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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4 : 조선의 역사 296 (제19대 숙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754 : 조선의 역사 296 (제19대 숙종실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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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
장희빈 사사 전후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그는 장희빈의 사사를 결심한다.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자신을 투기, 괴롭힌다는 호소 역시 장희빈 사사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숙종은 노론의 때아닌 존호 추상 요청을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해 수락한다.
이이명과 독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정유독대'를 실시했다. 이때 숙종은 이이명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청을 하였는데, 사관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 독대 사건은 후일 신임옥사 때 이이명의 발목을 잡는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정승)을 사인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숙종의 연잉군 추대 기도는 소론과 남인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된다.
생애 후반
그밖에, 숙종은 조선의 제2대 국왕인 공정왕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으며,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외롭게 죽은 노산대군과, 그 아내 노산대군부인 송씨의 복위를 청하는 주장을 받아들여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키고 각각 단종이라는 묘호와 정순왕후라는 시호를 올림(1698년)과 동시에 사육신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으며(1691년), 폐서인되었던 인조 적장남 소현세자의 아내인 소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복위시켰다.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을 완성하였고,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귀중한 책이 편찬되었다. 또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718년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케 했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1720년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이명을 불러 사관의 입회 없이 연잉군 금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뒤 사망했다. 이 유언은 신임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능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무덤 언덕 옆에 함께 잠들어 있다.
사후
그는 1715년부터 노론 중신 이이명을 불러다가 비밀리에 독대를 하며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이를 근거로 노론은 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희순왕(僖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고, 그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왕권 강화 정책은 정치 세력을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에 그가 죽은 후 절대 왕권은 숙종의 치세에서만 끝이 나, 숙종처럼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은 다시는 나오지 않게 된다.
조선의 왕조 중 가장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로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태평안일했으며, 그의 애증의 감정 노출이 심한 것을 당인들이 교묘히 조종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부정적 평가
이덕일은 그가 윤증이 제시한 세가지 타협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패도정치라며 비판하였다. 이덕일에 의하면 윤증이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三戚: 김만기·김우명(김석주)·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 (『당의통략』)'라고 제시한 것을 숙종이 받아들여야 했다며 비판했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김석주)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 정객에 불과했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기타
윤휴 사사 공작
허견의 옥사 당시 허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윤휴가 엮어져서 사형당한 것에 대해 숙종의 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서인은 북벌을 위한 허적의 도체찰사부 복설에 찬성하였으면서도 허적이 역모를 꾸민다며 날조했고, 숙종은 이를 근거로 허적의 도체찰사부 부활의 근거가 된 윤휴의 북벌론을 문제삼아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조세 정책의 실패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숙종은 공명첩의 발행 양을 늘리는 한편, 문무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에게 곡식을 풀라고 강제로 명을 내렸으나,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은 그의 명을 따르기를 거절한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1697년(숙종 23년) 4월 경기도 광주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종은 강경책을 발동, 관련자들을 잡아서 처형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한편 숙종은 청나라 조정에 청하여 조선과의 교역량을 늘리고 식량의 지원을 요청한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1697년(숙종 23년)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이 개시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1698년(숙종 24년)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과 흉작은 계속되었고, 동시에 양반들과 토호들의 수탈과 횡포도 심해져 민란과 도주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숙종은 호적제도를 강화하여 인구이동을 통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가족 관계
- 부 : 제18대 현종 (顯宗, 1641년~1674년)
- 모 :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1642년~ 1683년)
- 원비 :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金氏, 1661년 - 1680년)
- 장녀 : 공주 (1678년 ~ 1678년) 사망
- 차녀 : 공주 (1679년 ~ 1679년) 사망
- 1계비 :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년 ~ 1701년) - 경종의 양어머니
- 2계비 :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년 ~ 1757년) - 영조의 양어머니
- 후궁 :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 1701년) - 1689년부터 1694년까지 5년간 왕후의 자리에 있었음, 훗날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
- 장남 : 경종 윤 (景宗 昀, 1688년 ~ 1724년)
- 차남 : 성수(盛壽) (1690년 ~ 1690년) 사망
- 후궁 :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년 ~ 1718년)
- 삼남 : 영수(永壽)(1693년 ~ 1693년)
- 사남 : 연잉군 금(延礽君 昑) : 영조 (英祖, 1694년 ~ 1776년)
- 오남 : 왕자(1698년~ 1698년)사망
- 후궁 : 명빈 박씨 (䄙嬪 朴氏, ? ~ 1703년) 사망
- 육남 : 연령군 훤(延龄君 昍, 1699년 ~ 1719년)
- 후궁 : 영빈 김씨(寧嬪 金氏, 1669년 ~ 1735년)
- 후궁 : 귀인 김씨(貴人 金氏, 1690년 ~ 1735년)
- 후궁 : 소의 유씨(昭儀 劉氏, 생몰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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