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4 ; 한양 성벽길을 거닐다 2 본문
우면산의 겨울 4 ; 한양 성벽길을 거닐다 2
숙정문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 시대에 건축한 서울 성곽의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대문' 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으며,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역사
딸 부부
둘이서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기도 바쁠 것인데, 주말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어디론가 가겠다는 마음씨가 고맙기만 하다. 둘이서 다니면 더 즐거울 것인데 말이다. 처음 한양 성벽길을 걷게 해준 딸 부부에게 내가 제대로 해주지 못한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역사를 즐겨하는 장인 염감의 마음을 이해해서일까? 암튼 모처럼 한양 성벽을 거닐면서 나에게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조선 500년 역사가 이 한양 성벽에 줄줄이 녹아 있을 것이고 이 성벽 안과 밖에서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눈물괗 ㅏㄴ이 서려 있을 것인지도 짐작이 간다. 풀 한 포기, 돌 하나마다 저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선조들의 눈물과 한이 서려 있는 이 성벽길을 걸으면서 오늘의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이 든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묻어 흩어지는 흙조각처럼 나의 인생도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지만, 돌틈에 힘겹게 피어난 잡초처럼 다시 태어나 미래를 내다볼 수나 있을 것인지......풀 한 포기 한 포기가 밟고 지나가기가 죄송스럽기만하다.
숙정문 앞에서 딸과 함께......
성벽을 거닐면서 보니 곳곳에는 성벽이 보수한 흔적이 많았다. 태조, 세종, 숙종 대에 한양 성벽이 대규모로 보수되었고 그 흔적은 돌의 크기와 모양에서 뚜렸하게 남아 있다. 돌틈에는 이끼와 풀이 자라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어 성벽을 보수하ㅣ는 동안 고향과 집을 떠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야영을 하면서 보수하였을 것이고 공사 도중 죽거나 다치는 백성들도 많았을 것이다. 백성들의 땀과 피가 고스란히 베어 있는 성벽을 바라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인걸은 간데 없지만 돌만 말없이 오늘의 우리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성벽 중간 아랫쪽에는 밖에서 몰래 드나들 수 있는 은밀한 출입구도 보이고 아마 이런 곳을 통해서 정찰병과 연락병들이 들락거렸을 것이다. 지형이 험한 곳은 그리 높지 않으나 적의 접근이 용이한 곳은 성벽이 높게 만들어져 있었다.
성벽 일부에는 집들이 지어져 있고 옹벽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도 많았다. 일제에 의해 도심 지역에는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건물이 들어선 곳도 많았다. 도로가 뚤리면서 허문 곳도 많고 성벽 흔적이 없어진 곳도 많았다.
호젓한 성벽 길은 연인들이 걷기에도 좋을 것 같다. 고즉한 향기가 풍기고 역사의 발자취를 살피면서 세우러의 무상함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돈화문
돈화문 옆으로는 넓은 도로가 뚫려 있고 아래 멀리 건널목을 건너서 올라와야 다시 성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차라리 도로 위로 고가성벽을 만들어 사람들 만이라도 지나다닐 수 있게 하고 그 웅장한 성벽의 모습을 되살려 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램이다.
곳곳에는 성벽을 허문 자리가 많다. 이런 곳을 다시 성벽의 옛모습을 되살리는 방안은 없을까? 개발을 빌미로 옛 것을 송두리채 허무는 나쁜 태도는 자신들의 역사를 부정하고 지우려는 지구상에서 사라진 민족이나 하는 짓일 것이다.
성벽위 벽돌담
성벽을 이용하여 돌담을 쌓고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런 곳도 민가를 헐고 다시 성벽을 복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조들의 담과 노력의 흔적을 이처럼 마구 허물거나 갈고 앉아 건믈을 짓는 자체가 정부의 역사관 상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일제에 의해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옛 모습을 복구해가는 노력이 기대된다.
지난번 중앙청을 허문 것도 문제려니와 옛 서울시청을 살려두는 것은 우리들의 치욕스런 역사를 도돌아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역사는 지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국 곳곳에는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둘 것은 남겨두고 지울 것은 지우되 인접한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유명 돈까스 집들이 즐비하게 있는 곳
성벽 돌틈 사이로 이끼와 풀이 자라고 있다
성벽 사이로 보이는 도시
성벽 안쪽 마을
성벽 안쪽 길
성벽과 억쇄풀
흥인지문이 보인다
흥인지문
광장시장 먹자골목에서......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781 : 조선의 역사 323 (제21대 영조실록 3) (0) | 2012.11.26 |
---|---|
한국의 역사 780 : 조선의 역사 322 (제21대 영조실록 2) (0) | 2012.11.25 |
한국의 역사 779 : 조선의 역사 321 (제21대 영조실록 1) (0) | 2012.11.24 |
한국의 역사 778 : 조선의 역사 320 (제20대 경종실록 3) (0) | 2012.11.23 |
한국의 역사 777 : 조선의 역사 319 (제20대 경종실록 2) (0) | 2012.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