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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2 : 조선의 역사 294 (제18대 현종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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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2 : 조선의 역사 294 (제18대 현종실록 5)

두바퀴인생 2012. 10. 28. 03:22

 

 

 

 

한국의 역사 752 : 조선의 역사 294 (제18대 현종실록 5)

              

 

 

 

제18대 현종실록(1641~1674년, 재위 : 1659년 5월~1674년 8월, 15년 3개월)

 

  

 

조선사에서 예송의 의미

 

 

예학적 의미

 

기해예송에서 서인이 기년설을 주장하고 남인이 삼년설을 주장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그들 당파의 철학적 견해와는 상반되는 것 이었다. 남인의 사상적 종주인 이황(李滉, 퇴계, 1501~1570)의 사상은 이일원론으로서 그의 주리론에 따르면 군신, 부자, 부부, 장유의 질서가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인간관계의 질서, 즉 예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가부장 중심의 종법질서를 합리화 하는 것이었다. 이 종법질서는 비록 왕가라 하여도 어길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황의 이런 사상에 따르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기년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다 하더라도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은 변할 수 없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황의 이런 사상과는 반대로 남인들은 삼년설을 주장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의 철학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된 야당이기 때문이다. 즉 여당인 서인에 대한 야당의 정치공세가 삼년설인 것이다.

 

반면 서인들의 사상적 종주인 이이(李珥, 율곡, 1536~1584)의 사상에 따르면 그들이야 말로 삼년설을 주장해야 했다. 이이는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는 상대론적 태도를 보였다. 즉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지만 기의 상대성도 인정함으로써 변화의 여지를 남긴 것이고 그의 이런 이기에 대한 상대성이 현실적으로는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예론에 대입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삼년설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장자가 우위에 있다는 종법은 변할 수 없지만 이는 때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물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도 경우의 특수성을 인정해 삼년복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인들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집권당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는 임금 혼자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인조반정 후 관제야당으로 출발한 남인들은 예송논쟁을 이용해 야당의 지위에서 벗어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남인들은 막강한 신권에 불만을 느끼는 국왕을 자당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삼년설을 주장한 것이었다. 서인들은 왕권과 신권의 차별보다는 치자계급인 사대부의 보편성을 중시한 데 비해 남인들은 시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극대화 함으로써 왕실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주자예론과 윤휴, 허목, 윤선도등으로 대표되는 반주자 예론의 대립이기도 했는데, 정통 주자학이 신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수구, 보수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라면 반주자학은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진보, 개혁적 견해의 표출이었다.

 

예송이 발생할 무렵인 17세기는 조선사회가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던 시기였다. 양난이후 농업생산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수공업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신분제에도 차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의 조선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기존의 사농공상으로 계서화된 조선의 신분질서로는 더 이상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사회를 유지하던 주자학은 이제 변화가 불가능한 절대적 위치에서 경우에 따라서 변화가 가능한 상대적 위치로 내려와야 했다. 사대부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해석하는 주자학은 이미 순기능을 다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조선 초기에 사회변혁의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인조반정 후 수구사상인 예학으로 나아간 것이다. 예학은 각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규범으로 그것에 의하면 각 신분에 맞는 행동과 예절을 지켜야 하며 사대부는 영원한 지배계급이고 농민은 영원한 피지배 계급으로 남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송논쟁은 신권중심의 정치를 통해 양반 지주와 사대부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송시열 등 서인들과 군주권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윤휴, 허목등 남인들의 견해가 부딪친 것이었다. 물론 남인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진보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쟁이 격화되고 붕당이 본래의 순기능을 상실한 책임에서 남인이라고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인들이 예송에서 주창한 삼년설에서 예학도 경우에 따라서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면에 대해선 분명 당시 서인들이 주창하던 예학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송은 이처럼 예론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쟁의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나아가 예론을 이용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란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 의미

 

조선사에서 기해예송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우선 왕권과 신권의 상이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예송은 왕권강화 내지 신권강화의 정치논리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대부례는 비록 왕실일지라도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서인의 입장과 제왕가의 예와 사서인의 예를 엄격히 구분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남인의 입장의 차이로 나타났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또한 양측의 정치론에도 나타나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사대부의 정치참여를 정당시하여 군주성학론, 세도정치론, 붕당론 등을 주장한데 반해,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은 당시의 붕당폐해를 인식하여 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인 지배체제 구축을 위해 의정부 복구론 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론을 통하여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정치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것이고 반면 남인들은 인조 이후 약화일로에 있던 왕권을 옹호하며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실의 특수성에 입각하여 삼년설을 주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사에서 예송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역시 정치구조의 변화에 있다. 흔히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정국은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인이 견제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조, 효종연간의 정국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서인 내부의 대립이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인조대의 공서와 청서, 효종대의 산당과 한당이 그것이다. 남인은 인조반정 이후 소수파로 정권에 참여하였지만 항상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서인정권이 강화되어 가면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다. 효종대에 일부 남인이 요직에 진출하긴 했지만 그 세력은 아직 미비한 수준이였다. 중요한 것은 이 당시에도 물론 붕당간의 대립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당의 존재와 의견을 존중하는 상호비판과 견제라는 측면에서 운영되는 공존체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붕당간의 상호 공존적 측면은 예송을 거치면서 붕괴되는데 이전과는 달리, 상대당이 비판세력으로 공존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형세로 바뀌게 된다. 현종 15년에 기해예송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갑인예송으로 인하여 인조반정 이후 초유의 정권교체를 가져왔고 이후 50여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나며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기해예송은 조선후기 당쟁의 격화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은 17세기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고 예제의 보급과 예속화가 보급되면서 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해예송이 발생한 것이며 이것이 조선후기 정치 및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기해예송에서는 붕당을 매개로 한 사림세력간의 갈등 양상이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적 명분론의 뒷받침을 받는 예론을 이념적 근거로 삼아 명분을 독점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의 내면상으로는 각 정파가 제기한 예론과 그 명분은 최고정치권력의 향방과 관련된 이해관계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었다. 당시 효종이 승하한 직후 최고정치권력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대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의 복제와 같은 국가전례에 관하여 유권해석을 내려야 할 자의대비의 입장을 살피고 고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즉 집권 서인 송시열은 대비의 입장을 고려하여 모자간의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기년설의 예론을 제기했던 반면, 야당인 남인 윤휴는 훗날의 정치세력의 재편을 위해 당시에는 세자인 유충한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명분을 우선시 하는 삼년설의 예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갈등의 해결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당시 현종은 유충한 보령이었고, 서인 정국이었던 만큼 체제의 안정을 위해 집권세력의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서인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국정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고, 예학의 대가였으므로, 국가의례인 왕실의 상례에 대해 이들의 학문적, 정치적 권위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기해예송에서 현종은 서인이 제기한 기년설을 지지하게 되고 그 결과 서인이 승리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기해예송은 단순한 학문적 대립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또한 당시 신권과 왕권의 균형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구도 하에서 형식적, 이념적 최고권력자인 군왕을 매게로 한 상호 견제 심리에서 파생되어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전개한 예론은 단순한 왕실복제의 절차와 기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양난이후 사회, 국가질서 재건 방략을 모색하는 인식논리의 반영으로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예론이 당시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예송은 17세기의 예치를 학문적인 견해차이 및 정치이념이 수반되어 나타났기에 문치주의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체제논쟁적 성격을 띄었던 것이다.

 

기해예송은 또한 이후 조선의 정치사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의 붕당은 상호공존의 측면하에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으나 기해예송이후 상호공존의 측면은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2차 예송인 갑인예송 이후에는 상대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당쟁이 격화되어 정국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즉 예송은 조선의 붕당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