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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6 : 조선의 역사 298 (제19대 숙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756 : 조선의 역사 298 (제19대 숙종실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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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1. 숙종의 환국정치와 왕권의 안정(계속)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권은 민암, 이의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은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그 기간은 5년밖에 되지 못했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위된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장옥정)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빈으로 강등시켜 버리고, 폐비 민씨를 다시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라 부른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 일어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분노가 충만되어 다시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오빠인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족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안 숙종이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들 듣지 않자 다시 사약을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토록 하였다.
이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장씨를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 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 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다시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한 연정이 계속 이어가다가 1711년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로 소론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대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원래 <주자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 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源)'이라 하고, 주희 이후 여러 학자들의 사례에 관하여 예절을 나누어 모아'류(流)'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는데, 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론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된 왕과 신하들 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희니 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서 왕세자(경종)와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수많은 정쟁은 당대의 숱한 명사들의 죽음을 볼러왔고, 붕당정치의 폐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쟁의 격화는 붕당정치의 갖은 폐단들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보면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환국정치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 대의 예송으로 손상 입은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환국정치를 감행했다. 즉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행사하여 정치 국면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였던 것이었다.
이렇듯 숙종 대는 대신들 사이에 정쟁이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던 사회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 작업이 거의 종료되었다고 할 만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서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지방에 실시함으로서 서북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 사업을 사실상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였으며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 같은 경제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추진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 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첯 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괴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군포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정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서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 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으므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화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상문 등 사육신이 복권되엇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백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서 131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 폐위사건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여 그것을 정쟁 쟁점화시켜 당쟁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한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정치의 일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과만으로 놓고 볼 때 그는 외척과 아내까지도 철저하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며 나라를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약 46년 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인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9명의 부인에게서 8명의 자녀를 얻었다. 능호는 명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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