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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53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8

 

 

 

한국의 역사 953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8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의 복수

 

이런 파동이 일어나면서 일본을 다녀온 것을 잊어버리고 있던 안용복은 나라를 시끄럽게 했다는 죄목으로 끌려와 곤장 100대를 맞고 동래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후 간신히 풀려났지만 안용복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열 달 가까이 대마도에 갇혀 있었고 조국에 돌아와서는 또 곤장까지 맞았던 것이다. 게다가 더 분통이 터지는 것은 풀려날 당시 일본에서 어떻든 미안하다면서 위로금을 주었는데 대마도 하급 관원들에게 모두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는 일본어를 알았기 때문에 대마도에 있는 동안 조선과 무역을 하면서 생긴 대마도의 부정행위까지 상당히 알게 되었다.

 

절치부심한 안용복은 어떻게든 한번 통쾌하게 복수를 하려고 벼르다가 2년 후인 숙종 22년 그는 일당들을 모았다. 일본에 가서 크게 한탕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나쁜 말로 하면 국제 사기를 치려 들었으니 조선 때 이런 배포 큰 사람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그는 한국사에 등장한 인물 중 가장 배포가 크고 코믹한 돈키호테였는지도 모른다.

 

 

 

 

                                                                                       울릉도 요도

 

 

 

떠돌이 중과 선원 10여 명을 포섭한 그는 가짜 관복을 입고 자신을 감세관이라 사칭했다. 울릉, 우산 양도 감세관이라 자칭한 것이다. 그는 정보망이 좋아서 일본 어부들이 그때도 울릉도에 다니면서 많은 해산물과 농산물을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일본 땅 오키에 도착했다. 그의 주위에는 장부를 든 사람, 벼루와 먹, 붓 또 주판을 든 사람이 따랐다.

 

"일본 어부들이 우리 땅인 울릉, 우산도에 침입해 고기를 잡다가 도망쳤으므로 추격하여 왔다." 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마 그의 속셈은 이렇게 엄포를 놓으면 문제가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 관료들이 얼마간의 세금을 대신 내놓을 것으로 기대했는지 모른다.

 

오키 주에서는 다시 한 번 시끄러워졌다. 안용복은 거기서 고소장을 썼다.

 

대마도 번주에 대한 범죄사실이 주 내용이었다.

첯째 우리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받아간 쌀이 1만 6천 석인데 듣자 하니 1만 석을 중간에 잘라 먹고 6천 석만 보고를 했다.

둘째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인삼은 무려 10배나 값을 불려서 팔고 있으니 결국 그 돈을 누가 먹었겠는가. 등 등의 내용이다. 부산 바닷가의 사나이 안용복이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정보를 유감없이 풀어먹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곱 가지 사항을 고발형식으로 작성했으니 이것이 막부의 쇼군에게 전달되면 대마도 번주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문을 즉시 퍼져나가 대마도 번주 귀까지 들어갔다. 이에 대마도 번주는 즉시 관리를 파견하여 안용복을 달래도록 했다. 대마도 번주가 보낸 관리가 안용복을 찿아가서 무릎을 끓고 고발장 내용에 대해서 일일이 변명을 했다.

 

"쌀을 속였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조선에서는 뒷박질을 할 때 쌀을 깍아 평평하게 하지만 우리는 고봉으로 가득 올려 계산을 하는 것이고 가마니 역시 조선 가마니보다 우리 것이 잘반가량 크며 인삼 역시 배에 실어오다 보면 도중에 절반이 썩고 맙니다. 막부까지 가는 도중 거기서 또 절반이 썩게 되는데 자연히 값을 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엇다.

 

그래도 아떻든 고발장이 올라가기만 하면 문제가 크진다. 또 다른 내용으로 그들은 안용복의 비위를 맞췄다.

 

"고발장만 거두어 주신다면 조선의 두 섬 울릉도와 우산도라고 이르시는 그 섬에 간 어부들을 반드시 색출하여 목을 치겠습니다. 그 섬은 이미 조선의 영토이온데 만약 앞으로 우리 어민 누구라도 다시 침범을 한다면 통보만 해주신다면 즉시 엄중히 처벌할 것입니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소?"

 

"이미 막부에서도 허가가 났습니다. 앞으로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은 모두 대마도에서 알아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럼 앞으로 절대 우리 영토에 들어오지 않겠다?"

 

"물론입니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이런 중대한 약속을 받고 안용복 일행은  8월 6일 일본 돗토리현을 떠나 울릉도에 도착하여 며칠을 머물다가 남풍에 밀려 21일경 강원도 양양 땅에 도착했다.

 

보고를 받은 양양 현감의 반응은 생각 밖이었다. 그는 중번죄인으로 판단, 그들을 모두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으나 안용복은 탈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을 몰라주는 양양 현감보다 동래 부사에게 하소연을 하여 일을 해결하려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동래에서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조정에서도 이 일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밤을 세워서라도 급히 죄인을 서울로 압송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모처럼 양국 사이에 화평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이런 사기꾼들이 가서 일본을 농락하다니 일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큰 원한을 품을 것아닙니까." 

 

그런 우려 속에 수차례 비변사 회의, 어전회의, 안용복에 대한 심문이 이뤄졌는데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렸다.   

 

국기를 문란하게 한 죄로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과 일개 상민의 몸으로 울릉도와 우산도 문제에 대해서 중대한 약속을 받아 온 공적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논쟁이 팽팽히 맞섰다. 영의정 남구만이 아니었다면 안용복은 그때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갑론을박 도중에 대마도로부터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대마도와 조선 사이의 정기 사절 방문행사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기회에 아예 을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문서를 하나 받아 놓도록 하자는 제안에 화답이 왔다. 어떻던 막부에서 앞으로 조선과의 외교나 무역은 대마도에서 전담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이미 안용복에게도 그렇게 확약한 바가 있엇기 때문에 그걸 문서로 보낸다는 통보였다.

 

1699년 우여곡절 끝에 양국 간 국경조약이 만들어졌다.

 

"을릉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도 분명히 밝혀져 있다. 이 섬이 일본에서는 멀고 조선에서는 가까우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국경이 저절로 구별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을릉도와 죽도가 하나의 섬이면서도 그동안 두 가지로 불려왔지만 이 섬이 조선 땅이고 같은 섬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안용복의 그 뒤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상민 중 그처럼 한바탕 호탕하게 양국을 들었다 놓은 자는 없었다. 지금도 독도 분쟁에서 안용복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살아 있다.

 

그 뒤 일본 막부에서도 대마도의 이러한 국경 확정 문서를 양해하고 승인한다는 문서를 동래부에 통보해 왔다. 그러나 우리 조정은 을릉도만 생각했지 독도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뱃사람 안용복도 울릉도와 우산도 2개 섬이라고 말했던 것인데 우산도를 조정 대신들은 생각지도 않은 것이다.

 

17세기를 살았던 학자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분명히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강한 적과 대적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꺽어 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수하였다고 칭송하고 있다.

 

겨우 1881년 고종 18년에 우리 조정은 검찰사를 보내 사상 최대의 울릉도 수색 작전을 벌였다. 일본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내왕한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가보니 우리나라 사람만 142명, 일본 사람은 78명이엇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계 때문에 들어온 전라도 백성이 대부분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115명이었으며 그들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바위섬을 전라도 속명인 독섬, 즉 독도라 불렀다. 지금도 독도라는 명칭은 전라도 해안에 몇 개가 남아 있다.

 

고종은 보고를 종합하여 드디어 울릉도를 게척할 것을 결심한다. 오백년 공도정책을 마침내 거두어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