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86 : 일제강점기 31 (국내민족해방운동)

 

 

 

 

한국의 역사 986 : 일제강점기 31 (국내민족해방운동)

 

           

 

 

민족 저항의 시대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

 

 

1. 국내 민족해방운동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은 큰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안악사건과 105인사건으로 서북지방의 독립운동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제약속에서도 비밀결사의 형태로 지하에 숨어든 독립운동단체들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갔다.

 

1910년대 독립운동은 대체로 무력항쟁을 기본으로 하는 독립군을 직접 양성하거나 지원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독립후의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측과 주권재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측의 노선차이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독립의군부'(1913)를 들 수 있다. 한말에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전쟁에 참가한 바 있던 임병찬이 주도한 이 단체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무력항쟁을 벌였으나, 1914년에 임병찬이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자결함으로써 끝나고 말았다(1916). 이밖에 1907~1915년에 황해도.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채응언의 의병활동도 있었다.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로는 박상진.김좌진 등이 1913년에 조직한 '대한광복단'(후에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두르러졌다. 대구에서 결성된 이 단체는 각도에 지부를 두고 해외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하여 군대양성과 친일파 숙청을 도모하다가 1918년에 발각되어 잠시 그 황동이 위축되었으나, 3.1운동 이후에 활발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대종교에 귀의한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 유생들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안도지방에서 일어난 공화주의 단체로는 '조선국민회'(1917)를 들 수 있다.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과 기독교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단체는 하와이의 '대조선국민단' 및 간도의 독립운동단체와 연락하면서 군자금모금과 무기구입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3. 1 당시 평안도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밖에 사울에서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산직장려계'(1914), 함경남도 단천에서 조직된 '자립단'(1915), '자진회'(1918) 등 수많은 비밀결사가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교육문화활동과 실력양성에 치중하였다.

 

1910년대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것은 도시의 중산층과 교사.학생.유생 등 지식인층이 중심이었으며, 기독교.불교.대종교.천도교 등 종교단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또 사립학교와 사당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문화활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같이 축적된 역량이 1919년 3.1운동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비밀결사운동

일제는 무단통치를 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모든 항일조직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 철저한 탄압으로 짓밟았다. '병합'을 앞뒤로 일제는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계열 등 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일제는 의병운동을 뿌리 뽑고 민간인도 철저하게 탄압해 전국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으며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다져 나갔다. 일제는 '안악사건'(1911년)과 '총독암살미수사건'(1911년)을 만들어 계몽운동 계열 인물을 검거했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을 잇는 비밀결사로 나타났다. 대한독립의군부(1918)와 민단조합(1915)은 척사의병의 맥을 잇는 비밀결사였다. 1913년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참여했던 임병찬 등 유림세력이 국권을 회복하려고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1918년 이동하, 이은영 등이 민단조합을 만들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되었다. 이들 척사유립 계열의 비밀결사는 그저 독립을 옛 대한제국을 복구하는 것으로 생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공화주의를 내세우며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 친일 부호 습격과 처단 등을 벌인 비밀결사도 나타났다. 풍기광복단과 국권회복단을 통합해 만들어진 대한광복단(1915, 후일 대한광복회로 개칭)은 1916년 충청, 경기, 강원, 황해, 전라, 평안도로 조직을 넓히고 회원도 200명 남짓으로 늘렸다. 이 단체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이들은 상동광산, 직산광산, 경주의 우편차 등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1917년에는 친일 부호인 장승원과 도고면장 박용하 등을 처단했다.  대한광복단은 1918년 일제경찰에 조직이 드러나 해체되었다. 체포를 피한 일부 회원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그 뒤 암살단, 주비단 등을 만들어 반일항쟁을 이어갔다.

 

이 밖에도 비밀결사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친일 인사나 총독부 고관을 암살하려던 선명단(1915)과 자진회(1918),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이용하여 독립군을 지원하려 했던 조선국권회복단(1913),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만든 대조선 국민군단의 국내 지부인 평양의 조선국민회(1915) 등의 비밀결사가 있었다.

 

한편 한말 계몽운동의 맥을 이어 교육, 계몽으로 실력을 양성하려고 청년, 학생들을 조직한 단체들도 있었다. 이들 단체는 주로 청년, 학생이나 중소상공인, 기독교 인사, 근대교육을 맏은 지식인이 이끌었고, 대체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3년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송죽형제회는 교회를 이용하여 여성계몽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자금을 모아 해외로 보내거나 국내에 들어온 회원에게 숙박비, 여비를 지급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점조직 형태를 띠고 있던 이 단체는 1918년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 선생들을 중심으로 지방조직을 확대했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일제에 빼앗긴 경제권을 되찿으려는 뜻으로 조선산직장려계를 만들기도 했다. 이 외에도 대성학교 출신 학생 중심의 기성단(1914), 자립단(1915) 등이 있었다.

 

이들 단체는 비밀결사라는 특성 때문에 대중과 함께 운동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 대한광복회처럼 공화주의를 내세우는 등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사회를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두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여러 모습의 민족운동이 모여 3.1운동의 빝바탕이 되었다.

 

 

 

농민의 생존권 투쟁

토지조사사업으로 소농민의 토지소유권이나 경작권 등 농민의 권리는 크게 흔들렸고, 한층 강화된 지주제로 소작농민의 처지는 더 어려워졌다. 일제가 많은 임야를 국유림으로 만들고 임야를 이용하는 것을 막자 농민은 삼림자원이나 땔감마져 얻기 힘들었다. 이같은 일제의 수탈은 농민들의 생활기반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일제는 '무엇이나 세금을 메기고'. '세금의 종류가 너무 많으며', '토지 없는 사람에게 뽕나무를 억지로 분배하고 대금을 받아가며', 가마니 제조, 육지면 제배, 미작 개량, 비료 구매 등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려고 일제에 저항했다.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이란 일제가 불법으로 토지를 약탈하는 ㄱ덧으로 여기고 조사과정에서부터 조사원을 습격하고 측량을 방해했다. 1912년 5월 경상남도 진해 농민들은 자신의 땅이 국유지로 편입된 데 마죠서 일본인 지주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했다. 1913년 4월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임원리의 화전민 1천여 명은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려 일ㅈ베의 임야조사를 반대하여 측량 기사를 때려 죽였다.

 

농민들의 저항은 납세거부 투쟁으로 이어졌다. 통감부 때부터 조세 수탈을 강화해 왔던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지세를 늘리는 한편, 시장세, 연초세, 주세, 부가세 등의 세목을 덧붙여 재정을 늘리려 했다. 1910년 1월 평안북도 22개 군에서 일어난 시장세 반대투쟁, 같은 해 3월 경상남도 고성 농민들의 지세징수 반대투쟁은 일제의 조세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투쟁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농민들의 투쟁을 "사회 안녕을 어지럽히는 짓"이라고 규정하고 태형으로 다스리거나 투옥하는 등 단호하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농민들의 생존권 수호투쟁은 일정한 규율을 갖춘 조직 건설로 이어졌다. 또 사회단체와 연대하여 투쟁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1910년대 후반에는 자연발생적 경제투쟁에서 발전하여 주재소, 세무소, 면사무소와 같은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하는 등 점차 식민지 지배 자체를 반대하는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초보적 노동운동

1910년대 노동자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고, 정치의식이나 조직에서도 아직은 초보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등은 파업투쟁과 초보적인 노동자 단체를 만들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1912년 6건 1,500여 명, 1918년 50건 4,400여 명, 1919년 84건 8,200여 명이 참가한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대부분이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때로는 일본인 자본가를 감싸고도는 일제에 맞서 반일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18년 8월 강원도 고성군 동해면의 어업노동자들은 일본 어부와 조선 어부의 차별에 항의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일본자본가가 헌병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지만 조선 어부들은 주변 어부들과 힘을 합쳐 맞섰다.

 

1910년대 노동자들의 의식이나 조직 수준은 매우 낮은 상태였지만, 노동운동의 발전과 함께 노동단체들이 생겨났다. 노동단체들은 개항 뒤 제국주의 자본이 일찍 침투했던 부두, 광산, 철도 등지에 형성되었던 부두노동자, 화물운반부, 지게꾼과 같은 자유노동자들 사이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1905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전국 노동자 조직이 30여 개로 늘어났다. 이들 노동단체는 대개 서로의 생활을 돕거나 직업을 알선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1910년대 파업투쟁은 초기 노동운동이 그러하듯이 주로 생존권을 지키려는 수준에 머물렀다.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일제 식민지배라는 조건 아래 필연적으로 민족, 계급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그것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데 중요한 역활을 했다. 노동운동의 이러한 성격은 3.1운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힘차게 반일파업투쟁을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3.1운동의 전개

이미 을사늑약 이후로 일본의 강도적 침략행위에 대한 각계각층의 분노와 대각성이 일기 시작하였고, 1910년 이후의 야만적인 탄압통치를 경험하면서 그 분노와 각성은 계층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한층 확장되면서 민족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어 갔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평화적 만세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은 개항 이후 척사운동에서 시작하여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그리고 구국계몽운동으로 이어져 온 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국외의 특수한 상황에서 찿을 수 있다.

 

첯째,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1918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전체주의 국가의 패배로 끝나면서 이제 전 세계는 군국주의.제국주의가 후퇴하고 인도주의.평화주의.민족자결주의 시대가 온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도로 국제연맹이 결성되고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면서 세계 개조에 대한 믿음은 더욱 크게 확산되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동을 우리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호기로 포착하여 인도주의.평화적 도수혁명(맨손혁명)으로서 거국적 만세운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둘째, 세계정세에 예민하지 못한 일반 민중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북돋우는 사건이 1919년 1월 21일에 일어났다. 그것은 이날밤 덕수궁 함녕전에서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한 고종 황제를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황제는 일제의 독립운동 포기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고, 후궁 귀인 장씨의 소생 의친왕 이강(1877~1955)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후원하여 국민들의 흠모를 받다가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셋째,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제1차세계대전의 뒷처리를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을 기화로 맹렬한 독립외교를 펼친 것이 국내인사들에게 큰 감명과 자극을 주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는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 등을 대표로 보내려고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1919년에 들어와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1919.1~6)에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19년 2월에는 도코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2.8독립선언)를 발표하였다.

 

국내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그 동안 온건한 교육.외교.문화운동에 주력하여 왔으나 종교단체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인사,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대외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원칙에 따라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거사시기는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의 이틀전인 3월 1일 정오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도 이종일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어 전국에 미리 배포되었다.

 

서울의 민족대표들은 원래 군중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관헌에 이 사실을 알려 주어 자진 투옥되었다. 그 대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군중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 시위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이북지역의 주요도시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3월 10일을 전후하여서는 남한 일대로 파급되어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에까지 확산되었다. 5월말까지 지속된 이 운동에는 전국 218개군에서 2백여 만명의 주민이 1,500여 회의 시위에 참여하여 그야말로 거족적인 독립의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 주도층은 지식인.청년.학생.종교인 등이었지만, 중소상공인과 노동자.농민 등 모든 계층이 망라되었다.

 

3.1운동은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출발하였지만 시위가 확산될수록 동맹파업과 예금인출 그리고 길거리 전차공격과 광산의 광구파괴,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습격 등 점차 폭력적 형태로 발전해 갔다.

 

거족적인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군대.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시위자드을 폭도로 규정하여 발포, 살륙 그리고 고문, 방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특히 농촌에서의 탄압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경기도 화성군에서는 마을 주민을 모두 학살하거나 교회에 가두어 불태워 죽이는 등 전국적으로 7천 5백여 명이 피살되고 4만 6천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1만 6천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리고 49개소의 교화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탔으며 유관순 여사처럼 순교하거나 체포당한 인사들의 고통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3.1운동은 당장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 일제의 파쇼통치를 소위 문화통치로 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은 또한 세계 약소민족국가들의 민족운동을 고양시키는 파급효과를 가져왔는데,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1919)과 인도에서 비폭력 무저항운동 그리고 베트남.필리핀.이집트 등지에서 민족해방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