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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0 : 조선의 역사 292 (제18대 현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750 : 조선의 역사 292 (제18대 현종실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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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현종실록(1641~1674년, 재위 : 1659년 5월~1674년 8월, 15년 3개월)
1. 현종시대의 평화와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계속)
군사적으로는 효종 대에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북벌 계획이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중단하는 대신, 군비 증강을 위해 훈련별대를 창설하였으며, 민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 이후 구준히 실시되어 오던 대동법을 호남지방 전역에 확대 실시했다.
문화적으로 인쇄 사업 육성을 위해 동철활자 10여만 자를 주조하였으며, 천문광측법과 역법 연구를 위해 혼천의를 다시 제작케 했다.
그리고 예론정책이 호라발히 일어나 사회 예절이 강조됨에 따라 동성 통혼을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또한 정실이 개입될 소지가 있는 요인을 없애기 위해서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근무하거나 송사를 맡거나 시험관을 맡는 것을 금지시키는 상괴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제주도에 표류해 억류되어 있던 하멜 등 8명의 네들란드인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4년간 억류생활을 서술한 <하멜표류기>와 부록인 <조선국기>를 발간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종시대는 뚜렸하게 내세울 만한 사회적 발전은 없었다. 다만 외침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시대에 비해 비교적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절이었다. 예론정쟁은 비록 학문적 사상이 정쟁으로 비회된 대표적인 역우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론이 이 같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됐다는 것은 현종 당시가 그만큼 별다른 변란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종은 남인과 서인의 극단적인 예론정쟁에 시달리다가 167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현종은 부인을 명성왕후 김씨 1명만 두었으며, 그녀에게서 숙종과 3명의 공주를 얻었다. 능은 승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명성왕후 김씨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로 1651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현종과 가례를 올렸다. 이후 1659년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83년 12월 5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는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고격하여 궁중의 일을 처리할 때 감정적이고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 숙종 등극 이후에는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서인을 편들다가 남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히 1675년 '홍수의 변'때는 대신들 앞에 나와서 울부짖는 등 불미스러운 사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또 1680년 당시 나인으로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을 내쫓기도 했다. 그녀가 장희빈을 네좇은 것은 장희빈의 집안이 남인들과 밀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능은 승릉으로 현종과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묻혔다.
홍수의 변(紅袖之變)
홍수의 변(紅袖之變)은 조선 숙종 1년,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아들인 종친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와 간통하여 자식을 보았다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거짓 고발로 발발한 사건이다. 홍수(紅袖)란 '붉은 옷소매'란 뜻으로 옷소매 끝동에 자주색 물을 들인 젊은 나인을 상징하는 호칭이다. 홍수의 변은 숙종 6년에 발생한 삼복의 변의 발판이 되었으며, 삼복의 변은 경신환국의 발판이 되었다.
1674년, 현종이 병으로 급서하자 14세에 불과한 숙종이 즉위하였다. 아들의 어린 나이와 다병(多病)한 숙종의 즉위에 불안함을 느낀 현종비(妃) 명성왕후 김씨는 남편 현종의 사촌동생이자 현종 12년에 발생한 조선 대기근 당시,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조선 왕실을 조롱하는 청황제에게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온 호국의 공이 있는 복선군(福善君)에게 아들의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하였다. 이에 복선군의 형제인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이 평소 여색을 탐하여 궁녀에게까지 희롱을 하였던 것을 빌미삼아 이들 세 형제의 제거를 꾀하였다.
숙종1년(1675년) 3월 12일, 명성왕후 김씨의 친정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차자를 올려 삼복(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를 고발하였다. 복창군이 인선왕후의 초상 때 입궁하여 나인 김상업을 범해 임신시켰고, 복평군은 명성왕후가 왕비시절 중병을 앓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녀의 치료절차를 맡게 되었는데 궁에 지내면서 비자 귀례를 희롱하다 강제로 범하고 임신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과 세자가 아닌 왕자가 궁녀와 통간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이긴 하였으나 실제로는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으며 김우명의 고발 차자를 듣고서도 조정 관료들이 왕실의 일이니 간여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예사로운 사건이었다.
복창군과 복평군이 간통을 저지른 증거는 물론, 상업과 복례가 임신을 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것도 근거도 찾을 수 없었으며 의금부에서 신문된 복창군, 복평군, 상업, 그리고 명성왕후가 개별적으로 체포하여 대비전에서 고문을 한 귀례조차도 사실이 아니라 주장하였다. 김우명의 고발 이외엔 그 어떤 물증도, 증언, 증인도 찾을 수 없고 당사자들도 강력히 부정하니 수사는 진행될 수 없었고, 평소 모후 명성왕후와 외조부 김우명의 지나친 내정간섭에 시달려왔던 숙종은 이 사건의 배후에도 명성왕후가 개입된 것을 알고 부왕이었던 현종이 지극히 아꼈던 복선군 형제에게 굳이 벌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하루만에 무죄판결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 즉시, 김우명의 평소 행실에 대한 지적이 일어났으며, 왕실의 가까운 종친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한 김우명은 의금부에 대기하여 무고죄와 반좌율(죄가 없는 이를 무고한 내용에 기준하여 처벌하는 법)로 처벌받게 될 사태가 발생했다.
위기에 처한 친정아버지를 구명하기 위해 명성왕후는 왕명을 빙자하여 한밤 중에 대신들을 긴급소집하였고, 소복차림으로 왕이 집무를 보는 장소인 편전으로 나아가 대성통곡을 하며 삼복 형제가 궁녀들과 불륜을 맺은 것은 조작이 아닌 사실이니 이들을 처벌하겠다 약조하고 그녀의 눈 앞에서 교지를 적을 것을 명했다. 왕대비의 행위에 곤혹스러워진 대신들은 그녀의 요구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모후의 난행에 처지가 곤란해진 숙종은 다음날 즉시 삼복형제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이 사건에 대해 청남 영수 윤휴는 숙종에게 직설적으로 "왕대비를 조관하라."는 간언을 올렸고, 부제학 홍우원, 이제학 등은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 지적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제껏 자행되어온 명성왕후 김씨 가문의 지나친 외척 행위가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되어 명성왕후의 친정 가문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딸 덕분에 처벌은 면하였으나 대대적인 망신을 당한 김우명은 조정에선 그의 외척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뒤에선 명성왕후를 사대부가 조선 최고의 악후(惡后)로 꼽는 문정왕후에 빗대어 비아냥거려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불편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병을 핑계하여 자리에 누워 버리곤 공개적으로 치료를 거부하여 불편한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명성왕후의 행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김우명은 낙향하여 6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일설에는 홧병으로 사망, 혹은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삼복 형제는 9월 16일에 방면되어 다시 서용되었다.
아버지 김우명의 죽음과 친정의 몰락 위기, 자신을 향한 비난을 삼복형제와 남인의 탓으로 판단한 명성왕후는 그녀의 가문에 정치적· 개인적으로 원한을 갖고 있던 서인 산당(山黨: 송시열 일파)을 회유하여 삼복형제와 남인 타도에 나섰다. 이에 이루어낸 것이 삼복의 변이며 삼복의 변은 경신환국으로 확대되었다. 경신환국이 이루어진 후, 명성왕후는 초비(初妃) 인경왕후를 잃은 숙종의 곁에서 정인(情人) 궁녀 장씨(훗날 희빈 장씨)를 쫓아내고, 인경왕후의 장례를 마친지 불과 한달 만에 송시열의 혈친이며 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송준길의 외손녀 민씨(인현왕후)를 간택하여 숙종의 계비로 맞이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는 훗날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 신임사화 등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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