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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80 : 일제강점기 25 ( 민족 저항의 시대 : 3.1 운동 4)

 

 

 

한국의 역사 980 : 일제강점기 25 ( 3.1 운동 4)

 

 

         

 

 

민족 저항의 시대

 

 

 

3.1 운동 3

 

  

7. 피해 규모

 

3·1 운동의 참여 인원은 최소 50만에서 20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3·1운동 이후 3개월간 만세운동 상황은 202만 3089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시위 횟수는 1,542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이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총독부의 기록에 의하면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시위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검거자가 4만 6,948명 정도였다.

 

 

 

8. 만세 운동 자제 활동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3.1운동 진압 자제단 발족 신문 기사

 

 

3·1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폭력의 조짐이 보이자 박중양4월 6일 대구에서 자제 내지는 진압, 시위 참여자를 설득, 귀가시키기 위해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자제단 본부를 구성하고 단장이 되었고, 대구 자제단 본부장도 겸임하였다. 대구부청 앞에서 조직된 자제단 조직 성명서에서 박중양은 자제단 결성 취지에 대해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 지부가 조직되었다. 5월에는 경상남도에도 부산, 밀양, 창원, 사천, 통영 등지에 자제단이 구성되었으며, 6월에는 청주, 충주, 천안, 아산, 제천, 청주 등지에 자제단 지부가 결성되고 6월 27일 옥천군 옥천면에서 정석용에 의해 옥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자제단은 12월까지 각지에서 3.1 운동 참가자들에게 무력 시위를 자제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 호소하고나 만세 운동을 해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9. 반응 및 파급 효과

 

만세 열기는 5월까지 계속되었다. 5월 31일 윤치호는 7,8명의 젊은이가 종각 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는 3.1 운동이 국내외에 한국인에 대한 시각을 개선시켰다고 평했다.

 

한국인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했고, 조선의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국내 체류 미국 선교사들의 시선을 개선시켰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의 잔인한 진압이 미국인 선교사들과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국내

 

 

 

수원에서 만세운동주도한 기생조합의 김향화

 

 

3.1운동을 계기로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 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윤치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윤치호,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사건을 계기로 윤치호는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완용, 예종석 등의 3.1 운동 반대 발언이 알려지면서 이완용, 예종석 등에 대한 성토 여론이 조성되었다.

 

 

 

조선총독부 통치정책 변화

 

3·1 운동을 계기로 강경책 내지는 군사,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군인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한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 명조차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사실상 명칭만 변경된 것으로 경찰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

 

3·1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는 다른 점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3·1 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 또는 “천변괴이의 상”이라고 표현하였다.

 

 

 

해외

 

대한민국의 일부 사학계에서는 이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의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3·1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만세운동이라는 평화적 항쟁을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볼셰비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민중의 폭력적 시위와 연결되는 점,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 3·1운동의 한계가 무산계급 투쟁의 불완전성에 의한다는 담론을 파급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10. 비판

 

윤치호는 3.1 운동을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3.1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선동이 있다는 비판이 당대부터 제기되었다. 기독교 운동가이자 이화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창제윤치호에게 자신이 3.1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로, 만세 운동 당시 누군가에 의해 각종 미신과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고 밝혔다.그는 3.1 운동에 대해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투기, 미신, 허황된 말, 음모에 기초하고 있어서 동조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창제는 누군가 조직적으로 유포시킨 유언비어가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 시위로 만들고 급기야는 일본군의 잔인한 학살을 유도했다며 비판하였다.

김창제는 또한 다수가 참여해서 움직이는 일이 반드시 선량한 일이 아니라고 비판을 가하였다.

다수의 목소리가 곧 주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도 다수의 요구잖아요.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얘기도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연합이었잖아요.


김창제는 만세 시위가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점을 지적하였다. 김창제는 자신이 3.1 운동에 참여할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 뒤, 다수의 생각, 다수의 선택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아울러 김창제는 다수의 선택이 무조건 올바른 선택이고 민주주의라고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 윤치호는 그의 견해에 적극 공감하였다.

 

 

전국적인 참여 논란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106만 명이 참여했다고 나와 있고 학자들은 약 50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3.1 만세 운동에 전국민이 참여했는가 여부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1919년 3월 당시 일제 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신복룡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기록대로라면 전체 국민 중 6.31%가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