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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7 : 조선의 역사 299 (제19대 숙종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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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7 : 조선의 역사 299 (제19대 숙종실록 5)

두바퀴인생 2012. 11. 2. 02:47

 

 

 

 

한국의 역사 757 : 조선의 역사 299 (제19대 숙종실록 5)

              

 

 

 

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2. 숙종의 가족들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9명의 부인에게서 6남 2녀의 자녀를 얻었다. 이들 중에서 인경왕후 김씨가 2녀, 인현왕후 민씨와 인원왕후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희빈 장씨가 경종을 비롯하여 2남, 숙빈 최씨가 연잉군(영조)를 비롯하여 3남, 명빈 박씨가 1남을 낳았다. 이들 중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의 중전들과 많은 물의를 일으켰던 희빈 장씨의 삶을 요약하고 경종, 영조는 각 실록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가족 관계

  • 부 : 제18대 현종 (顯宗, 1641년~1674년)
  • 모 :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1642년~ 1683년)
  • 원비 :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金氏, 1661년 - 1680년)
    • 장녀 : 공주 (1678년 ~ 1678년)
    • 차녀 : 공주 (1679년 ~ 1679년)
  • 1계비 :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년 ~ 1701년) - 경종의 양어머니
  • 2계비 :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년 ~ 1757년) - 영조의 양어머니
  • 후궁 :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 1701년) - 1689년부터 1694년까지 왕후의 자리에 있었음, 훗날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
    • 장남 : 경종 윤 (景宗 昀, 1688년 ~ 1724년)
    • 차남 : 성수(盛壽) (1690년 ~ 1690년)
  • 후궁 :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년 ~ 1718년)
    • 삼남 : 영수(永壽)(1693년 ~ 1693년)
    • 사남 : 연잉군 금(延礽君 昑) : 영조 (英祖, 1694년 ~ 1776년)
    • 오남 : 왕자(1698년~ 1698년)
  • 후궁 : 명빈 박씨 (䄙嬪 朴氏, ? ~ 1703년)
    • 육남 : 연령군 훤(延龄君 昍, 1699년 ~ 1719년)
  • 후궁 : 영빈 김씨(寧嬪 金氏, 1669년 ~ 1735년)
  • 후궁 : 귀인 김씨(貴人 金氏, 1690년 ~ 1735년)
  • 후궁 : 소의 유씨(昭儀 劉氏, 생몰년 미상)

 

 

인경왕후 김씨(1661~1680년)

김장생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이다. 1670년 열 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갔으며, 다음 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 증세가 보였는데, 이때 숙종은 천연두를 겪지 않은 터라 약방도제조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에 따라 편전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20세를 일기로 경덕궁에서 세상을 떴다. 이후 경덕궁 영소전에 위폐가 모셔졌고, 능은 익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 음력 4월 23일~1701년 음력 8월 14일)는 조선 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민진후, 민진원, 민진영의 누이이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부덕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희빈 장씨를 투기하여 영빈 김씨의 입궐을 주선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를 처소로 데려와 매질을 하기도 했다.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뽑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張氏: 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1688년 후궁 장씨(소의 장희빈)가 아들 윤(昀)(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폐출된 지 6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폐인(민씨)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애초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던 탓이다.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하였던 노론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고 선언하여 노론소론을 중재하였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소론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지만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

 

경종실록에 따르면 민씨가 복위된 뒤 왕세자 윤(경종)이 민씨 아래로 입적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자로서 아비의 뒤를 잇는 자는 적모에게 입적한다'는 예를 따른 것으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종이 장씨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민씨에게 줘버렸다는 것은 와전이다. 경종은 기사환국 전 원자 명호를 받았을 때에도 당시 정궁이었던 민씨에게 입적되었었다.

원자(元子)에게 이미 진호(進號)하여 위로 적후(嫡后)에게 올렸으니, 바로 중궁(中宮)의 아들인 것입니다.

– 『숙종실록 15년 4월 25일(신묘) 10번째기사 中』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음력 8월 14일 서거한다. 민씨가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 숙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복위 후 그녀는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와 대립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 소생 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이며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후에 숙종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또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서예의 재주에도 능하여, 한글로 된 편지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의 전각 궁녀가 그를 가련히여겨 쓴 <인현왕후 전>이 유행하였는데, 한글로 쓴 소설이라 여염집을 통해 쉽게 보급되어,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 조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민광훈
  • 할머니: 이씨, 이광정의 딸
  • 아버지: 민유중(閔維重)
  • 어머니(전모(前母)): 해풍부부인(海豊府夫人) 이씨
    • 이복언니 : ?
  • 어머니(생모):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
    • 외할아버지 : 송준길
    • 오빠: 민진후
      • 조카: 민익수
    • 오빠: 민진원
    • 여동생 : ?
  • 어머니(계모): 풍창부부인(豊昌府夫人) 조씨
    • 이복 남동생: 민진영
  • 남편: 숙종
    • 법자: 경종
  • 백부: 민시중
  • 백부: 민정중
  • 사촌 오빠: 민진장
  • 외가 친척: 송시열
  • 인척 : 허적

 

송시열과의 관계

서인(분당 이후로는 노론)의 영수이자 왕으로 일컬어졌던 우암 송시열은 인현왕후의 외조부인 송준길과 부계로는 13촌이며 진외가로는 6촌간이다. 송시열은 진외가의 촌수로 따져 1살 연상인 송준길을 숙부가 아닌 형으로 불렀다고 한다. 송시열송준길은 단순한 친척 관계를 떠나서도 특별한 사이였는데 송시열이 8세의 나이로 송준길의 집에서 수학하였고 함께 장성해 같은 스승 아래 동문수학하였던 점이나, 같은 사상으로 의기투합하여 분열되어 있던 서인을 통합하고 지휘하여 양송(兩宋)에 일컬어지게 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친형제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큰아버지 민정중, 오빠 민진후, 민진원은 모두 송시열의 문하이기도 한다.

 

인경왕후와의 관계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와는 11촌간으로,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조부인 김익겸과 같은 항렬이다. 인경왕후의 5대조인 김계휘는 인현왕후의 어머니 은진 송씨의 외조부인 김은휘의 형이다. 또한 인경왕후 일족은 인현왕후 일족과 겹혼인으로 단단히 결속한 가까운 인척사이이기도 하다. 인현왕후의 큰오빠 민진후의 사위는 인경왕후의 5촌 조카이자 김만중의 손자인 김광택이며, 민진후김만중은 처6촌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또, 인경왕후의 당숙인 김만균민진후는 처4촌 지간이 된다.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방영

얼마전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가 방영되어 높은 시청율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300여 년 전 조선 숙종 시대와 2012년 현재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타임 슬립 판타지, 액션, 로멘스, 코믹, 멜로를 다양하게 구성하여 만든 드라마로 궁중의 음모와 암투, 한 선비와 왕후의 로멘스, 현재로의 연결로 시청자들이 환상에 꿈꾸도록 만든 작품이다.   

 


시공을 뛰어 넘는 타임 슬립 판타지 액션 코믹 멜로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시간을 넘나드는 타입 슬립은 과학적 논리와는 무관하게 시간 여행을 꿈꾸는 인간의 판타지와 맞물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쓰여온 소재 중 하나다. 이 드라마는 조선 숙종 시대와 2012년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 슬립이라는 판타지에 인현왕후를 둘러 싼 궁궐 내의 음모와 암투를 다룬 시대물, 거기에 서로 다른 시대의 남녀가 만나 벌어지는 로맨스를 가벼운 터치로 다룬 코믹 멜로까지 하나로 녹여 낸 독특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기사환국 때 일가가 몰살당한 뼈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는 김붕도(지현우 분)는 19세 나이에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지닌 매력만점의 인물이자, 우연히 손에 넣은 신비한 부적의 힘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선시대와 현대를 오가는 능력을 갖게 되는 타임 슬립의 주인공이다.

 

지현우는 인현왕후 복위를 위해 적대 세력인 남인들과 맞서 선 굵은 연기와 액션을 펼치는 시대극의 캐릭터와 현대 문명에 빠르게 동화되면서 여주인공 최희진(유인나 분)과 달달한 로맨스를 키워나가는 꽃미남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하면서 독특한 매력을 선보인다.

 

두 사람은 드라마 종영 후 지현우가 공개적인 구애로 유안나가 화답함으로써 연예계에서 커플로 맺어져 시청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인원왕후 김씨(1687~1757년)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 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회생했고, 2년 뒤에 혜순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720년 숙종이 죽은 후 왕대비에 올랐고, 1724년 경종이 죽은 뒤 다시 대왕대비에 올랐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명릉으로 인현왕후, 숙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에 묻혔다.

 

 

 

희빈 장씨(1659~`1701년)

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경의 딸이다. 그녀의 당숙 장현은 종1품 벼슬을 받은 역관으로 당대의 갑부였으며, 남인들의 정치자금을 대던 인물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장옥정은 어린 시절에 궁궐에 들어가 궁녀가 되었고, 22세 되던 해인 1680년 숙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다. 그러나 그해에 '경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대거 쫓겨났고, 그녀의 후원자였던 당숙 장현도 삼복 형제와 친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그 여파로 장옥정도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의 명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녀에 대해서 장렬왕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았는데, 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조사석과 내연의 관계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명성왕후가 죽자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도움으로 궁으로 복귀했다. 조사석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육촌 동생이었는데, 장옥정의 어머니와 왕래가 잦았다. 이 때문에 조사석과 옥정의 어머니가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다.

 

궁궐로 복귀한 옥정은 그해에 숙원의 첩지를 받아 정식으로 후궁의 반열에 올랐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다. 이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숙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론, 소론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월에 왕자 균을 세자에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또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발한 서인들을 대거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사사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이후 남인의 힘이 너무 강화되자 숙종은 은근히 남인을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내심 민비를 복위하여 서인을 등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숙종은 왕비에 올라 있던 장옥정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는데, 이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에게 그의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694년 소론 김춘택, 한중혁 등이 임금의 마음을 알고 폐비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남인들의 지나친 세력 팽창을 염려하고 있던 숙종은 오히려 서인들의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으며, 권대윤,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에 올랐던 정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위시켜 다시 왕비에 앉혔다. 이 정치사건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작시키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날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거취당 서족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숙빈 최씨의 고변에 의해 발각되었다. 이에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서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후비를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버리기까지 했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는 경종과 일찍 죽은 왕자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