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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51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6

 

 

 

한국의 역사 951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6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조선 조정의 미봉책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안용복이 일본을 다녀온 다음 해인 숙종 20년 봄. 그것도 왜관에서 문서로 이 사실을 통고해왔던 것 때문에 공개 거론된 것이다.

 

당시 또 다른 대마도 기록에 의하면,

"1620년에 막부는 공식적으로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불과 5년이 지난 뒤에 막부는 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문서로 요나고의 어민들에게 울릉도 '도해 면허증'이라는 것을 발부한 바 있다.  막부에서 뭔가 행정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 요도

 

 

                                                                                  민족의 섬, 독도 전경

 

 

대마도에서는 자신들의 회의 결과를 조선에 통고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왔다. 사신인 다치바나 마사시게는 매우 끈질긴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이 소식을 알게 된 조선은 발칵 뒤집어졌다.

 

"죽도는 일릉도의 일본식 이름인데 이 섬은 옛날부터 우리의 땅이거늘, 조선 어민이 그곳에 가던 안 가던 왜국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참석한 사람은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그리고 비변사 당상관들이었다. 영의정은 병으로 휴직 중이었다. 예상 밖으로 어전회의는 온건파들의 의견이 강세였다. 죄의정, 우의정이 온건파의 대표들이었다.

 

 

"이런 소소한 일로 양국 간에 만약 다시 전쟁이 난다면 난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난 전쟁 때에는 명나라가 도와주어 어렵게나마 국토를 보전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중국이 청나라 시대입니다. 그들은 결고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승정원일기>에 실려 있는 당시의 내용이다.

 

"그럼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겠소?"

 

"저들은 자기들도 죽도에 가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으므로 우리 어민도 울릉도에 더 이상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지금 현재도 국법을 어기고 내왕하는 일부 몇 사람 이외에는 그 섬에 내왕하는 자가 없으니 실제로 우리 어민들로서는 별다른 피해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결과 일본에 보낸 우리나라의 답서는 실로 온건하기 짝이 없다.

 

"우리 조선에서는 울릉도가 비록 조선의 섬이기는 하나,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일찍부터 출어를 금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 어민들 일부가 귀국령 죽도까지 들어가 번거롭게 하고 있는바, 앞으로는 법으로 엄하게 그들을 처벌할 것이며, 앞으로 백성들에게 충분히 알려 국경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조정은 남인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들의 오판이 지금 얼마나 많은 풍파를 일으키고 있는지 기가칠 일이다. 명칭도 헷갈리고 정확한 위치에 대한 개념도 없이 이렇게 경솔하게 답신을 보낸 것이다.

 

물론 일본 사절을 맞이할 접위관으로 임명된 젊은 홍중하는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애매하게 답신을 보낼 경우 앞으로 큰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섬의 호칭이 서로 다른데도 그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쓰는 호칭만을 가지고 문서를 주고 받은 것이며 어느 쪽의 영토라는 것도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발언은 과거 300년이나 버려둔 섬인데 그런 쓸모없는 섬을 가지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묻혀버렸다. 이 당시는 독도라는 섬은 서로 명칭도 달랐고 또 관심이 없었고 울릉도가 오직 분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울릉도는 조선의 땅이기는 하지만 별 관심이 없으니 거기서 전복을 잡든 뭘 하든 알아서 해라.'  이런 결정적인 패착을 우리 조정이 두어 버렸던 것이다.

 

일본 역시 이런 아리송한 답신에 불만이 있었다. 을릉도와 죽도는 같은 이름이니까 자기들의 표현인 죽도로 명칭을 통일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고쳐주기 전까지는 죽어도 부산을 떠날 수가 없다며 일본 사신은 버텼다. 이마 그때 고쳐주었더라면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로 넘어가 버릴 뻔했다.

 

생각만해도 아슬아슬한 지경이었는데, 당시 조정은 정승이 모두 바뀌어 영의정 남구만, 우의정 윤지완의 시대였다. 두 사람은 일본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삼척 첨사로 하여금 즉시 울릉도를 조사하게 했다. 접위관을 동래도 보내어 오히려 일본이 남의 영토에 드나든 무래함을 책하는 예조서계까지 전달했다. 처음 답신도 잘못되었으니 되둘려 달라고 요구했다.

 

숙종의 명령을 받은 지 한 달 뒤인 9월 10일, 삼척의 순시선이 울릉도로 출발했다.

 

다녀온 순시선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 을릉도에는 농지도 얼마 없으며 어민들이 내왕한 집터 등이 남아 있다는 섬척 현감의 보고 내용은 지금 울릉도 사적으로 남아 있다. 거기에는 독도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독도를 우산도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바위섬 독도를 그들은 뚜렷하게 확인한 것이다.

 

"작은 섬이지만 생김새가 괴이하나이다." 이런 표현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