다. 총독부가 가장 반일적인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 두 자를 빼고 난 다음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 강점 후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매일신보> 이외의 모든 한국어 신문을 폐간시켰다. 차상찬은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 1935년 3월호에 '조선신문 발달사'를 게재해 "무단무치의 대표 인물인 데라우치 총독이 조선을 통치하게 되니 조선의 언론계는 그의 일도지하에 여지없이 말살되어 소위 어용지 <매일신보> 이외의 조선문 신문은 모두 잔명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미년까지 약 10년간은 조선 신문계의 암흑기라 이를 수있겠다"고 말했다.

 

대한협회 기관지였던 <대한민보>는 물론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까지 폐간되어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총독부의 입 이외에는 모두 봉쇄한 것이었다. 친일이고 반일이고 한국어 언론은 안 된다는 것이 총독부의 방침이었다. 언론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1911년 3월 9일 일본 중의원 의원 오다케는 "총독부는 언론을 심하게 구속해 총독정치에 관하여 운운하는 것은 일의 여하를 묻지 않고 절대 금압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 과연 그런가?"라고 물었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는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또는 풍속을 난잡하게 할 우려가 있는 언론에 대해서는 상당한 취체를 하지만 공연히 언론을 구속하지는 않았다"고 천연스럽게 거짓으로 답했다.

 

오다케는 또 "총독부 측의 양언(뱃심 좋은 말)에 의하면, 병합 후 조선인은 자못 총독정치에 열복하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전연 이와 반대로 조선인은 크다란 실망을 가지고 일본의 시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상은 가연 어떤가?"라고도 물었다. 가쓰라 다로는 역시 "정부는 질문 제출자의 말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총독부의 총칼을 앞세운 폭압정치에 대한 한국인의 원망이 1919년 3.1운동으로 거세게 표출되면서 세계의 비난이 들끓자 당황한 일제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