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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50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5

 

 

 

한국의 역사 950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5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영토 분쟁

  

 

일본의 울릉도 도해 면허증

 

그나마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도 성종은 할 바를 제대로 한 임금이다. 그 뒤 100여 년이 넘도록 우리 역사에서 울릉도는 사라지고 광해군 시절인 1614년에 중대한 분쟁이 벌어진다. 또 대마도에서 서신이 온 것이다. 더구나 종전처럼 대마도의 도주가 보낸 것이 아니라 일본 막부 도쿠가와 서찰을 가지고 왔다.

 

최초의 영토분쟁이나 다름없는 사건이다.

 

"우리 백성들이 고기잡이를 위하여 먼 바다에 있는 의죽도로 가서 섬의 크기와 지형 등 사전 조사를 가려 하는바 큰 바람이라도 일면 불상사가 일어날 게 틀림없으니 귀국과의 우호관계를 고려하여 뱃길 안내자를 보내주기 바란다."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의죽도는 동해 한가운데 안개 속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신묘한 섬이고 열 명이 출발하면 다섯 명이 죽고 섬 안에는 온갖 기묘한 바위와 강치 떼들이 우굴거리며 대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알고 있었다. 독도에는 대나무 따위가 없으니 울릉도를 지칭한 것이다.

 

 

 

 

                                                                                       울릉도 요도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이때 답서를 작성한 사람은 동래 부사 박경업이다.

 

"그대들이 가고자 하는 의죽도라는 섬은 우리나라의 울릉도로서 경상도와 강원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태종 왕 시절부터 그 섬에 백성이 살지 못하게 금지해 왔다. 그리고 너무 멀어서 백성들의 안위가 위태로우며 사람이 살고 잇으면 반드시 해적들의 약탈이 있을까 염려함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들은 국가 간의 영토를 확인도 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경계를 넘으려 하니 실로 놀랍기 짝이 없다."

 

그런 답신 한 장을 달랑 보내고 말았다. 그것도 왕의 국서가 아닌 동래 부사 이름으로 보낸 것이다.

 

우리들이 단호한 조치가 없이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에서는 그 기회를 부잡았다.

 

1618년 광해군 10년 당시 일본의 통치자는 에도 시대의 2대 장군 하데타였다. 이때 요나고 사람 오타나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나왔다가 풍랑에 휩쓸려 우연히 우릉도에 표류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측량을 해보고 그 땅이 조선 땅에서 400리 정도, 일본 땅에서 1500리 쯤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고기잡이 규제가 상당히 강했던 시절인지라 그는 당시 막부에 도해 면허증이라는 것을 신청했다.

 

죽도라는 섬에 가서 고기를 잡고자 하니 허가를 내려 달라는 신청서였다. 극들의 죽도라는 명칭은 그때부터 공통적이다. 무릉도, 우산도, 삼봉도, 울릉도 등 명칭이 오락가락했던 우리와 달리 그들은 줄곧 죽도 혹은 송죽도라고 불렀다.

 

막부에서 신청서를 받자 다섯 사람이 연명하여 허가권을 내렸고 오타니 일가는 그 뒤로 수십 년간 울릉도와 독도를 들락거렸다. 대략 80년 정도이며 일본은 그때 내어준 도해 면허증이라는 것을 지금도 강력한 증거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때부터 죽도가 자기들 영토였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여러 가지로 허점이 많다. 처음 면허증을 신청한 때부터 정작 허가가 나온 것은 50년 뒤인 데다 최종 허가권자인 당시 막부의 이름도 없고 도장도 없다. 중간 관료인 고문관 다섯 사람의 이름만 나열되어 있어서 일종의 출항 허가서나 다름없다는 것이 우리 쪽의 판단이다.

 

그들은 섬에서 마늘과 인삼, 머위, 명아주, 참나물 등과 산더미 같은 전복을 채취해 갔다. 전복도 큰 전복, 작은 전복, 전복 내장, 젓갈, 중간치 전복 등과 복어까지 헤아일 수 없이 많은데 배가 작아서 더 이상 가져갈 수 없다 하였으니 그들에게 울릉도야말로 무릉도였던 것이다.

 

우리 조정은 그런 실상을 까맣게 모른 채 공도정책만 주장하고 잇었다. 한번 가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견제를 했다. 어부들이 자주 조선의 섬을 침범하여 불법을 자행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막아달라는 청원이 막부에 올라간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라서 아무래도 냉정하게 국법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한 바가 있는데 상당한숫자가 조선의 섬으로 내오아하고 잇으므로 위험천만이다 하여 오히려 일본군이 출병하여 죽도에 들어와 잇던 일본인을 잡아다가 목을 쳤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막부나 대마도주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614년의 거부 답신 이후 다시 문제가 불거진 것은 80년 이 지난 1694년 숙종 20년이엇다. 그 사잉 우리 조정은 이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엌ㅆ다. 왜인들이 이렇게 눈도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앗으면 당연히 후속조치를 해야 할 터인데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이때 선전관 성초형이 군비책 6가지를 상소하여 건의했다. 그 첯 번째 대책 중의 하나가 울릉도에 진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그 말고도 우의정 민암과 접위관 홍중하도 똑 같은 상소를 올렸다.

 

"지금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둔다면 반드시 뒷날의 걱정꺼리가 될 것입니다."

 

역시 이때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대신들이 이겼다.

 

" 그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공동정책을 펼친 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엇는데 갑자기 왜인 몇 사람 때문에 철폐해야 한단 말입니까? 본래 빈 섬에는 가끔씩 고길잡이배들이 정박하는 것이 상례이오며 금번 군사를 일으켜 그 섬에 주둔시킨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커지리라 생각됩니다."

 

절호의 기회기 이때 사라졌다. 이때 다만 몇 사람이라도 울릉도에 군사를 파견하여 영토를 공개적으로 확정지었다면 지금의 분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울릉도에 주민이 정착하면 독도는 맑은 날이면 바라다 보이는 정도의 거리이므로 수시 내왕하면서 관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조정의 공도정책은 시종일관 그대로 유지되어 이들 섬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1693년 안용복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깊은 망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 부산에 가면 안용복 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는 본래 동래 출신으로 전형적인 상민이었는데, 수군에 들어가서 노 젓는 능로군으로 복무했으며 서울의 큰 장사치 오중추의 부산 대리인으로 근근히 먹고 살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