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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5 : 조선의 역사 297 (제19대 숙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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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5 : 조선의 역사 297 (제19대 숙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10. 31. 03:47

 

 

 

 

한국의 역사 755 : 조선의 역사 297 (제19대 숙종실록 3)

              

 

 

 

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1. 숙종의 환국정치와 왕권의 안정 

 

숙종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에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그러나 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따라서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 사회의 재도약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의 외동아들로 명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 자는 명보였다. 이후 1667년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숙종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파행적 운영이 심화되어 자체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러한 붕당 자체 파탄을 심화시킨 사건이 현종 이후 숙종 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논쟁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현종시대 정쟁의 핵심 사안이었던 이 예송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1674년 정월,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인선왕후를 차자비로 인정하여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대비가 9개월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공설을 주장했다. 반면 남인들은 여전히 효종이 왕위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장자부 기년설로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인 바 있었는데, 현종이 그해 8월에 또 죽자 그대까지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서인에 의해 다시 복상 문제가 거론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세력이 다시 복상 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해 9월에 남인의 지지 세력인 영남학파의 진주 유생들은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기호학파를 지지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며 진주 유생들을 공격했고, 이 때문에 전국 유생들은 모두 예론 시비에 휩싸이고 말았다.

 

숙종은 예론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부왕의 유언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켜 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이 약화되고 남인들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 세력의 유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조선의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 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 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났을 때 남인 쪽에 붙어 동조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그때서야 김석주는 다시 서인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은 이른바, '삼복의 변' 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이 남인 세력 축출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한마디로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간교한 정치 술수에 조정의 신하들이 놀아나고 만 꼴이 되고 말았던 사건들이었다.

 

1688년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계비로 정비인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서인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면서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분노한 숙종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을 대거 유배보내고, 유배지에서 상소를 올린 송시열은 결국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서인 인사였던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이 세자에 책봉된다.

 

이처럼 영민하던 숙종도 애첩의 이불밑 송사에 놀아나 자신의 처사에 반대하던 유능한 신하들과 중전이던 민씨까지 폐위시키는 한 남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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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희빈 장씨), 그녀는 누구인가?

 

궁녀에서 왕비, 그리고 사약을 받기까지! 비운의 여인, 장희빈

 

 

 

 

 
풍족한 역관 집안 가문의 딸, 장옥정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으로 '인동 장씨' 집안의 2남 2녀 가운데 막내였다. 장씨 집안은 16세기 후반 조선 시대 중간 계급이었던 중인 가문 출신으로 수석 합격생 7명을 비롯해 총 20여명의 역관을 배출했다. 특히 옥정의 아버지 장경과 할아버지 장응인은 모두 지금의 외국어 통역담당관인 역관을 지낸 관리로 장응인은 탐욕스런 청나라 사신들이 오더라도 감히 뇌물을 요구할 수 없을 만큼 공명정대했던 역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장경의 이른 죽음으로 옥정 일가는 5촌 당숙인 장현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현 역시 당시 이름난 역관 중 한 사람으로 청나라를 오가는 사신 행렬 명단에는 으레 장현의 이름이 올랐다. 또한 나라에서 지급한 물품으로 사행 경비를 충당하는 권한은 물론, 개인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쥐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사들인 물건을 다시 일본에 되파는 등 역관들이 얻는 실제 차익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장현은 40여 년 간 청나라를 30여 차례나 오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지만 조정의 제재는커녕 오히려 외교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종1품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장옥정은 그야말로 당대 손꼽히는 풍족한 부자 집안의 딸이었다.

 

 

장옥정, 궁녀가 되다!

1680년 이른바 '삼복의 변'이라 불리는 역모 사건을 계기로 숙종 즉위 6년 만에,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남인 세력이 대거 제거되고, 서인들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원래는 남인과 서인들이 60대 40으로 정권을 분담하는 분당정치체제였으나 이로 인해 일당전체정치로 바뀌었다. 이른바 환국정치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평소 남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역관 장현 역시 함경도로 유배를 떠났고, 옥정도 처음 궁 안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장옥정은 '숙종실록’에 따로 기록이 남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미모에 남인들의 힘이 더해서 입궁 몇 달 만에 숙종의 승은을 입는데 성공했다. 실제 남인들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감지가 되었다. 자위대비가 주선해서 숙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숙종의 총애를 손쉽게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남인들이 정권 탈환의 일환으로 장옥정은 궁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숙종의 첫 번째 비인 ‘인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서인파는 서인가의 여인인 인현왕후와의 혼례를 준비했고, 이로서 서인의 상징인 인현왕후와 남인의 상징인 옥정의 모진 인연이 서막을 열게 된 것이다.

 

 

조선 최초로 궁녀에서 왕비가 된 장희빈


집권당인 서인 세력의 끊임없는 비방으로 궁녀 장옥정의 입지는 상당히 불리했다. 그러나 1688년, 옥정이 왕자를 출산하면서 전세는 한 순간에 뒤바뀌었다. 왕자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 책봉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서인 세력의 반대 속에서도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옥정은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올린 반대 상소가 또 한 번 숙종의 뜻을 거슬렀다. 이에 숙종은 송시열은 물론 전 서인들을 대부분 숙청했고, 경신환국 이후 9년 만에 다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기사환국'이라 부르며 마지막 절차로 계비였던 정비 인현왕후마저 궐 밖으로 폐출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 폐출 열흘 만에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했고, 이로서 장희빈은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한 궁녀 출신의 왕비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중인 출신의 여인이 왕비에 오르는 일이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출중한 미모와 부유한 중인들의 힘, 그리고 남인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의 막강 세력으로 부상한 중인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인 상평통보가 다시 주조되고 청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를 통해 상업이 번성하던 17세기 말,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중인들은 당시 정치권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역관이었다. 역관들은 나라 안팎의 정보를 관장하고 외교를 관장함으로써 왕위 계승이나 모든 일에 관계가 되어 있었다.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자금을 관리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인과도 가깝게 지냈다. 전문적인 능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중인 계층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 스스로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당시 서인과 남인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중인들의 힘을 빌리고 있을 정도로 중인의 힘은 막강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집권한 지 4년 째 되던 해, '환국 도모 혐의'로 대거 처벌을 받게 된 자들 중에는 서인들뿐만 아니라 중인 계층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남인들이 세력을 잡고 장희빈을 왕비로 만든 기사환국뿐 아니라 서인들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는 갑술환국에서도 중인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장희빈은 죽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룬 숙종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자 숙종은 폐출됐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옥정을 빈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장희빈은 숙종에게서 잊혀졌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장희빈은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한때 그토록 총애했던 장희빈에게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은 자신이 사망하고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 장희빈이 남인들과 결탁해 또 다시 서인 정권을 갈아치우고 남인 정권이 들어설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한편 새자가 왕위에 오를 경우 또 연산군 대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대사건이 재발할 우려가 있었다.

숙종은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해 누구보다 대신들의 힘에 억눌려 왕권 강화에 남다른 뜻을 갖고 있었다. 결국 장희빈은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숙종의 의지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숙종은 그 대가로 얻은 강력한 왕권을 통해 마침내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