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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54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9

 

 

 

한국의 역사 954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9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잘못 꿴 단추

 

1882년 8월 20일 왕명으로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지고 첯 번째 촌장으로 섬에 내왕한 지 10년이 되는 경상도 함양사람 전석규가 임명되었다. 또 강원도 평해 군수가 겸직 군수 발령을 받았다. 이때도 물론 독도에 대한 통치권은 명확하지 않았다.

 

1897년 일본 오키 섬의 어선이 조난을 당하자 이를 수색하러 갔던 일본 구조선이 독도를 발견하게 된다. 요사부로라는 일본 선장은 섬을 뒤덮고 있는 물개 떼들을 보고 군침을 흘렸다. 그는 머리가 좋았던 모양이다.

 

"여러 가지로 전문가들을 만나 조사한 결과 그 죽도라는 섬은 조선의 영토가 아니고 현재로서는 무소속이다. 그러므로 그걸 한시바삐 우리 영토로 편입한 다음 동시에 나한테 임대하여 어장을 설치하도록 해주기 바란다." 라며 장부에 요청하였다.

 

당시 일본은 강력한 군국주의 아래 전 관료들도 절반이 군인이었다. '울릉도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선에 빼앗겼지만 이 바위섬은 그동안 누구 것이라는 공식협의가 없었다. 우리가 뺏으면 우리 섬, 조선이 뺏으면 조선 섬.' 이런 목표로 해군성, 수산성, 내무성, 외교성 등에 끈질기게 요구한 결과 결론이 나오고야 말았다. 

 

 

 

                                                                                       울릉도 요도

 

 

 

내무대신 발의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에 대한 심사

 

"북위 37도 30분, 동경 131도 55분, 오키 도에서 서북 85 해리에 있는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령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형적이 없고 이미 우리 어민들이 현지에서 어로작업을 펼친 지 오래 되었는바, 차제에 이름을 죽도로 확정짓고 지금부터 본 현 시마네 현 소속의 소관으로 정하는 바이다."

 

이런 사실을 그들은 자그만한 바닷가 마을인 시마네 현의 관보에 고시하고 지방 신문의 광고에 실었다. 이것이 일본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법적 근거의 하나다.

 

그다음 3개월이 지나 일본 해군성은 군함 교립호를 독도에 파견하여 을릉도와 독도 사아에 해저전선을 깔았으며 바위산 정상에는 망루를 설치했다. 독도에 세운 망루는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서 한국 영토에 설치한 20개 망루 중 가장 나중에 설치한 것이다.

 

뒤늦게 평해 군수의 보고로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지만 이미 때는 늦은 때였다. 조선은 일본에게 목덜미를 접혀 외교권도 잃고 국가가 폐업을 하려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니 무슨 대책이 나오겠는가.

 

우리나라에서 독도라는 명칭이 공식기록에 사용된 것은 1906년 처음이다. 그때는 일본에 합병당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당시 울릉도 군수였던 심홍택이 보고서를 보내왔다.

 

"을릉도에서 동쪽으로 백리 지점에 하나의 섬이 있는데 이름은 독도라하여 원래부터 울릉도에 속하는 바위섬입니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이미 너무 늦은 시기였다.

 

해방 후 패전한 일본이 무조건항복한 상태에서 국제적인 발언을 할 수 없던 사이 자유당 정부 시절 우리 민간 독도의용대가 파견되었다. 그 후 우리 경찰이 선점을 해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지만 독도의 장래는 사실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 조선의 왕들과 권위주의만 가지고 살았던 대신들이 잘못 꿴 단추가 지금 우리 후손들을 옥죄고 있는 것이지만 조선왕조가 새삼 원망스럽다. 그뿐 아니다. 나라가 일제에 망하면서 일제 식민지배는 물론 역사가 모조리 왜곡되었고 왕릉이 도굴되고 문화재가 반출되었으며 많은 물자가 수탈되었다. 또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끌려가 전쟁터에서, 정신대로, 탄광에서 광부로 이름모를 곳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또 남의 힘에 의해 해방이 되자 반도가 두 동강 나 버렸고 남북이 사상과 이념을 달리한 정권이 세워지고 북에 의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버렸고 이름도 모르는 유엔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조선 민족이 살상되었다. 그 후 휴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중임에도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조선이 망한 것은 무능한 조선 왕조와 지도층에 의해 공도정책이 지속되어 왔고 해양진출을 거부하고 반도 안에서 현실에 안주하면서 지배층인 양반사대부들만 오로지 백성들을 수탈하며 호의호식이나 누리며 허례허식에 빠져 날마다 제사, 장례를 치루기 바쁘고, 공자왈 맹자왈을 논하며 무위도식하던 양반사대부들의 나라였던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백성들의 삶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리공론에, 당파싸움질에, 명분논리에, 사대주의에 빠져 권력쟁탈과 지배층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며 허송세월만 보낸 것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정부와 국회는 대외문제를 소홀히 취급하고 있으며 민생은 뒷전으로 믈려나 있다. 최근 NLL 문제로 국회가 파경을 헤매고 있는 것도 조선의 예송논쟁이나 4대사화나 마찬가지로 백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로 서로 싸움질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펴면서 국제적인 여론몰이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독도 문제는 한일 간에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지하에서 안용복이 얼마나 통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