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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늦가을 10 :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

 

 

 

 

강남의 늦가을 10 :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

 

 

 

                                                                              제3구간 흰구름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북동 방향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

 

지난주 목요일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북한산 둘레길은 총 약 70Km에 달하는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자락을 연결한 환상 둘레길로 서울시 6개구(도봉, 강북, 성북, 종로, 서대문, 은평구)와 경기도 3개시(의정부, 고양, 양주시)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시범구간으로 순례길(수유분소~우이동 솔밭공원)을 시작으로 개발을 시작하였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공동으로 기획, 개발한 북한산 둘레길은 국민의 걷기문화 욕구에 부응하면서 보다 체계저긍로 북한산국립공원을 관리하고, 무분별하게 조선된 비지정 탐방로인 샛길 등을 페쇄, 정리하여 자연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자연을 보호하면서 탐방객들에게 자연과 문화, 역사 등을 느낄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걷기 편한 길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산책로로 둘레길은 전체 71.8km중 서울시 구간과 우이령길을 포함하여 2010년 9월 7일 45.7km를 개통하고, 2011년 6월 30일 나머지 26.1km구간을 개통하였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되어 걷는 둘레길은 물길, 흙길, 숲길과 마을길 산책로의 형태에 각각의 21가지 테마를 구성한 길이다.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둘레길은 우리의 소중한 자연을 보존하는 길, 그리고 역사와 문화, 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북한산둘레길 전체구간 지도

북한산둘레길 전체구간 지도

 

 

먼저 우리는 총 21개 구간 중 1번 구간부터 시작하여 3구간까지 걷기로 했다. 제1구간인 소나무숲길은 거리 2.9킬로미터, 시간은 1시간 30분 소요, 다음 제2구간은 순레길로 거리 2.3킬로미터, 시간 1시간 10분 소요, 제3구간은 힌구름길로 거리 4.1킬로미터, 시간 2시간 소요 총 9.3킬로미터, 시간 4시간 40분 정도 소요될 예정이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시절은 가을이 지나가는 늦가을 문턱에 섰다. 금년 겨울은 춥고 길다고 한다. 그래서 눈도 많이 내릴 것이고 길바닥이 얼어 걷기에도 불편할 것이며 자전거 타기나 등산도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전거용 방한화와 장갑, 두건, 손난로 등 복장과 장비를 점검하고 등산용 아이젠도 기름칠하여 정비해 두어야겠다. 또 지난주에는 겨울을 대비하여 인터넷으로 염화칼슘 25킬로그램을 구입하여 통에 담아 비닐로 닾어 현관 앞에 비치했고, 눈밀대는 판제를 구해서 만들 예정이다.

 

   

 

 

정부 시책에 따라 이번 11월부터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그래서 더럽고 찌든 음식물 쓰레기통도 물로 깨끗이 씻어 내부를 비닐로 덮었다. 이 쓰레기통은 1년내내 관리인이 없는 공동주택은 아무도 물로 쓰레기통을 청소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냄새와 날파리가 득실거리고 더럽기 그지없다. 길을 가다가 보면 건물 앞에 큰 쓰레기통이 비치되어 있는데 외부는 물론 더럽기 그지없고 여름이면 냄새도 많이 나고 뚜껑을 열때마다 냄새가 지독하다. 통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달라붙어 쾤해한 냄새가 난다. 이런 더러운 골목 환경을 방치하는 구청이나 청소업체, 그리고 음식물을 버리는 사람들이 모두가 무감각하다.

 


 

  

 

 

구청에서는 여름철에 자주 소독도 하고 수거차량에 물호스를 연결하여 물청소도 가끔해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는 담당자가 없다. 음식물 수거차량도 옆을 지나가면 냄새가 지독하다. 환경미화원 몸에는 그런 냄새가 베일 것이다. 그러나 받는 보수가 고액이라 그런 냄새는 참고 견디고 있을 뿐이다. 시장, 구청장, 청소담당 공무원들이 음식물 쓰레기 차량을 하루만 타고 다니면서 이런 실태를 파악하면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런 생각을 하는 공무원이 없다.

 

 

 

우리집 HP복사기가 말썽을 부린다. 현관에 안내장을 붙이려 했는데 자주 인쇄를 하지 않는 편이라 잉크가 말라버렸다. 지난번에 테크노마트에 가서  재생잉크를 사다 사용하였는데 벌써 말라버린 것이다. 보충용 잉크를 주사기로 넣고 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복사기는 장기간 방치하면 잉크가 모두 말라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두번씩 인쇄를 해주어야 하고 계속 전기도 켜 두어야 한다고 한다. 그건데 잉크값이 보통이 아니다. 정품 잉크 몇 개면 복사기를 새로 사는게 낳을 듯싶다. 할 수 없이 인터넷으로 정품 검정 2개와 재생 검정 및 칼라를 각각 1개씩 구입했다.

 

 

  

 

 

복사기 제조업체는 복사기보다 소모품인 잉크로 장사하는 것이라 한다. 보통 일반사무실에서 대량으로 사용하는 무한리필 잉크도 있지만 가정에서 가끔 사용하는 것처럼 이런 소비자를 위해서 저렴하게 마르지 않고 장기간 복사기 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과 제품은 없는 것일까?  물론 앞으로는 저렴한 복사기에 저렴한 정품 잉크가 마르지 않고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기존의 복합기, 고가제품의 복사기 제조업체는 그동안 누린 이윤의 행복보다 불량한 양심을 지탄을 받을 것이고 소비자들이 외면함에 따라 문을 닫을 것이다.  

 

 

  

 

 

 

 아래는 지식인들의 칼럼을 인용한 내용이다.

 

 

 

자전거의 진화

 

자전거는 인류가 만든 최고 발명품 중 하나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세계를 바꾼 101가지 발명품 중 8위로 자전거를 선정했다. 자전거는 가장 계급차별이 없는 이동수단이자 자동차의 원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오하이오주에서 작은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면서 자전거를 이용해 최초의 풍동실험(터널 내 공기저항 실험)을 했고, 자전거 수리도구를 이용해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자전거는 첨단을 달리는 공산품이었다. 그 후 자전거의 기술력이 자동차 제조에 적용되고, 전국 단위의 자전거 수리점은 자동차 정비소와 주유소 등으로 바뀌었다.

 

자전거 도로는 자동차 도로나 고속도로로 진화했다. 자전거가 자동차에 자리를 내줬지만 간편한 이동수단이자 운동도구로서 기능은 여전하다. 자전거가 이 땅에 들어온 지 벌써 120여년이 지났다.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 법률과 제도가 정비된 지도 20여년이 되어간다. 많은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지고, 자전거 이용이 용이해져서 주말에는 지하철 등을 이용한 자전거 이동도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이동 거리의 현저한 연장을 가져온 것이다. 이른바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란 용어가 이제 낯설지 않고 이들을 위한 의류·용품시장도 달아오르고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야말로 현대의 엘리트족이자 환경보호와 지구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야 하는 정부는 말로만 자전거 생활화를 외치지만 장차관을 포함한 공무원, 국회의원. 환경론자들이 몇이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지는 의문이다. 자전거를 차량으로 분류한다는 것도 무리다. 자전거 보험도 그렇고 자전거 전용도로, 자전거 점포 및 정비.수리점, 자전거 관련 법률 등등 아직도 갈길은 멀어보인다.

 

  

 

 

부실한 공기업

 

공기업은 '공공기관이 소유나 경영의 주체가 돼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기업'을 지칭한다. 공기업들은 1960년대부터 성장해 왔지만 정부의 지나친 통제나 간섭, 경영 미흡 등이 빚어낸 비능률로 인해 전반적으로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사원은 공기업 경영구조 실태에 대한 특별감사를 통해 “우리 공기업은 국민이 주인이라기 보다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 '적나라한 현실'을 꼬집은 바 있다. 대부분 공기업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설립목적과 무관한 사업에 무차별로 뛰어들었다 엄청난 적자를 냈다. 또 몸집 키우기와 마구잡이 예산집행 등으로 내부 구성원끼리 예산 나눠먹기가 심각한데다 도를 넘는 비리 등 무책임 경영이 문제로 지적됐다. 결국 공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실과 비리로 귀결되고 그에따라 공기업 사장의 첫 번째 자격조건도 '책임감'이 된다. 국민의 기업인 공기업을 국민을 대신해 책임있게 운영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주인인 국민은 출신대학이나 한 두 건의 공과만으로 공기업 사장에 낙점되거나 배제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야당의 무차별적 정치 공세도 문제지만 공기업 사장 후보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 다음 자격조건은 '조직관리 경험과 경영능력'이다. 공기업 내에 만연한 부정과 비리, 도덕적 해이를 바로 잡고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조직관리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 또 공기업이 비록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진 않지만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적절한 경영수지를 유지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문제는 공기업 CEO 후보자가 이런 자격을 갖췄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냐는 점이다. 책임감과 능력은 소위 '스펙(학력과 경력)'만으로 확인할 수 없다. 고위 공직자 선임 때만 인사검증이 필요한 게 아니라 국민의 기업인 공기업 사장에 대해서도 철저한 인사검증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우이동 계곡 전경

 

우리는 우이령길 입구에서 잠시 헤메다가 계곡으로 올라갈뻔 했다.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안내판을 보니 아래쪽에 둘레길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둘레길을 찿아서 걸었다. 평일인데도 등산온 사람들이 계곡으로 올라가자 우리도 따라 올라간 것이다. 손병희 선생 모역을 지나 약수터에 도착했으나 약수터는 말라버렸고 이용문 장군 묘역을 지나 솔밭근린공원에 도착하였다.

 

근린공원에는 어린이들이 소풍을 나왔는지 옹기종기 모여 선생님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잠시 쉬면서 음료수도 마시고 과일, 고구마도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제2구간으로 출발했다. 

 

                                                                            제2구간 순례길 입구 솔밭공원에서 한 컷

 

2구간도 비교적 걷기에 좋다. 크게 언덕길도 없고 계단도 없이 오솔길을 걸었다. 주변에는 나무잎들이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사람들도 별로 없다. 왼쪽 보행 통로가 만들어져 있는 걸 보니 휴일에는 이곳 둘레길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양이다.

 

 

                                                                                                  보광사 전경


  

보광사는 1788년(정조 12)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스님이 신원사를 창건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일부 건물만이 남아 법등을 겨우 이어 왔었다. 그러던 것을 1979년 남산당(南山堂) 정일(正日) 스님이 포교의 원을 세우고 이곳에 주석하면서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11월 보광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한가?

 

세계적 투자회사인 메릴린치에서 파생금융상품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합법적 도박판’에 회의를 느껴 퇴사 후 10년간 100개국을 여행한 메자키 마사아키(目崎雅昭)가 쓴 ‘국가는 부유한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원제 ‘행복도상국 일본’)라는 책에 일본과 마찬가지로 ‘행복도상국’인 한국의 민낯이 분석돼 있다. 후배 기자가 최근 일본 게이오대학교에서 연수하면서 번역한 이 책은 행복 국가의 조건을 분석하고 개인과 사회가 행복해지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행복지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기후 등 자연환경을 비롯해 소득 격차, 고용, 자살률과 출산율, 종교 등 다양하다. 자살률이 낮다고 반드시 행복지수가 높지는 않지만, 자살률이 높은 나라 중 행복지수가 높은 곳은 없다. 하지만 이들 요소는 국가의 행복지수와 절대적인 상관관계는 가지지 않는다. 메자키 씨는 행복 수준과 제일 밀접한 지표는 ‘사회적 관대함’이라고 말한다. 여성이나 성 소수자 등에게도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나라가 대부분 행복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사실 저자는 부자 나라이면서도 국민들은 별로 행복하지 못한 일본을 진단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책을 썼다는데 한국도 일본과 닮은꼴이다. 높은 자살률, 권위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분위기, ‘예스맨’을 선호하는 몰개성 사회, 소수자에 대한 미흡한 배려, 소통과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문화 등은 한국을 행복 후진국에 머물게 한다.

여군 장교가 상사의 성추행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사건은 여성 대통령 시대에도 여전히 배려받지 못하는 여성의 현실을 웅변한다. 진영 논리와 집단주의에 빠져 벼랑 끝 대치를 계속하는 정치권은 국민을 피곤하게 한다.

박근혜정부의 경제정책도 행복의 길에서 엇나가는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기업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기보다 정부가 윽박지르면서 몰고 가려 한다. 무상급식 등 표를 의식한 살포식 복지정책은 정작 지원이 필요한 약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이는 역효과를 낳는다.

국민 행복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이나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정부 규제를 최소화하고 사회의 자율성을 높이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이끌어낸다.

 

  

 

 

  

                                                                                             4.19 묘역

 

 

제2구간 보광사를 지나면 4.19 묘역이 나타난다. 젊은이들은 4.19 혁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것이다. 4.19 혁명은 우리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일대 대혁명이었으나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 야욕으로 부정선거를 저지르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무차별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마산앞 바다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최류탄을 맞고 죽은 시신이 발견되자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혁명의 결과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이승만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도주하였고, 이어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혁명 주체세력인 학생들과 정치인들 간에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다. 그러자 정치와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고 북한의 대남 침략 움직임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고 일부 혁명주체 세력은 대북 협상을 주장하는 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전혀 점 칠 수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에 의한 5.16 군사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혁명 주체세력들이 저 묘역에 말없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둘레길 곳곳에는 이준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여러 묘지가 산재해 있다. 그들이 흘린 피로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고 지금 배부른 행복감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 사회적 비리와 부패, 정의와 공정이 사라진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를 둘레길을 걸으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미완의 혁명 4.19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4월 19일 경찰은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했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제2공화국 출범

5월 민,참의원 총선거 후보 등록이 있었고, 이때 자유당원들에 대한 집단적인 낙선운동과 선거방해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고관이자 부산정치파동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장택상, 이범석 등은 학생들의 후보자 사퇴 요구를 묵살하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을 선택했다. 7월 11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 훈령에서 장면을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임을 주지시키고, 이 점을 허정에게 말한 뒤,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

 

6월 12일 내각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국무총리로 내각수반이었던 허정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8월 12일 국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을 선출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이자 한민당 출신이었던 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했고, 이 때문에 민주당 신파가 집단 반발, 자유당은 자유당대로 민주당을 흔들기 위해 반대하여 낙마했다. 8월 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제2공화국은 얼마 못 가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의하여 막을 내리게 되고 1979년까지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평가

 

 

공주 노인회에서 세운 4·19 혁명 기념비

 

혁명의 의의

김성식은 당시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혁명의 의의를 7가지로 제시했다.

  1. 민주주의는 가열찬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경험한 점.
  2. 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는 점.
  3. 혁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
  4.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했다는 점.
  5. 혁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6. 혁명으로 세계 민주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
  7. 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 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은 4월혁명의 정신은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 반분열통일, 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단언하고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권타도뿐만 아니라 향후 미래의 공동체적 이상을 제시했다면서, 4월혁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 할 시원, 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 목표로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혁명을〈낡은 것, 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 생명이 돋아나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온갖 인간차별적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은 모든 퇴영적인 것, 침울하고 억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한국인은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가 있다.

 

 

 

 

 

부정적 평가

역사학자 겸 언론인 한홍구에 의하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때문에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분출을 수용하지 못하였고,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자유당 지지세력과 일부 우익세력 등 일각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태'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 허정 등은 '4.19 사태'라고 평가하였다.

 

허정은 '4.19 사태는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허정은 또 '4월의 사자들의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4.19 사태는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4.19 의거는 혁명이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

한편 보수주의 논객 지만원 등은 4.19 당시 이석, 김용규 등 간첩이 침투하여 소요사태를 조장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4.19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기붕이라는 관측도 있다.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에 의하면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으로 만들려던 것이 4.19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그에 의하면 야당 대통령 후보가 죽었으니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이미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부통령은 야당은 장면이고 여당은 이기붕인데, 그 전에도 장면 박사가 부통령을 했고 굳이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든지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자유당에서 애를 썼다. 나쁜 꾀를 내고 무리수를 두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이준 열사 묘역

 

우리는 제2구간이 거의 끝날 지점에서 독립투사 안내판을 보면서 한눈을 팔다가 둘레겔이 아닌 우측으로 백련사가 있는 대동문으로 올라가는 계곡으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굽어진 길이나 꺽이는 지점에는 둘레길 안내판이 잘 비치되어 있었고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나 이 길은 안내판도 없고 좀 어쩐지 이상하였다. 

 

좀 올라가다가 체육시설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 계속 올라갔더니 백련사란 절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그곳 백련사 근방에 도착하여 벤치에 앉아 음료수와 과일을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점점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안내판도 없어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대동문으로 올라가는 길을 우리가 올라갔던 모양이었다.

 

다시 길을 내려가다가 둘레길을 찿아 제2구간을 주파하였다.

 

  

                                                                             이준 열사 묘역 입구에서 한 컷

 

  

제3구간은 계단이 시작되었는데 안내판에  땅소유주가 항의하여 둘레길을 윗쪽으로 돌아서 가라고 되어 있었다. 3구간은 거리가 4.1킬로미터나 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다리가 차츰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나무 계단을 오르고 호박돌 계단을 오르내리고 하면서 점차 지쳐갔다. 화계사를 지나 한참을 가다보니  팔각정처럼 생긴 4층 높이의 전망대가 나타났다. 구름전망대인가? 마누라는 다리가 아프다며 쉬고 난 힘들지만 전망대로 올라가서 주변 풍경을 사진 찍고 내려와서 다시 걸었다.

 

3구간은 둘레길에서 노약자들에게는 좀 무리다 싶다. 거리도 멀고 오르막이 많아 다리에 무리가 올 듯 싶다. 지난번에 비해 이번에는 마누라가 다리가 아프단다. 신발 속에 모래가 들어갔다는 둥 투정을 부리면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라디오 주파수도 잘 잡히지도 않아 음악도 들을 수가 없었다.

 

3구간이 끝날 지점에서 북한산 생태숲까지는 4구간 안내판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내려가는 길을 찿다가 계속 가다보니 생태숲에 도착하였다. 생태숲에서 아파트쪽으로 내려가니 마을버스 정류소가 나타났고 우리는 1116번 마을 버스를 타고 수유역에 도착하여 지하철 4호선, 5호선을 갈아타고 타고 마장동 우시장으로 갔다.    

 

 

 

 

4시가 넘었고 몸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마누라가 마장동 우시장에 들러 소고기를 먹고 가잔다. 퇴근 시간이라 2호선 지하철도 만원일텐데......, 힘들고 짜증도 났지만 우시장에 언제 다시 올 것인지 알 수 없어 소고기를 특히 좋아하는 마누라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냥 집으로 가도 욕먹을 것 같아서 참고 가는 수밖에......

 

우시장에 도착하니 점포들은 현대화되어 정리되어 있고 점포마다 잘려진 소머리통, 다리 등 각부위가 전시되어 있다. 동양에서 소는 정말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동물인데 살아서는 농사에 큰 보탬이 되었고 우마차로 짐도 나르는 등 옛날에는 농촌에서는 가장 귀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죽어서는 주인에게 돈이 되었고 자신은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가 되어 버려지는 부위가 없이 인간의 먹이감으로 소비되었다. 그런 소가 먹이가 되어 인간의 몸에 들어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지금은 육우로 대부분 사육되지만 소처럼 인내하고 희생하는 동물은 드문 것 같다.

 

 

 

 

 

 

어린 시절 도살장의 기억이 떠올려진다. 난 어릴적부터 농촌 집안이 가난하여 소고기를 잘 먹을 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소를 잡는 도살장이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읍내장이 서는 날은 통상 소를 잡았다. 소는 영물이라 도살장으로 끌고 갈 때 안 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주인이 억지로 땡겨서 겨우 끌고가서 묶어 놓으면 목놓아 울면서 눈물을 흘린다. 초등학교 시절 마을 친구들과 같이 몰래 숨어서 창틈으로 도살 장면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끔직했다. 소가 사람 손에 이끌려 도살장 문안을 들어서면 문안쪽 벽에 숨어 있던 백정이 도끼로 소의 정수리를 한방에 내리치면 '퍽' 쓰러지면서 발버둥치며 숨을 헐떡이다가 그 자리에서 결국에는 죽는다. 정말 보기에도 너무나 끔직한 도살 현장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소를 잡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잔학함을 소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를 잡는 날은 가끔 어머님 심부름으로 바가지를 들고 가서 소 뒷고기(내장, 간, 천엽 등)를 한바가지 외상으로 사오면 집에서 어머님은 큰 가마솥에 무우, 파 등과 같이 썰어 넣고 소고기국을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비싼 좋은 부위 소고기는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난 소고기 보다는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마누라님은 소고기를 더 좋아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고기를 먹는다는 기대감에 아프던 다리도 안아픈지 마누라는 앞장서서 잘도 걷는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면서 뚝방집을 찿아가서 보니 먹자골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골목길 안쪽에 있는 뚝방집을 찿아가서  간, 천엽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소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리에 알이 베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자전거를  짧은 코스로 겨우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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