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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0 : 일제강점기 35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한국의 역사 990 : 일제강점기 35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 망명정부의 탄생과 활동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를 한성정부로 대통합하다'

 

3.1운동은 망국으로 위축되었던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사건이었다. 이제 민족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중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건설한 임시정부도 있었다.

 

3.1운동이 확대일로를 걷던 1919년 4월 17일 총독 하세가와는 <됴쿄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소요 폭동은 군대에 위임하고 지방의 질서정리와 민심 융화책 등 소요 후의 정리는 지방 행정관헌 손으로 행하기로 했다"며 "소요의 근원이 상해에 있음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요 사태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3.1운동의 결과물인 임시정부를 3.1운동의 원인으로 지목한 견강부회지만, 이 무렵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3.1운동을 앞뒤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서울.상하이.노령 등지의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총괄하여 지도하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는 독립 후의 국가를 준비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이 대한제국을 건설하는 촉진제가 된 것처럼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높아진 반일감정이 정부건설운동 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19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국내외에서 민주공화국 건설을 위한 여러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제일 먼저 당시 러시아령에는 한인 50만 가까이가 거주하고 있었고 망명 인사들이 많이 모인 소련의 블라디보스톡(해삼위)에서 3월 21일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 이동휘를 군무총장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가 세워지고, 이어 두 번째로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4월 11일에 대한민국 가(假)정부가 세워졌다. <임시헌장>을 만들어 3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가정부는 의정원의장에 이동녕, 국무총리에 이승만, 국무위원을 임명했다.

 

세 번째로 세워진 정부는 3.1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3도 대표를 모아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한 '한성정부'이다. 여기에는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에 이동휘를 추대했다. 한성정부는 형식상 국민대표가 세우고, 미국의 UP 통신이 이를 보도하면서 법통상으로 가장 권위가 있었다.

 

서울의 한성정부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다. 한성정부 수립의 주도자 중 한 명인 한남수는 경성지방법원의 1919년 11월 26일자 공판에서 홍면희와 만나 "독립선언 이래 각처의 시위운동이 통일돼 있지 않으므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 단체를 망라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의견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대회를 열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이야기였다.

 

목사 이규갑과 나중에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는 김사국 등이 여기에 가세했다. 이들은 4월 2일 13도 대표들을 비밀리에 인천 각국공원으로 불러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천도교 대표 안상덕, 예수교 대표 이규갑, 장봉, 유생 대표 김규, 불교 대표 이종옥 등을 비롯한 각 지방 대표가 모여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 직후 서울 내자동의 현직 검사 한성오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한남수 등을 상해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상해와는 3.1운동 직전 민족대표의 권유로 망명한 현순을 통해 몰래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4월 23일을 국민대회 날짜로 결정했다.

 

이들의 계획은 3.1운동보다 진일보한 것이었다. 종로 서린동 봉춘관에 13도 대표가 모여 국민대회라는 간판을 달고 동시에 종로에서 민중과 함께 일제히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으로, 일제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전략이었다. 미리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2호를 수천 장 찍었다. 4월 23일 자동차 3대를 빌려 각각 '국민대회, 공화만세'라고 쓴 킨 깃발을 달고 남대문-서대문-동대문을 질주하면서 임시정부 선포문 등을 뿌리기로 한 것이다.

 

경신학교의 강우열은 동대문에서, 배재학교의 김병호는 서대문에서, 또 다른 학생 유기원은 창덕궁에서 출발하고, 김효식은 장소를 특정하지 않고 서울 시내 일반에 유인물을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실행을 담당했던 보성학교의 장채극은 공판에서 "네 사람이 유인물을 배포한 것을 확인했는가?"라는 질문에 "물론 배포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일제 기록에도 4월 23일 실제 국민대회가 열렸음을 전한다.

 

"4월 23일 낮 12시 10분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4~5명의 학생 같은 자가 3본의 소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질주하여 종로서 방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추적하자 소기를 종로통에 버리고 관철동 쪽 소로로 도망하여 소재가 불명했는데 24일 5명 중 2명이 체포되었다. 소기는 목면제이며 2본에는 국민대회라고 쓰고 1본에는 공화만세라고 묵서했다(......) 목하 신문 중에 있다."

                                                                                             -<한국민중운동사료>, 국회도서관, 1979년 -

 

4월 23일 발표한 '국민대회 취지서'는 결의사항으로 1)임시정부조직, 2)일본 정부에 대해 통치권 철거와 군비 철퇴 요구, 3)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정, 4)일본 관청에 재직하는 조선인 관공리 일절 퇴직, 5)일반 인민은 일본 관청에 모든 납세 거절, 6)일반 인민은 일본 관청에 대하여 일절 청원 및 소송행위를 행하지 말것"등을 결의했다. 약법 제1조로 '국체는 민주제도'를 결정했고, 2조로 '대의제도'를 정체로 채택했다.

 

한성 임시정부는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부 총장 이동녕, 재무부 총장 이시영, 법무부 총장 신규식, 군무부 총장 노백린 등을 각료료 선정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결성한 정부였지만 정부 각료는 모두 해외 망명 중인 인사로 선임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한국, 소련, 중국 세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를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엇는데, 지리적으로 망명정치인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가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통합임시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9월 6일 세 정부를 통합하고 <임시헌장>을 개정하여 57개조에 이르는 <임시헌법>을 만들고, 이에 따라 9월 11일에 정부 각료를 임명했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각료로는 내무 이동녕, 외무 박용만, 군무 노백린, 재무 이시영, 법무 신규식, 학무 김규식, 교통 문창범, 노동국 안창호가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것은 대한제국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임시헌법>에서 "구황실을 우대한다"고 천명한 것이나,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것, 대한제국의 정치목표였던 민국의 호칭을 받아들인 것도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는 3.1운동에서 전국민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뜻을 받드는 것이기도 하다.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왕 이강(의왕)을 탈출시켜 추대하려던 시도(대동단사건)가 잇었으나, 1919년 가을 만주에서 일본 관헌에 붙잡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강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한일합방조약의 무효를 주장한 고조오항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중국 언론에 폭로했다. 만약 이강이 합류했더라면 임시정부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그래도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이 대통령에 임명된 것은 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정체인 제정을 공화정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부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대한'이라는 국가는 이어지고, 정부가 바뀐 것이다.

 

임시정부는 분열된 민족운동을 통합하고, 국제외교를 통해 주권국가로 인정받는데 주력했다. 하부조직으로는 본국과 연락을 위해 도, 군, 면에 책임자를 두는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했으며, <독립신문>을 기관지로 발행했다.

 

외교활동으로는 1919년 6월에 제1차 세계대전의 뒷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을 파견하여 20개 항의 <독립청원서>를 각국 대표에게 발송했다. 그 요지는 1)일본 및 열국은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에 기초하여 독립을 보전할 책임이 있으며, 2)일본은 속임수와 폭력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했으므로 열국은 응당 이에 간섭해야 하며, 3)한국인은 3.1운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독립을 선포했으며, 4)한일합방조약의 영원한 폐기가 파리강화회의의 권리인 동시에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각국이 승인한 대한제국을 한국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약탈한 <한일합방조약>을 무효화할 책임이 일본과 세계 각국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외교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위싱턴, 파리, 북경 등 주요 강대국의 수도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강대국의 승인을 얻고자 했다. 특히 대통령 이승만은 국제외교가 절실하다고 느끼고,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인사들은 외교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서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은 상해로 와서 6개월간 체류하면서 사회주의 계열의 국무총리 이동휘를 해임시키고(1920), 이동녕, 신규식, 노백린을 번갈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임시정부 안에서 노선갈등이 일어나자 이를 조정하기 위해 1923년 1월 국민대표회(1923.1~5)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도 임시정부는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안창호 등 상해파 공산주의 등 57명)와 완전히 해체한 후 새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이상룡 등 민족주의 좌파계열과 소련내 공산주의자 등 80여 명) 등, 그리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두자는 현상유지파(이동녕, 김구 등)가 엇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후 개조파와 창조파는 대부분 상해를 떠나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는데, 현상유지파는 1925년에 이승만을 해임시킨 다음 두번째로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 중심의 의원내각제로 바꾸고, 창조파의 박은식(1858~1925)을 제2대 대통령으로, 이상룡을(1858~1932)을 국무령으로 추대했다. 이어 1927년에는 세 번째로 헌법을 개정했는데 국무령을 없애고 집단지도체제 형식의 주석제를 채택했는데, 이동녕과 김구(1876~1949)가 잇달아 주석에 취임했다. 또 이때 한국독립당을 처음으로 결성하여 정당정치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 일본의 만주침략이 시작되자(만주사변), 임시정부는 무력투쟁노선을 따르기 시작했다.1932년에 주석 김구는 무당공격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는데, 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동경 요요기연병장에서 히로히토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4월에 윤봉길은 채소장수를 가장하여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황생일 경축식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죽게 했다.

 

애국단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김구를 비롯한 각료들은 상해를 떠나 항주, 가흥, 진강 등지로 이동했다. 이무렵 중국과 미국에 흩어져 있던 우파와 좌파의 독립운동단체들은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1933년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는데, 1935년에는 노선갈등이 일어나 '조선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으로 갈라졌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임시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결성하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과 힘을 합쳐 대일전선에 참가했다. 그 사이 전세에 따라 국민당정부가 수도를 옮기자, 임시정부도 이를 따라 기강(남경부근)과 중경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한국국민당'을 '한국독립당'(1940)으로 다시 개편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택하여 좌우통합노선을 채택했다.

 

임시정부는 주석의 지도력을 높이기 위해 1940년 10월에 네번째로 헌법을 고쳐 주석중심제로 바꾸어 주석인 김구의 지도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뒤 1941년에는 좌파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1942년에는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약 400명)도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1944년에는 이렇게 확대된 인사들을 지도부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섯 번째로  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과 행정부로 나누었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광복군의 일부는 인도, 미얀마(버마)전선까지 진출하였고, 일부는 미군의 특수부대인 OSS(전략정보처)와 협동작전을 벌였으며, 또 일부는 일본군에 편입되어 있던 한국인을 광복군으로 복귀시키는데 노력했다. 일본 관동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들어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렇게 적극적인 항일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소련의 반대로 중국과 미국 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