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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49: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4

 

 

 

한국의 역사 949: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4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조선의 '공도 정책'

 

동해안 바다 멀리 떨어진 울릉도는 전복도 많고 대나무와 목재가 무성한 섬이었다. 고려 이전 시대부터 그런 소문에 대한 보고가 심심찮게 이어지면서 역대 왕들은 그 실체를 정확히 알고자 하였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당시 양곡을 실어 나르는 공물선이나 군선을 제외하고는 일반 선박은 크기가 왜소하여 험한 파도를 넘어 수색선을 보내는 것도 용이치 않았다.

 

 

                                                                                       울릉도 요도

 

1407년 태종 7년 대마도에서 다이라라는 사신이 찿아왔다.

 

그가 온 목적은 동해에 죽도라는 섬에 가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비어 있는 섬이며 자기네 어부들이 오가면서 살펴보니 고기가 제법 많으므로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고기잡이에 나서겠다는 것인데 앞뒤로 미루어 그들도 그 섬이 조선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 섬은 앞서 말한 거리상으로 볼 때 누가 보더라도 조선의 영토인 것이다.

 

대마도 사신의 제안은 논란 끝에 거부되고 말았다. 대마도인들은 거짓이 많고 흉측한 터인데 섬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다음은 틀림없이 강원도 해안에 와서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태종은 비로소 이 섬에 대하여 호기심이 생겼다. 그 섬이 대체 어떤 곳인가? 이미 신라 시대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점령했던 기록 등 여러 가지 기록이 있지만 믿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5년 후 강원도 관찰사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고성의 어라진 포구에 배 한 척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유산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그곳의 주민은 11호에 60명이고 섬은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2식(1식은 약 12킬로미터)이며 둘레는 8식이다. 콩 한 말을 심으면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석이 나며, 대나무 굵기가 큰 서까래만 하다는 것이었다.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한 사람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온통 바위투성이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나 있다고 했다.

 

태종은 그런 보고를 받고 아무래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안무사 만호 김인우를 보냈다. 김인우는 병선 두 척에 항해사와 사공 약간 명, 화약과 화통 및 식량과 왕이 하사한 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때는 토벌이 아니라 주민들을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만나 앞으로 국법을 준수해야 하며 더 이상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는 점을 당부를 하고 온 것 같다. 이 시기가 우리 조정으로서는 최초의 공식적인 울릉도 방문이지만 오히려 일본보다도 더늦은 것이었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이때 날씨가 맑아 멀리 바위섬 독도가 보이므로 김인우는 직접 그곳까지 가서 둘러보고 왔다고 보고를 하고 있지만 그냥 혼자만의 보고일 뿐이다.

 

머지않아 다시 남녀 28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몰래 무릉도로 도망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정 안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는데 가장 강경파는 황희 정승이었다.

 

"섬에 들어간 자들을 즉각 붙잡아 와야 하며 섬에 남아 있던 자들도 즉시 추방해야 한다.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크게 인구가 불어날 것이며 인구가 불어나면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고 그러면 그들 역시 강원도 해안지방에 찿아와 노략질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며 의견을 제시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명정승이라는 이름이 나 있던 황희 정승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조선의 폐쇄적이고 해양 진출에 얼마나 소극적이며 오로지 현실에 안주하려는 실상이 여실히 엿보인다. 

 

이 주장은 결국 십수 년 뒤 세종 7년이 되자 성사되었다. 김인우가 다시 토벌대장으로 군선 2척에 병사 100여 명을 거느리고 갔다. 접혀온 사람은 남녀 20명이고 풍랑에 배가 가라앉아 군사 47명을 잃고 말았다. 그중 10명은 일본에 표류하였다가 몇 달 뒤 돌아왔다. 세종은 잡아온 사람들을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충청도 깊은 산간 지역에 가서 살도록 해주었다.

 

사실 세종 때 무릉도의 대책을 두고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다. 그대로 섬을 비워두느냐 아니면 공식적으로 백성을 들여보내 살게 할 것이냐, 이때의 기록에도 섬이 두 개이므로 읍을 설치할 만하지만, 하나의 섬에는 사람이 머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두 개의 섬이란 울릉도와 울릉도 동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죽도라는 바위섬을 가리켰을 것이다.

 

장계에 의하면 무릉도는 백자목, 감나무, 독수리, 매, 흑비둘기, 전복, 문어, 바다표범, 물개 등 없는 것이 없는 섬이었다.

 

강원도 감사 유계문이 아뢰기를,

"무릉도의 우산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들도 많으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의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또한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으니, 청컨데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민호와 수령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라고 왕의 윤허를 요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오늘날 생각하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세종은 또 울릉도 동쪽 멀리 괴이한 바위섬이 있지만 확실히 가본 사람이 없다는 소문에 흥미를 느끼고 이 섬의 실체에 대해서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섬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는 취지였다. 그 섬은 분명히 독도를 의미했다.

 

폭풍을 만나 표루하던 어선 한 척이 삼봉도에 도착하여 바람 잦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은 그들이 경성의 김한경 등 2인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그들의 진술 내용은 아주 험성굿고 괴이한 섬이었다고 했다. 구름 사이로 눈앞에 멀리 우똑 솟아 있는 삼각형의 괴이한 바위섬, 바로 독도의 모습이었다.

 

조선 중기 성종은 이 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몇 차례 수색명령을 내렸지만 날씨 관계로 불발에 그치고 성종 3년 첯 수색대를 보낸 이후 별로 성과가 없었다. 그 뒤 1476년 드디어 병조에서 섬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영흥사람 김자주가 그 섬에 4주야를 항해한 끝에 도착하여 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왔다는 보고였다. 이때의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

 

김한경과 영흥사람 김자주와 송영로 등 12명이 말을 실어 나르는 마상선을 타고 9월 16일 함경도 웅구미포를 떠나 같은 날 부령 땅 청암에 도착, 17일 회령 땅 가린곷에 도착했으며, 18일에는 경원 땅 말응대에 도착했고, 마침내 25일, 그들의 눈앞에 삼봉도가 나타났다.

 

"섬 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크고 작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복판 섬 서쪽에도 또 작은 섬이 있고 모두 사이로 바닷물이 통한다. 또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뽀족한 바위들이 30개 이상 늘어서 있는 것이 괴이하다." (성종실록 7년 10월 27일)

 

그들은 두려워 섬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 섬 모양을 그려 왔다. 오늘날 그 그림은 남아 있지 않고 글로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 힘입어 성종은 본격적인 탐색대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3년 뒤 한번 내왕해 본 경험이 있는 박종원이라는 하급 말직에게 삼봉도 경차관이라는 직위를 주어 탐색 명령을 내렸지만, 그 역시 성과가 없었다.

 

성종 시절 주요한 업적 중 하나가 성종 12년에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란 책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지리 영토 해설서이다. 이 책의 내용 중 울진현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가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 두 섬이 조선왕조의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다는 것을 널리 천명한 것이다.

 

울릉도는 그전의 무릉도이고 우산도는 그전에 이름이 제각각이던 삼봉도를 호칭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쪽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측의 주장은 조선 측이 말하는 삼봉도는 울릉도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바위섬인 즉, 죽도를 말하는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울릉도 저동항에서도 뻔히 바라보이는 이 콩만 한 바위섬 죽도를 시종일관 그런 식으로 일본은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