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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02 : 조선의 역사 244 (제16대 인조 19) 본문
한국의 역사 702 : 조선의 역사 244 (제16대 인조 19)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인조실록의 내용은 아니나 추가로 조선의 군사제도와 정묘.병자호란 당시 군사력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3. 병자호란 직전의 군사력
남한산성의 강화와 수어청의 신설
인조는 집권 초기부터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중앙군의 재편성 강화와 함께 지방군을 재정비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조는 집권 직후에 호패법을 실시하여 인력 자원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하고, 군비 확충 재원을 확보하여 진관제도에 따른 방어체제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호적 정리가 거의 완성될 단계에 이르렀을 때 정묘호란이 발발하여 호적 문서들이 모두 소실됨에 따라, 호패법 실시에 의한 국방 체제의 재정비 강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랫서 정묘호란 이후의 군비 확충은 수도 방어군을 중심으로 제한된 범위내에서 소극적인 증강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한계내에서 조정은 어영청 및 훈련도감의 병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남한산성에 새로이 수어청이라는 군영을 설치하여 수도 방어군 규모를 확대 재편성하였다.
어영군은 정묘호란 당시까지 1,000명 선이었으나, 1634년 인조 13년에 6,200명 선으로 규모를 확대시켰으며, 훈령도감은 2,700명 선에서 1631년 인조 9년에 4,000명 선으로 증원시켰다. 이때 훈련도감은 후금군의 기병 전술에 대응 하기 위하여 마군의 확충에 노력한 결과 병자호란 직전인 1634년에 이르러서는 마군 5초(약 600여 기), 보군 25초(약 4,400명)로 총 병력 5,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1627년 인조 5년 9월에는 유사시 강화도와 함께 최후 방어 거점이 될 남한산성의 수비를 전담하는 병력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신설하고 남한산성의 수비를 전담토록 하였다. 수어청은 광주 진관에 소속된 5개 읍의 군사와 원주.대구.안동 등지의 군사를 관하에 소속시켜 남한산성의 주변, 즉 경기 남부 지역의 여러 진을 총괄하게 되었는데, 그 병력 규모가 약 12,700명에 달하였다.
중앙 상비군의 증강은, 당시 조선의 실정으로서는 재정 능력이 부족하여 서북 지방에 대한 방어력의 증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보완 조치로 이루어진 것이나, 이는 정묘호란을 겪은 뒤, 후금군의 재침시에는 최후이 결전을 수도권에서 전개한다는 방어 전략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 후금군이 침공하였을 때는 중앙 상비군이 수도권 방어에 실질적인 역활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직전 수도 방어를 위한 상비군은 다음과 같은 병력 수준을 유지하였다.
호위청 : 1,000명
어영청 : 6,200명
총융청 ; 20,000명
훈련도감 ; 5,000명
수어청 ; 12,700명
총 계 ; 45,000명
전체적으로 보면 45,000명 선으로 그리 적은 규모도 아니다. 그러나, 각 부대의 병력이 2교대 내지 3교대의 순환 근무 방법에 의하여 교대로 상경하여 입번(근무)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긴급사태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실제 병력 규모는 그 3분지 1인 12,000명 선에 불과한 셈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변방 방어 태세
1624년 이괄의 난으로 파탄 상태에 빠졌던 서북 방면 방어 체제는 정묘호란 직전에 가서야 간신히 회복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나, 정묘호란을 통하여 또 한 차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특히 청천강 이북 지역 일대의 방어 체제는 이 전란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마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호란 기간 중 청천강 이북 지역의 대부분 고을에서는 인구의 10분의 4가 유망하거나 전몰하게 되어 병력 자원이 고갈되었고, 전야가 황폐하여 군사력을 보충 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바닥 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 확보를 포기하자는 이른바 '청북 포기론'까지 불러일으키게 되어, 1627년 정묘호란 이후로 1632년 인조 10년에 이르기까지 6년동안 청천강 이북 지역 방어를 거의 포기하고, 평안병사의 소재지인 청천강 남안에 위치한 안주를 중심으로 하여 방어 병력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1633년 다시 청천강 이북 지역에 대한 방어 체제를 재건해야 된다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자, 인조는 임경업을 청북방어사로 임명하여, 의주를 중심으로 한 청천강 이북 지역의 방어 체제 제편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병자호란이 일이나기 직전인 1636년 인조 14년 7월까지 의주 주변의 서북 변경 일대는,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확보한 4,000여 명의 병력을 근간으로 하여, 황해도 병력 2,000여 명, 하삼도 병력 1,600여 명 등 도합 8,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할 수가 있게 되어 겨우 변경 방비의 명목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청천강 이북 지역에 더 이상의 병력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청군의 침입에 대처할 방어 전략의 수립에 있어서 두 가지의 의견이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김류, 김시양, 김자점 등은 안주를 중심으로 병력을 집중배치하여 후금의 침입을 초기에 서북 지방에서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이귀, 이서 등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선에 주방어선을 설정하여 서북 지방의 인적.물적 을 동원하는 부담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서북 지방의 인적.물적 자원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부여한 연후에 서북 지방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629년 인조 7년 11월 이후, 김류 계열이 병권를 장악하게 되자, 안주를 중심으로 병력을 집중배치하게 되었으며, '의주 - 아주 - 평양 - 황주 - 평산 축선상에서 제1선이 돌파되면 제2선에서, 제2선이 돌파되면 제3선에서 적을 방어한다.'는 방어계획을 확정하게 되었다.
이에, 의주에는 청북방어사가 주재하여 제1선 방어를 담당하고, 안주에서 평안병사, 평양에서 평양감사, 황주에는 도원수, 평산에는 도체찰사가 각각 주배하여 군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병 중심의 소수 병력으로 기병 위주인 다수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방어가 효과적이라는 판단 아래, 의주의 백마산성, 평양의 자모산성, 황주의 정방산성, 평산의 장수산성 등을 보수하여 그 지역 부대의 병력을 산성에 배치하는 한편, 봉수에 의한 경보체제를 확립하고, 산성간에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방어 전략도 후금군이 침공하자 조선군은 산성에 틀어박혀 평야 지대는 무인지경이 되자 후금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한양으로 진격하였고 결국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할 틈이 없자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조선군은 산성에서 은거할 뿐, 축차 방어는 커녕 후금군이 지나간 다음 후금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등 소기의 목적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산성의 거점 방어와 적 후방을 교란하는 역활, 그리고 적 주력을 차단하는 기동군을 동시에 운용하여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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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임경업(林慶業, 1594년~1646년 음력 6월 20일(양력 8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었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가 충민(忠愍)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충주(忠州) 출생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후손이다.
24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1) 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토벌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에 등용되어 북방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의주에 있는 백마 산성을 다시 쌓았다. 당시 누르하치가 만주 대륙을 통일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명나라와 조선에 싸움을 자주 걸어왔다. 후금의 소규모 부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여러 번 격퇴하여 되돌려보냈다.
그는 조선 조정 내 친명 인사의 한사람으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주었으며, 임경업은 명나라를 위하여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으로 보답하여, 명나라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생애
병자호란 때까지
임경업의 아버지 임황은 당상관인 절충장군에까지 올랐으나, 임진왜란 이후 여러 번의 귀양살이 끝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임경업은 어릴 적부터 기상이 활달하고 용감하여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그가 6세 때 골목에서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그의 진영을 밟고 지나가려고 하자, 임경업은 "안됩니다. 이 곳은 대장군이 지휘하는 진영이므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눈을 부릅뜨고 말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학문도 비상하여 글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응모 출전하여 정충신 휘하에서 머무르다가 안현(鞍峴) 싸움에서 이괄의 군대를 맞아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그후 우림위장·방답진첨절제사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孔有德) 등의 무리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대청 투쟁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서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직후 다시 여진족이 침입했다. 이때 그는 백마 산성에서 후금 군사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으나 적은 백마 산성을 피하여 서울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조선은 제대로 싸움도 못해 보고 후금에 무릎을 꿇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자신의 뜻과는 달리 명나라와 싸움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명나라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본심이 아님을 알리고, 이쪽의 전략을 알려주어 피해가 적도록 했다.
1640년 안주목사 때 청나라의 명령으로 주사상장으로 가도에 주둔 중인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한다. 어쩔 수 없이 출병하긴 하였으나, 다시 명군과 내통하여 의도적으로 선봉장을 피하고, 청나라 장수 심세괴를 선봉장에 나서게 하고 그 사실을 명군에 알려 섬세괴가 전사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이런 일이 일어나던 중, 가도 주둔 명군의 지휘관인 도독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체포되었다. 임경업은 청으로 압송되기 전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고, 이에 청 태종은 임경업을 빌미로 조선 내 반청세력에 대한 소탕령을 내렸다. 조선에 더 머무르기 힘들게 된 임경업은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청나라에 발각되어 붙잡히게 되자 탈출하여 중으로 변장하여 승려 행세를 하면서 명나라로 건너간다.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여 명나라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명나라 등주 도독 황룡을 통해 숭정제로부터 부총병의 직위를 하사받고 청나라 정벌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벌 준비 중 청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청태종이 산해관에 입성하자 황룡은 겁을 먹고 도망쳤고, 중군을 이끌던 마등홍이 대신 전군을 영솔하고 임경업과 함께 석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명나라 숭정제가 목매어 자결하였고, 천도한 남경마저 함락되어 정세가 바뀌자 마등홍 역시 청에 항복하였다. 임경업도 도망가려 하였으나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 태종은 임경업을 설득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했으나 임경업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송환과 사형
그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호송되었다. 이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기원이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접한 1646년 인조는 임경업을 심문하기 위해 임경업의 환국을 요청했고, 순치제는 그를 내주었다.
1646년 6월 17일 인조 24년 조선에 돌아온 그는 인조의 친국 과정에서 심기원과는 아무런 관련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자 임경업을 시기한 김자점이 나라를 배신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며, 형리들을 시켜 장살(杖殺)시켜 버렸다.
사후
사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자점도 몰락하고, 북벌론을 주장하던 송시열, 윤휴 등이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신원, 복권 주장은 번번히 묵살되었다. 그뒤 숙종 때에 가서야 1697년(숙종 23년) 복관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復官)되었으며,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 등에 배향되었다. 1726년(영조 2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 3년)에 조정에서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1791년(정조 15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었다.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구전 소설 임경업 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민이다.
일화
- 임경업은 죽기 직전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라고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라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한다.
- 임경업을 모함하여 때려죽인 김자점도 얼마 못가 역모를 꾸미려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 이후 청나라에서는 그의 부인을 심양으로 끌고 가서 고문했다. 그러나, 임경업의 부인은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라고 하며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했다고 전해진다.
김자점
김자점(金自點, 1588년 ~ 1651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이며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시조부로 왕실의 인척이었다. 인조 반정에 참여하였고 귀인 조씨의 인척이었으며 친청파 정치인이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인조 반정의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1623년 3월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때에는 옥에 갇힌 기자헌 등 북인(北人) 인사 40명의 전격 처형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뒤 도원수로 병자 호란 당시 대숙미처로 파면되었다가 복직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심기원 일파를 제거한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이후 친명파이자 북벌론자인 임경업 등을 제거한 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효종의 북벌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사형당했다. 좌의정 쌍곡 김질의 5대손이며 백범 김구(金九)의 방조였다. 자(字)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안동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으로, 그의 아호 낙서를 따서 인조 반정 이후의 서인 외척당을 낙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가 처형되면서 낙당은 몰락하게 된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전라남도 출신.
생애
출생과 가계
낙서 김자점은 1588년 전라남도 낙안군 낙안읍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 부친은 김함(金王+函)이다. 고려의 명장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으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가 장인 정창손을 통해 거사를 누설한 김질의 5대손이었다.
또한 동명이인인 효자 영모당 김질(金質)은 그의 삼종조부로 할아버지 김억령과 6촌간이었다.
아버지 김함은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고 죽었지만, 할아버지 김억령은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고 청백리로 이름높았다. 또한 인조 초에 이조판서를 지낸 효헌공 김찬은 그의 7촌 재종숙이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그의 동문인 이귀는 그의 제수의 친족으로 사돈간이었다. 그뒤 본가가 있는 영희전(永禧殿) 동쪽길 근처로 옮겨왔다.
수학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암기에 능하였다. 일찍이 어릴 때 묵암(默庵)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성혼은 김종직과 조광조의 학통으로, 김종직-김굉필-조광조-성수침의 학맥을 계승한 정통 사림파 성리학자였다. 임진왜란으로 오래 그에게서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그는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글재주로 이름높았으며, 정철, 조헌 등이 동문수학한 선배들이었다
.
학문상으로는 성혼의 문하인 성리학자였으나, 산림에서 연구한 송익필-김장생 계열과는 다소 척을 지게 된다.
음서와 관직 생활
그는 문과를 거치지 않고, 문벌과 학덕에 의해 등용되어 음보(蔭補)로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를 반대하여 광해군 때에 대북파 세력에 맞서다가 대북파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났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 심기원(沈器遠)과 함께 반정을 계획하고 자신과는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포섭, 이귀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년)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등을 포섭, 규합하였다. 1622년 이귀·김유·최명길, 이괄 등과 함께 광해군 축출을 모의하고 선조(宣祖)의 서손 능양군의 추대를 모의하였다. 1623년(광해군 15년) 공조정랑이 되었다.
한편 그가 이귀와 함께 서궁(인목대비의 비칭)을 두둔하고 역모를 꾸민다는 설이 돌면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반정과 전란
인조 반정과 공신 녹훈
1623년 3월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弘濟院)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홍제원 밖 세검정에서 이귀, 김류, 이괄(李适) 등이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합류하여 홍제원을 치고 바로 궁궐로 진격,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고 인조를 추대하고 반정을 성공시킨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 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원로 정승들을 체포하여 이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차단하고 이귀의 권력 장악을 도와 그가 주로 인사를 장악하게 하였다. 3월말 바로 왕명으로 6품직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인 출신 이원익을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천하고 일부 직책을 남인에게도 주게 하여 형식상의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이조와 병조에는 서인을 배치케 함으로써 사실상의 서인의 정권장악을 이루어냈다. 인조 반정 직후 그는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戶曹 佐郞)을 거쳐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그해 9월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1등 정사공신이 되어 도원수가 되었다.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일설에는 공훈보다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김자점의 동생은 병약하여 일찍 죽었고, 이귀의 딸 이예순은 입궐하여 궁중의 무수리가 되었다. 이예순이 무수리로 있으면서 김상궁의 눈에 들자 그는 제수였던 이예순을 통해 김상궁에게 연줄을 댔다. 그러나 반정 이후 김류와 이귀가 대립하자, 김류의 편에 재빨리 가담한다.
이괄의 난
1624년(인조 2) 승지로 승진한다. 1624년 부원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왕이 공주로 환도하게 되자 김자점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인의 인사들을 죽이는 일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기자헌 등 감옥에 갇힌 40명의 북인 인사들이 즉시 처형당하고, 30여 명 이상의 대북파, 소북파의 중진들이 곤장을 맞고 장살당했다. 인조를 따라 공주까지 호종했다가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다시 도성에 돌아왔다. 1624년 승지, 1625년(인조 3년)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625년 세자빈으로 윤의립(尹義立)의 딸이 간택되자 서인들은 국혼물실이라는 당론에 따라 윤의립의 딸의 간택을 반대했다. 이때 김자점은 특진관 자격으로 윤의립의 딸이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尹仁發)의 사촌 누이라는 이유, 역적의 친적이라 불가하다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비빈 간택에 공신들이 끼어드는 것을 불쾌히 여긴 인조로부터 불경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노여움을 사고 그해 8월 삭탈관직, 문외출송의 명이 내려졌으나, 명을 거두어달라는 사간원의 건의와 우의정 신흠(申欽) 등의 변호로 무마되었다.
정묘호란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송였하고, 순검사(巡檢事) 겸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28년 숭정대부(종1품)로 승진했다.
1630년 한성부 판윤, 이후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와 겸 구관청 당상(句管廳堂上)이 되었다가 1633년 조선군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도원수 재직 중 한성부와 경기도 주변 지역에 성곽과 진, 보를 보수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1633년 7월 상의원제조직과 구관청당상의 겸임에서 해임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년) 청나라의 병력 움직임이 예상된다는 보고에 따라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병자호란과 유배
그러나 그는 토산 전투에서 참패한 죄로 벼슬을 빼앗기고 문외출송 당했다.[1]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을 받고 1637년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다시 절도정배(絶島定配)형을 받고 충남 서산군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부패,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등에 대하여 산림 예학자와 북벌론자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계속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의 지나친 북벌론에 피로와 염증을 느낀 인조의 특명으로 1639년에 특별 사면되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자점보 건립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 의 우뚝 솟은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그는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보를 건립한다.
그는 아버지 김함이 안장된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보를 만들었는데 이를 자점보라 한다. 자점보는 20세기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때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총애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물이 있어야 되는데청미천만으로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뽑아 써서 근처 일대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긴요하게 활용되었다. 이때 그가 세운 자점보는 20세기까지도 이천, 여주일대의 중요한 농업용수의 수원지로 활용된다.
정치 활동
공서파 가담과 정쟁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은 다시 공신들을 중심으로 공서(攻西)가 되고, 김상헌(金尙憲), 김상용 등 비주류와 김집, 안방준 등의 산림학자들을 중심으로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그는 공서에 가담하여 김상헌, 김집 등 유림(儒林)을 배경으로 한 청서를 탄압했다.
1640년(인조 18년) 서용되어 강화부유수가 되고, 그의 복직에 사헌부가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어 그의 손자 김세룡이 인조의 서녀이자 귀인 조씨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 효명옹주를 손부로 맞게 되자 다시 세력을 잡고 권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후 김류와도 결탁하였으며, 1642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643년 1월 사직을 청하고 물러가 쉬었다가 3개월만에 판의금부사로 복귀, 동년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의정부우의정, 어영청도제조 등을 지내고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그뒤 같은 공신출신 공서인 원두표(元斗杓)와 세력 다툼을 벌임으로써 공서(功西)가 양분되자 그는 낙당(洛黨)의 영수로서 반대파인 원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후 원두표는 산림과 연합하여 그와 대립하게 된다. 1644년초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에 임명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군되었다.
그해에 심기원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경쟁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도태시키고, 승진하여 1644년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사은 겸 주청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동시에 그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의 무리들과 자주 만나다가 결탁하여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소현세자 일파 제거
사돈인 숙원 조씨(淑媛趙氏)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등과 갈등하였는데, 그는 1645년 숙원 조씨와 결탁하여 인조의 의구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제거에 가담하였다.
1645년 8월 24일 영의정으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를 죽이려고 하는 내심을 눈치채고, 1645년 인조의 수라상에 고의로 독약을 투입한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떠넘겨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모함하여 사사시키고 왕손 석철을 비롯 3형제를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더불어 청나라 사신과 역관 정명수 등과 결탁하여 청나라를 등에 업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으로 삼게된다. 소현세자 일가의 비운의 죽음은 사림의 동정 대상이었고, 이런 일련의 비극에는 김자점의 입김이 컸다는 세론이 높았다.
북벌 반대와 산림과의 갈등
1646년(인조 24년) 2월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에 임명되었다. 1646년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임경업(林慶業)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자, 청나라 관리를 시켜 고문으로 죽게 했다. 그러나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을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는데, 임경업이 친국 도중에 이를 발설할까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전에 임경업을 죽게 한다. 이후 그는 송시열, 송준길, 김집, 윤휴 등 북벌론자들의 주 공격 타겟이 된다. 1646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조 후반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공신계열의 분열은 서인 산림의 세력확장에 도움을 주게 된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하게 되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심한 비판,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즉위 초, 효종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권시, 김상헌, 이유태 등을 불러들였다. 그는 산림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나 산림들은 그가 강빈 옥사를 날조하여 민회빈 강씨 등을 죽인 것으로 이해하여 그를 멀리하고 기피하였다.
또한 그는 효종의 북벌정책에 반대하다가 거듭 양사의 탄핵을 당했다. 이들에 의해 1650년초 그는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강원도 홍천에 유배당하게 된다.
최후
1651년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釴)이 군사를 동원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한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의 추종세력들도 모두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이때 김자점의 문하에 출입하며 그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응해(金應海), 기진흥(奇震興), 심지연(沈之演), 이파(李坡), 황헌(黃瀗) 등도 각각 파직당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김련은 형문을 받던 중 옥사한다.
아들 익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자 의금부로 압송된 뒤 아들 김익, 손자 김세룡 등과 함께 국문 후 12월 17일 왕명으로 능지처참형(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만 63세였다.
연좌와 처벌
손자 세룡도 처형되었고,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았으며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된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공서파는 몰락하고 김집, 안방준, 김장생과 그들의 문하생인 산당, 청서파가 집권하게 된다.
연좌제에 의해 그의 다른 아들들과 장손이자 효명옹주의 남편인 김세룡을 포함 처형당했고, 그의 모친과 처, 첩 등은 모두 노비로 끌려갔다. 경기도 이천군 백족산에 있던 그의 아버지 김옥함의 묘소와 전라남도 낙안에 있는 선산 분묘도 모두 파헤쳐져서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문인이었던 이해창(李海昌), 좌승지 엄정구(嚴鼎耉), 판결사 이한(李) 등은 모두 파직당하였고, 그의 측근과 문하생및 관련자들 역시 파직당하거나 유배, 도성에서 추방당한다. 김자점과 동문으로 그와 평소 교분이 있던 안방준은 김자점과의 관계를 해명하다가, 스스로 상소를 올려 대죄를 청하기도 한다.
김자점의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 중 황해도에 정착한 일파의 후손 중 한명이 김구이다. 김자점의 옥 당시 김자점의 10촌이자 백범 김구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개성으로 숨었다가 다시 황해남도 해주로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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