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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51 : 조선의 역사 293 (제18대 현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751 : 조선의 역사 293 (제18대 현종실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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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현종실록(1641~1674년, 재위 : 1659년 5월~1674년 8월, 15년 3개월)
2. 예송의 전개 과정
예송(禮訟)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두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왕위 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학문적인 언쟁인 것 같지만 깊이 파고들어보면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였다. 따라서 당시의 선비들에게는 왕권을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목숨을 걸 만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는 서인들이 인조 반정을 도모할 때 대명사대주의를 내걸었던 점을 상기하면 명은 황제국이요, 조선은 신하국이다. 따라서 임금이나 자신들은 동급의 신하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팽배해져 있었다. 또 효종은 차자로 적자가 아니므로 정통성이 없는 군주로 평가절하 한 데서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인조는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세손이 아닌 돌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에 책봉하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당시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당연히 소현세자의 첯째 아들인 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이 법을 어긴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인조가 죽고 왕위를 이은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현종이 왕위를 잇자, 이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죽었을 때 장자는 3년상, 차자 이하의 아들은 만 1년상인 기년상 치러야 옳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서인과 남인의 해석이 엇갈렸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측은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이므로 신하가 될 수 없으며, 또 효종은 조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또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종지설(四種之說 : 왕위를 계승하여도 3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 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남인의 허적과 윤선도, 소북계의 윤휴 등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긴 하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대우하여 3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들은 누구던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주자가례>에 입각하여 왕이던 일반인이던 모두에게 종법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수주자학파와, <주례>, <의례>, <예기> 등의 고례에 입각하여 왕에게는 일반인과 똑같이 종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탈주자학파 사이에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호학파에 기반을 둔 서인과 영남학파에 기반을 두고 있던 남인에 의한 일대 학문적 해석 차원의 이념 정쟁으로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논쟁이었다.
또한 이 문제에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 문제도 함께 섞여 있었으나 왕권과도 관련이 있었다. 즉 송시열의 주장대로 종법에 따라야 한다면 원래 왕위를 효종이 아닌 소현세자의 아들이 계승해야 했다. 따라서 종법을 주장할 경우 효종이 왕위 계승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변칙적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송시열이 주장한 '종법주의'는 이런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소현세자의 셋쩨 아들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자칯하면 이 종법주의는 해석 여하에 따라 현종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송시열의 말대로 기년상을 주장할 경우 왕위 계승권이 현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때 소현세자의 장자와 차자는 유배지에서 풍토병으로 죽고 없었다) 석견에게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남인의 윤선도는 이런 논리상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송시열, 송준길 등의 서인 세력이 복상 문제를 기회로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몰아 제거하려 했다. 즉, 이종비주(貳宗卑主 : 종통을 종통과 적통으로 분리해 임금을 비하시킴))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하지만 윤선도의 논리가 송시열 등의 서인들에 대한 모함이라는 탄핵에 의해 윤선도는 귀양 조치되고, 현종이 더 이상 예론을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함으로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정쟁에서 패배한 남인은 조정에서 발언권이 크게 떨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남인 유생들이 윤선도 구명 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조정에서 끝난 예송은 지방 유생들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러한 제1차 예송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 대립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후 예송이 누그러졌다가 1674년 정월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효종 비를 장자부로 보면 기년상이고, 차자부로 보면 대공상(9개월)이었다. 또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큰며느리든 둘째 며느리든 모두 기년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서인 쪽에서는 이번에도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다루어 대공설을 주장하였고, 남인 쪽에서는 효종이 왕위계승권자임을 들어 장자부로 다루어야 하다며 기년설을 주장했다. 말하자면 '제1차 예송전'의 반복인 셈이었는데, 이 사건을 '제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이라 한다.
그런데 이 갑인예송에서는 변수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서인 내부 갈등에 의한 당의 양분 사태였다. 서인으로서 제1차 예송논쟁 때는 송시열의 주장에 따랐던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돌연 남인 쪽을 응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유는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은 남인과 연결하여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현종은 기년설 쪽에 손을 들어주었고, 마침내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정은 다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의 힘이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던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들고 나왔고, 부왕의 뜻을 받든 숙종은 다시 예송을 일으킨 송시열 등을 유배시켜 버렸다. 이로써 남인의 허적, 윤휴 등이 정권을 잡고 서인의 세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하지만 예송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송시열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송시열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인과 연합하였던 김석주가 이번에는 남인 세력에 밀려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 세력과 연결하여 허적, 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면서 예송은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이때 숙종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예송은 이처럼 단순한 복상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 정쟁이다. 말하자면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로써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그 실현 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의 이념 논쟁으로, 조선 후기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들의 주자이론에 의한 성리학적인 이상국가니 이상적인 붕당정치형태이니 하는 이야기는 좋게 말해서 표현한 것이고 내면은 효종의 정통성 시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복제 문제로 한 나라의 조정이 오랜 기간 동안 예송 논쟁이라는 것이 기호.영남 학파 간에 학파와 당파가 갈리어 세력 투쟁을 벌인 점과 사대주의에 근간을 둔 주자학에 빠져 국력을 낭비한 점은 심화된 유교사상이 가져다 준 엄청난 폐해로 볼 수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중국을 황제국으로 존중하며 조선의 국왕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신하로써 동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예송 논쟁은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서인들과 그래도 왕위를 이은 효종을 장자의 예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의 차이 뿐이었다.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기 그지 없는 가운데 조정의 중신들이 단순한 복제 문제로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은 분명 그것은 국력의 낭비이며 허례허식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위화도 회군'(고려 말 만주 정벌군을 이끌고 회군하여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의 쿠테타)이니, '정축하성'(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에게 항복한 것)이니 하는 것처럼 말로 허물을 감추고 글로 사실을 왜곡하며 역사 기록을 변질시키는 등 조선 선비들의 사고와 언행은 내실보다 외형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유교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3. <현종실록> 편찬 경위
<현종실록>은 총 22권 2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59년 5월부터 1674년 8월까지 현종 재위 15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75년 5월에 시작되었지만 도중에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자 일시 중단되었다. 그래서 실록 편찬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다가 1677년 2월에 왕의 독촉이 있자 당상과 낭청을 증원하고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7시에 퇴근하는 '묘사유파법'을 세워 급하게 진행하여 3개월 만인 5월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 초고를 바탕으로 4개월 뒤인 9월에 인쇄를 완료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인원은 총재관 허적, 권대윤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6명, 도청낭창 11명 외에 일반, 이방, 삼방당상과 낭청 47명 등 도합 66명이었다.
하지만 이 실록은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개수하여 <현종개수실록>으로 재편찬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당하고 서인이 조정을 다시 장악하게 되자, 앞서 편찬되었던 <현종실록>은 왕의 독촉으로 불과 3개월 만에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잘못 기록되거나 편파적으로 기술된 부분이 있어 개수 작압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숙종은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실록개수청을 설치하고 개수 작업을 진행토록 했다.
실록청은 대체로 실록 전체의 편찬을 담당하는 도청관과 1, 2, 3방으로 조직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현종실록 개수청은 현종 대의 시정기가 실록 편찬 당시 세초되어 남아 있지 않으므로 1, 2, 3방을 설치하지 않고 다만 도청의 당상과 낭청만 임명하여 개수토록 했다.
이들은 사관의 <가장사초>와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추국일기> 및 기타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하여 3년 만인 1683년에 완성하였다. 이때 참여한 인원은 총재관 김수항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6명, 도청낭청 15명, 그 외 등록낭청 53명 등 도합 75명이었다.
이 개수 실록은 <현종실록>과 마찬가지로 현종 재위 15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으며, 부록 1책에는 개수된 현종의 행장, 애책문, 시책문, 숭릉지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개수 실록은 <현종실록>과 함께 현종 대의 사실은 물론 , 조선 후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근본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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