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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48: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3

 

 

 

한국의 역사 948: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53 

  

                                                                        서울 성벽 전 

 

 

 

 

 

 8. 조선의 공도 정책과 독도 문제

  

 

독도 문제의 기원

 

독도 문제는 현재 한.일간에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차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겨서 검증을 받고자 나서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 것이 분명한데 왜 재판정에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재판은 증거 자료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이 일본에 비하여 특별히 더 유리하지는 않다. 일본은 기록의 왕국답게 몇 백 년 전 독도 관련 문서라든지 정보원들의 조선 정탐보고서까지 다채롭게 보관하고 있어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우리나라가 <조선왕조실록> 등을 거론하며 기록이 잘 돼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의 기록은 우리를 능가한다. 또 국제사법재판소의 구성 인원들 세력 분포가 일본 측에 더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도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대한제국 최초의 지리학 교과서인 <대한지지>에 수록된 우리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시켰다. 울릉도까지만 우리 영토라고 명시한 것이다. 한일합방 이전 대한제국 자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보물 제850호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독도가 들어 있지 않다.

 

1948년 광복 후 자료들도 우리나라 영토가 독도까지라는 것을 누락하고 말았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전쟁 이후 만든 기밀문서에도 이 동해의 작은 바위섬은 조선의 열부로 취급된 것이 없으며 일본 시네마 현 오키 지청 관할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제3자인 증인이 있는 반면 우리는 우리 자체의 주장뿐이다. 그들이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고 공표한 공문서가 있는 반면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뒤처진다. 러시아 등의 국제 지도, 일본의 지도에서도 어느 것은 독도를 한국령이라고 했지만 또 다른 지도에는 일본령으로 해놓았다. 혼란의 연속이다. 그래서 재판을 벌이면 결과는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도 국민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논리적 주장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성적인 구호만 외치고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에게 질문을 해도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들이 독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며 역사적 사료와 증빙 서류를 이제야 찿고 난리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조선 사대부들처럼 '우리 것이니까 우리 것이다.'라는 논리로 주장할 뿐이다. 그래서 독도의 역사를 자세히 실펴보고 그 사실을 증거하고자 한다. 

 

 

                                                                                  민족의 섬, 독도 전경

 

 

 

정말 독도가 우리 땅이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그 답은 분명 명확하게 우리 땅이 맞다. 여러 가지 일본측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료뿐 아니라 일본의 자료까지 더 보태도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독도는 우리 영토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렇게 일본측에 수세에 몰려 있는 것은 전적으로 조선의 왕들과 조정 관헌들 때문이다.

 

조선은 계속 이 독도를 나 몰라라 했다. 심지어 울릉도까지 나 몰라라 한 것이 조선 조정이었다. 지금 울릉도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무 말 않는 것도 사실 천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조선은 북벌이니 뭐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여 수비를 든든히 하고 모든 국력을 해양 쪽으로 돌려야 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양으로 진출하기에 이처럼 좋은 반도가 없다. 서로는 대륙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으로 연결이 되고 북으로는 만주와 러시아, 북해, 알류산 열도 등으로 연결이 가능하며, 동으로는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남북아메리카로 연결이 가능한 해양 국가여야 했다. 그래서 신라의 장보고처럼 중계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만 처다보면서 농사만 지었고 백성들에게 고혈을 빨았으며 좁은 땅 안에서 서로 쥐꼬리 만한 권력 다툼으로 500년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바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태종이 거리상으로 일본보다 조선에 가깝고 왜구들이 준동하던 무수한 섬과 바위로 형성된 대마도를 적정에 대한 사전 지식과 정보도 없이 침공하고도 별로 성과가 없고 피해만 발생하고 주둔에 부담을 느낀 결과 그만 조선 군대를 철수한 것이 안타깝고 억울하기만 하다. 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보다 우리 영토에 근접한 도서이므로 당연히 우리가 관할 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신라 시대의 이사부 장군, 해상왕 장보고,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바다를 통해 영토를 수호하고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국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왜 이렇게 조선은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을까?

 

조선에서 울릉도는 어떤 땅이었나? 명칭도 무릉도, 우산도, 유산도, 삼봉도, 죽도, 송도, 요도 등 그때그때 부르는 것이 임자였고 명칭이어서 명칭 자체도 헷갈린다. 세종 때 이르러 북쪽 경계선에 4군과 6진을 설치하고 비로소 북쪽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 반면 동해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한마디로 바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멀리 바다 한 가운데 괴상한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가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태종의 지시로 대마도 정벌을 갔지만 지형과 적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상륙하였다가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입고 수천 개 섬에 흩어져 있는 왜구를 소탕하기는 역부족이라 눈에 보이는 사람과  마을만 일부 불태우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들을 데리고 철수하여 버렸다. 우리 역사에는 대단한 정벌로 기록하고 있지만 물길과 수로, 적정도 모르고 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던 실패한 정벌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평생 글만 읽으며 권력을 잡고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오로지 백성들을 쥐어짜고 수탈하며 대궐같은 기와집에 처첩을 거느리고 허세를 부리며 호의호식하며 명분과 공리공론에다 제사, 장례 치르기 등 허례허식에 바빠서 바다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것이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에 대한 조선 중기까지의 인식이었다. 울릉도가 이정도 였으니 더더욱 독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조선 내내 울릉도는 내리 오백 년 동안 빈 섬이었다. 조선은 모든 섬에 대해서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이라는 것을 유지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 도망친 노비, 세금이나 군역을 피하려는 범죄자들이 숨어든다는 이유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굶어 죽는 사람이 해마다 줄을 잇고 한 치의 경작지도 아까웠던 때에 함경도 등지로 들어가 개척하라고 강제 이주를 시켰으면서도 울릉도 등 섬 지역에는 그런 식으로 대처하면서 방치했다. 한마디로 바다와 섬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안목도 없었다. 그런데 그사이 일본은 우수한 항해술로 울릉도를 자기집 뒷마당 드나들듯이 들락거렸다.

 

조선 시대부들은 배를 타는 것은 비천한 어부들이나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 불과 바다, 그리고 배를 타는 자체를 거부했다. 그런 상태에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 했다는 전승 기록이 전혀 믿기지가 않는다. 아마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면 전승 기록도 무시했을지 모른다.

 

조선에서 을릉도까지는 400리, 일본에서는 1,500리의 먼 거리지만 일본 어부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들락거리면서 마음껏 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갔다.

 

조선 조정은 몇십 년에 한 번씩 생각이 나면 관헌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들어가 거주하는 몇 명의 백성들을 토벌해오는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