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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9 : 조선의 역사 321 (제21대 영조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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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9 : 조선의 역사 321 (제21대 영조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11. 24. 07:24

 

 

 

 

 

한국의 역사 779 : 조선의 역사 321 (제21대 영조실록 1)            

 

                       

                                                                                      영조의 원릉

 

제21대 영조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1776년)이다. 는 금(昑), 는 광숙(光叔), 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그러나 신임사화 등으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이후 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의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키게 된다.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며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 이후 고종 때 묘호를 높여 영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하여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가 되었다.

 

숙종(肅宗)의 차남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소생으로, 정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722년부터 1724년까지 왕세제 신분으로 배다른 형 경종 임금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24년부터 1749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49년부터 1762년까지 아들 사도장헌세자대리청정을 하였고 1762년부터 1775년까지 다시 친정 체제를 펼쳤으며 1775년부터 1776년 붕어할 때까지 손자 정조가 왕세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조선 영조
조선의 제21대 국왕
Korea-Yeongjo-King of Joseon-c1.jpg
재위 1724년 ~ 1776년
왕비 정성왕후
정순왕후
부왕 숙종
모친 숙빈 최씨
이전 왕 경종
다음 왕 정조

 

 

 

생애

 

 

연잉군 초상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그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 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궁중의 나인의 심부름꾼인 무수리 출신이고, 서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콤플렉스가 되어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그는 어머니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하려 시도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부왕 숙종의 다른 후궁인 명빈 박씨에게서도 이복동생 연령군이 태어난다. 이복동생 연령군은 병약하였고 배다른 동생이었지만 같은 서자로 멸시받는 처지였기에 그는 연령군을 각별히 아꼈다. 장희빈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마음을 두었고, 이이명 등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잘 부탁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잠재적 왕위계승권자

경종이 왕세자로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한 것을 본 후 병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대를 연잉군이 잇게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정유독대) 당시 숙종이이명을 불러 독대한 것을 소론경종도 알게 되었고 후에 경종 재위 시 소론측에서 이를 문제삼게 된다.

 

이로 인해 왕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다.

 

1720년(경종 1년)에 왕세자인 경종이 왕위에 오른 뒤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노론인 김창집(金昌集) 등이 왕세제 책봉을 상소하였으나, 소론인 유봉휘(柳鳳輝) 등의 반대가 있어 무산되었다.

 

 

 

왕세제 시절

그러나 연잉군은 왕세제 직위를 책봉하려 하자 연잉군은 몇 번이고 사양했다. 그러다가 결국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이후 노론측에서 세제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소론측에서는 노론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했고, 경종은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목호룡의 고변이 터지면서 사태가 달라진다. 이어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로 일시 정무를 담당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청정을 취소당했고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자신을 지지하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대신과 50여명의 고관들이 사형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 투옥되는 등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金一鏡)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노론 세력은 세를 키워나갔고, 그는 다시 세력을 회복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1724년 음력 8월에 병약하던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즉위 후

 

탕평책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1724년 김일경목호룡이 경종독살설을 주장한 것과 국왕인 그에게 왕이라 칭하지 않고 '너', '그대'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받게 된다. 만인의 임금이 되고 싶었던 그는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았다.

 

그러나 임금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인 1728년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몰아 내려 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영조는 다시 정견을 같이 하는 노론을 중용하였다. 이인좌의 난 이후 노론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가담한 것을 언급하며 소론 축출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노론 출신이 장악한 삼정승에 소론 출신 이광좌, 이태좌, 박문수, 이종성, 조현명, 조문명 등을 등용하는 것으로 노론의 과격한 요구를 억제한다.

 

영조는 탕평책의 한 방법으로 “쌍거호대”를 실시했다. 즉, 주요 자리마다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같이 등용하여 서로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1772년에는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끼리는 결혼을 금지시켰다. 또 사형을 시킬 때는 반드시 3심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삼복제도'를 다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대부 집안에서 임의로 형벌을 내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인좌의 난 전후

1728년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 등은 충청북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거병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다. 이는 무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신란'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였으며,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전라도로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군을 투입해 난을 진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안동대구의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좌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으나 난군 세력이 영남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반란 진압 후 남인들의 협조설까지 확산되면서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여 과거를 정거하고 금고령을 내린 뒤, 대구 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우게 된다. 이후 과거와 출사를 금지당한 영남의 남인계 유생들은 정조 때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영남 의병의 행적과 선비들의 연명부를 적은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리게 된다. 난이 진압된 뒤에도 그는 탕평책을 유지하게 되지만 노론 편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사도세자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권과 경제정책

영조는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 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그는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기민(飢民) 즉, 배고픈 민중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민중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하였다. 또 일본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고구마를 들여왔는데, 그가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조 자신도 소식(小食), 물자절약등으로 검소하게 살아냄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여 이듬해 수어청의 제작을 명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각 보진(堡鎭)의 토성(土城)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 힘썼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耆老科 : 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하였다.

 

 

 

학문진흥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여 민중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어제여사서(御製女四書)》·《육전(六典)》·《소학훈의(小學訓義)》·《속오례의(續五禮儀)》·《속대전》·《무원록(無寃錄)》·《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누주통의(漏籌通義)》·《해동악장(海東樂章)》·《여지도서(輿地圖書)》·《동국문헌비고》·《숙묘보감(肅廟寶鑑)》 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爲將必覽)》 및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이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산업·문화·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탕평의 실패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도세자경종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 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와 후궁 숙의 문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된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론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1749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는 노론정순왕후에 의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영조는 후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후일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삼았으며, 자신이 생존할 때 이미 손자에게 정치를 맡게 하여 노론에게 견제당하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세손 대리청정과 최후

그의 사후 노론에서 사도세자 사건을 언급하며 죄인의 아들이라고 할 것을 예상하여 세손을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하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은 맏며느리 효순현빈은 승통세자빈으로 봉한다. 또한 정조에게도 즉위 후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노론은 끝까지 세손을 공격하였고, 세손은 개유와 등에서 학문과 독서에 몰입하며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삼간다. 세손이 본 책 중 강목에서 서자, 첩의 자식 이란 언급이 많은 부분이 있는데 노론에서 영조의 열등감인 서자, 서출이라는 부분을 그가 본다고 무고하였으나 세손궁의 궁료였던 홍국영이 민첩하게 책의 서자, 첩의 자녀 언급 부분은 백지로 가리기도 한다. 이후 세손은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일체 삼가며 조용히 생활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양위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대리청정을 결심한다. 1774년(영조 50년) 그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 때 홍인한노론의 지도부가 승정원승지사관(史官)들을 가로막고 붓을 빼앗으면서까지 방해하였으나 그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곧이어 병권을 움직일수 있는 감국권과 부절 승인권한 역시 세손에게 넘겨주었다.

 

 

 

 

영조의 국상당시 상복을 입은 조선의 사대부

 

 

한편 은언군은신군 등이 시장에서 송사에 휘말린 뒤 홍봉한이 이들의 뒤를 후원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손자 은언군은신군제주도로 유배보내게 된다. 은신군은 곧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고 은언군세손이 즉위한 뒤에 석방된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76년 영조는 83살의 나이로 죽어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최장 재위 기간(52년)을 가진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사후

 

대리청정과 병권을 장악했고, 세손 궁료들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세손은 보위를 계승하여 22대 왕 정조가 된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하였으나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한편 조선 후기로 오면서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 수가 감소하게 되면서, 영조의 국상 당시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주도복, 이상호 등의 선비들을 특별히 상을 내려 포상하기도 했다.

 

원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으로 시호와 존호를 합쳐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였다. 그러나 고종 때 묘호가 영종에서 '영조'로 바뀌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 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순왕(莊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능묘

 

 

 

영조의 원릉.

 

 

 

영조의 능은 원릉(元陵)은 1776년 7월 27일 조성되었으며,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능묘의 위치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동(현 구리시)의 동구릉원릉에 안장되었다. 현재의 원릉 자리는 원래 효종이 안장되었다가 이장된 자리라서 여러 번 논란이 있었으나 그대로 현재의 원릉 자리에 안장된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는 1757년, 66살의 나이로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숙종(肅宗)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으나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正祖)는 당시 왕대비(王大妃)였던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다.

 

 

 

가족 관계

  • 조부 : 조선 제 18대 왕 현종(1641년 ~ 1674년)
  • 조모 : 명성왕후 김씨
  • 부 : 조선 제 19대 왕 숙종(1661년 ~ 1720년)
  • 모 :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
  • 사친 : 숙빈(淑嬪) 최씨(崔氏)
  • 원비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1757년)
  • 계비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1805년)
  • 후궁 :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 화억옹주(和億翁主) - 조졸
    • 진종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1728년)
    • 화순옹주(和順翁主)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에게 하가(下嫁).
  • 후궁 :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 1764년)
    •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 1748년)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에게 하가(下嫁).
    •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년 - 1728년) - 조졸
    • 옹주(翁主, 1730년) - 조졸
    • 옹주(翁主, 1731년) - 조졸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 1752년)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에게 하가(下嫁).
    • 장조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1762년)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 1808년)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에게 하가(下嫁).
  •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 1780년)
    • 옹주(翁主) - 조졸
    • 화유옹주(和柔翁主, 1741년 - 1777년)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에게 하가(下嫁).
  • 후궁 : 폐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1717년 - 1776년)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2년 - 1772년)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에게 하가(下嫁).
    • 화령옹주(和寧翁主, 1754년 - 1821년)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에게 하가(下嫁).

 

 

평가

 

노론소론의 중재와 공정한 등용, 탕평책을 통한 당쟁의 완화, 악형과 인습의 폐지와 문예 부흥을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킨 점은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타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저서 《한중록》에서 영조가 화협옹주화완옹주는 편애하면서도 사도세자를 유독 미워하였으며,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1990년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화협옹주와 화평옹주가 병석에 누웠을 때 옹주들의 사저에 찾아가서 병구완을 한 점과, 옹주들의 장례일과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상사 때 옹주의 집에서 밤을 샌 점 등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