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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52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7

 

 

한국의 역사 952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7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안용복 사건(1693년 숙종 19년)

 

숙종 19년 1693년 봄, 홀어머니 아래에서 궁핍하게 자란 안용복은 바닷가에서 떠돌아다니는 솔깃한 말 하나를 듣게 된다. 동해 멀리 섬이 하나 있는데 산삼이 많은 노다지 섬이라는 풍문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그 섬에 다녀오는 배가 많다는 것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거기 가는 뱃사람을 모집한다는 은밀한 소식을 듣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지원을 했다.

 

공식적으로 그 섬은 일반인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왕실에 진상하는 전복은 물론이고 산삼까지도 있다는 소문에 동래 부사와 좌수영에서 오히려 배를 제공하고 몰래 밀항선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34명이고 총책은 동래 감영의 한비장이엇다. 이런 기록은 조선의 자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부산에 설치되어 있던 왜관의 정보문서에 있던 것들이다. 그들은 부산일대 우리 관헌들이나 포구의 동태를 손바닥 들여보듯이 꿰고 있었던 것이다.

 

한비장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에 도착해보니 웬걸 한 배 가득히 물품을 챙긴 왜선이 정박해 있었다. 본대와 떨어져 있던 안용복은 같이 있던 또 한 사람과 같이 몰려온 일본 어부들에게 끌려 배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안용복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는데 부산에는 일본어를 가르치는 학숙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기록은 일본에 남아 있다.

 

안용복 일행을 본 일본 어민들이 호통을 쳤다.

 

"너희 조선 사람들은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작년에도 그리 말했더니 약속을 해 놓고 또 이렇게 들어와?"

 

이미 그들은 을릉도가 자신들의 영토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되어 갔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성미 괄괄한 안용복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어디 너희 나라에 가서 따져보자.' 하면서 자진하여 일본 배에 올랐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안용복은 대마도로 끌려 간 것이 아니고 일본 본토 오키 섬으로 끌려가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은 동래부 관헌이라고 허풍을 쳤다. 그러자 오키 섬과 도토리 현에서 난리가 났다. 오키 섬을 관리하고 있던 도토리 현으로 보고가 올라가면서 무식한 어민들이 조선 관리 두 사람을 납치해 왔으니 양국 간에 크게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일본 막부에서는 전국을 68개의 국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는데 오키라는 섬은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변방지역이었다.

 

우리 조정에서는 납치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동래부에서 나라의 방침을 어기고 몰래 보낸 터인데 납치 사실이 밝혀지면 부사 역시 온전치 못할 것이므로 이런 보고도 올리지 않고 이듬해 봄까지 쉬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막부까지 이 사건이 올라갔지만 책임을 지고 이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역정만 내었다.

 

"무식한 놈들 같으니. 골치 아프게 왜 조선 관리들을 두 명씩이나 붙잡아 오는가 말이야."

"이런 일을 막부에서 결정하면 안 되니까 처음 데려온 곳이 어디냐?"

"돗토리 현입니다."

"그곳으로 되돌려 보내고 그곳에서 대마도 번주에게 인계해서 책임지고 호송하라고 명령하게."

 

결국 두 사람은 대마도 번주에게 넘어 갔다. 당시 대마도에는 유능한 인재가 넘쳐났는데, 본토에서 온 유명한 유학자가 행정 고문관으로 일하고 있었고 막부에서도 조선과의 외교업무가 실질적으로 대마도에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상당한 전문가들이 와 있었다.

 

" 도대체 죽도라는 섬이 무엇이 문제인가?"

 

안용복을 감금시켜 놓은 채 대마도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검토에 들어갔다. 문서는 쉽게 나왔다. 그 문서에 의하면 조선에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올릉도라는 섬이 있다는 설명과 지도까지 나와 있다. 그들은 죽도라는 섬은 없고 을릉도라는 이름만 있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명칭이 다른 데에 혼란을 느끼고 부산의 왜관으로 사람을 보냈다.

 

대마도는 조선과 사이가 나빠지면 가장 손해를 많이 보는 것은 자기들뿐이라는 것과 또 막부의 비위를 거스릴 수도 없었다. 결국 가장 현명한 방법은 막부의 칭찬을 받으면서도 양쪽 모두 원만하게 해결 할 수 있도록 양다리를 걸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절차를 밟기로 했다. 그리고 안용복의 진술도 중요한 역활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무릉도와 우산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우산도라면 또 어디인가?"

"무릉도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한나절 가면 나오는 바위섬이 있소."

  

 

 

                                                                                       울릉도 요도

 

 

 

대마도에서 보낸 관헌이 부산 왜관에 도착하여 무릉도와 우산도라는 섬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곳인지 상세히 답변을 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이 기록도 물론 일본의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1693년경까지 우리나라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대마도의 번주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서 깜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대마도에서 부산 왜관으로 질의한 내용 중에는 일본 어민들이 죽도에 전복을 잡으려 가곤 했는데 조선에서도 그렇게 먼 바다까지 전복을 잡으러 가는지, 또 죽도를 조선말로 읽으면 무릉도나 울릉도라고 하는지, 을릉도와 무릉도가 같은 곳인지,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알아낸 결론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울진도와 무릉도는 다른 곳으로서 이 무릉도는 울진도에서 북동쪽에 있는데 울진도에서 날이 밝으면 희미하게 보인다. 바로 독도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식으로 피차 명칭이 서로  다르다 보니 당연히 혼란투성이였다. 울릉도를 울진도라고 하는 우리 측 설명도 있으니 지금 해독하기에도 헷갈리기 쉽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이 나왔다. 자기들이 죽도라고 부르는 섬을 조선에서 을릉도라 한다는 것이고 그 섬에서 조선 관리 두 사람을 자기들 어민들이 끌고 왔다는 것이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그럼 그 울릉도라는 섬과 무릉도라는 섬은 누구의 땅입니까?"

"우리로서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일본의 기록이다. 대마도 번주 우에노는 부산 왜관에서 보내온 그런 답서를 받은 후 즉각 관계자들과 회의를 소집해 논란 끝에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첯째 확실한 기록에 의하면 1614년, 즉 조선의 광해군 6년에 우리 대마도와 조선 동래부 간에 오고간 문서에  의하면 죽도가 조선영토임이 확실하다.

 

둘째 그 후 6년 뒤인 1620년 일본 어민 두 사람이 죽도에 몰래 들어가 살고 있다가 조선에서 이를 알고 소환해가라는 통지를 해왔고, 이에 우리 막부에서 군사들을 파견,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처형한 적이 있다.

 

셋째 그 뒤로 5년이 지나서 우리 어민들이 매년 고기를 잡으러 갔고 수십 년 뒤에까지 그런 일이 번번이 일어났지만 조선에서는 한 번도 이를 금지하거나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그렇게 수십 년간 다녔어도 금지하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은 조선이 그 섬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기에 결론적으로 조선이 포기한 섬을 우리는 취득하여 근래 80년 가깝게 활용하고 있다.

 

이런 회의는 수차례 열렸다. 9월에는 대마도 번주까지 직접 참석하여

"결론적으로 올릉도는 조선이 포기한 섬인 만큼 일본이 취득한 것이며 이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매듭지었다. 우리나라의 기록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마도의 이런 기록에 비추어 보면 쓸데없는 기록에 불과하여 창피할 정도이다.

 

이 사건은 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그들은 안용복을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 돌아온 안용복은 소문이 나봐야 별 이득이 없기 때문에 관가에도 정식으로 보고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