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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0 : 조선의 역사 322 (제21대 영조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780 : 조선의 역사 322 (제21대 영조실록 2)
영조의 원릉 |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1. 연잉군의 멀고도 험한 재위의 길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를 맞이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사람은 천비 소생의 두 후궁이엇다.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와 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던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가 바로 그들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왕자 균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이 왕자 금이었다. 균은 1688년에 태어났고, 금은 1694년에 태어났으니 그들의 나이 차이는 다섯 살이었다.
왕자 균은 14세가 되던 1701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잃었다. 부왕 숙종에 의해 어머니가 사사되는 것을 본 그는 그때부터 병을 얻었다. 또한 생모 장씨가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 균의 하초를 못 쓰게 만들어 생산 능력마저 상실했다. 왕자 균의 이 같은 결점은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었고, 한편으로는 그에게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만들었다.
왕자 균은 생후 2개월이 될 무렵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희빈 장씨가 사사된 14세 때부터 병을 얻어 세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세자 균이 제왕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1717년 노환으로 병약해진 숙종은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 금을 세자 균의 후사로 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병약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야 하겠지만 세자 역시 건강이 좋지 못하니 연잉군이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 대리청정을 하라고 명했다.
연잉군의 세자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은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측에 의해 일대 당쟁에 휘말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720년 세자 균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니 그가 경종이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이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그의 이복 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금의 세제 책봉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왕위를 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의 나름대로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조정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자 소론측의 대대적인 반대 상소가 이어졌다.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하여 사간 유봉휘 등도 시기상조론을 펴며 왕세제 책봉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노론측의 대세에 밀려 소론측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때가 경종 즉위1년 만인 1721년이었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노론측은 실권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 이번에는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론측의 이러한 주장을 펴자 경종은 일단 비망기를 내려 왕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은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 줄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간언했다. 이에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유생 및 각 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대리청정 명령을 받은 왕세제 연잉군도 네 번이나 청정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청정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에도 경종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병이 언제 낳을지 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사실 경종은 이때 노론측 백관들이 한 번 더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할 것을 기대했다. 관례상 세 번에 걸쳐 이 같은 청이 왔을 때 왕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의 말을 거둬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왕의 체면이 서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노론측은 대리청정이 왕의 확고한 의지라고 판단하고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의식을 파해버렸다. 그리고 곧장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을 내결며 숙종 말년의 세자 대리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를 급히 올렸다.
노론의 태도가 이같이 급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구태를 불려들여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세자 대리청정은 숙종이 연로하고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게 내린 조처였지만 경종은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은 부당하다고 극간했다.
이 같은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측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노론 대신들은 종전에 대리청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차서가 잘못임을 인정하고, 또다시 청정 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노론측은 이 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된다. 즉, 처음에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전국 유생과 관료들의 반발이 있자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청을 하고, 다시 청정 명령의 하교가 내려지자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명분이 좁아지자 또다시 청정 요구를 거둬들이고 청정 명령 취소를 요구했던 것이다. 노론의 이 같은 행동은 결국 소론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일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효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보내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을 문안하려 가는 것도 금지당하였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찿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 대비는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전황을 누그러드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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