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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01 : 조선의 역사 243 (제16대 인조 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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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01 : 조선의 역사 243 (제16대 인조 18)

두바퀴인생 2012. 9. 7. 06:29

 

 

 

 

한국의 역사 701 : 조선의 역사 243 (제16대 인조 18)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조선의 군비 실태

 

1. 조선 군제의 변천 과정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군사 제도의 운영 원칙은 양인 개병과 병농 일치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까지 양인의 정남(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제반 경비를 부담하거나 하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경군(중앙군)과 향군(지방군)의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경군은 국초부터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세조 때에 확립된 5위 체제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주로 궁성 수비와 수도 방어였다.

 

향군은 육군과 수군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각 도에 주진으로 병영과 수영을 설치하고, 그 아래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 진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는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1455년 세조 1년 이후에는 거진을 독립된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현의 병력을 편성된 진을 소속시키는 '진관체제'로 변경하여 바어 구조를 재편하였다. 그 밖에도 예비군 개념의 '잡색군'을 조직하여 국가 변란에 대비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기에는 군비와 병력이 확충되어 정규군 약 15만 명 선을 유지하였으며, 보충 병력인 '보인'을 합쳐 도합 50만 명선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군제의 변천

 

조선 왕조 전기의 오랜 평화와 문운의 융성으로 말미암아 국민적 기풍이 문약에 빠지고, 상하의 생활풍조가 사치와 안일로 기울어지게 됨에 따라, 국방 체제가 문란해지게 되었다. 경군이나 향군이 모두 명목상의 정원만 책정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병력이 텅 빈 상태에서 1592년 임진왜란을 겪게 된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조선군은 방어 체제면에서 상비병의 확충이 요구되었고, 대적 전술면에서는 조총을 지닌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기의 개량과 다양한 전술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특히, 대적 전술면에서 조선군은 종래 궁시 위주의 장병 전술에 능하였으나, 일본군은 도검에 의한 단병 접전에 능하였던 것이다. 또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장병 무기를 보유하여, 장병과 단병 전술을 효과적으로  배합하여 조선군을 압도하였던 관계로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의 강구가 시급하였던 것이다.

 

이에 류성룡의 건의에 의해 중국 절강창장인 '척계광'에 의해 개발되어 중국 남부에 침입한 왜구에 대해 실효를 거둔 바 있는 '절강전법'을 도입하였다. 전란 중인 1593년 선조 26년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절강전법에 따라 포수.사수.살수 세 가지 병종의 '삼수병'을 훈련시켰다. 이는 장병과 단병을 적절히 배합 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훈련도감은 2,000여 명에 달하는 살수병을 확보하고 이를 근간으로 삼아 지방군을 삼수병 체제로 전환시켜 나감으로써 지역 방위 체제를 단계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2. 정묘호란 직전의 군사력

 

 

중앙군의 정비와 서북 방어군의 증강

 

17세기 초, 만주에서 후금이 일어나고, 명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자, 당시 조선의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노선을 고수하며 가능한 한 전란을 회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광해군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 참상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후금을 의식하여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군비 증강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조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명배금정책을 확고히 함에 따라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조 정권의 조선은 후금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대책의 일환으로 중앙 상비군을 강화하고자 호위청, 어영청, 등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경기 일원의 지방군을 개편하여 중앙군으로 편입시키고, 서북 변경 지역에 병력을 증강시키는 등, 일련의 조취를 취하였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 1년 9월에 인조반정에 참여한 군사들을 정규군으로 전환시켜 편성한 국가 호위 부대로써, 국왕을 근접 경호하는 부대로 창설 초기 병력 규모는 500명 수준이었다.

 

어영청은 1624년 인조 2년 1월에 창설한 군영으로서, 이는 후금과의 관계가 날로 악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즉, 후금이 침입하면 국왕이 개성까지 친정하여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모아 후금에 대항한다는 전제하에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근위 부대로서 신설한 것이었다. 어영청의 초기 병력 규모는 260명 선에 불과하였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당시 조선군 부대들 중 가장 정예한 부대였다.

 

어영청의 신설과 함께 서울에 인접한 경기 지역의 군사 가운데에서 정예군을 선발하여, 유사시에는 수도 방어에 활용하고자 경기군의 재편성 작업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623년 인조 1년 윤 10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수원.장단.양주 등지에서 삼수병 3000여 명을 확보하고, 이를 중앙군에 편입시켜 수도권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인조 집권 초기 수도권 방어를 위한 중앙 상비군으로서 기존의 훈련도감군 2,700명, 호위군 500명, 어영군 260명, 수원.장단.양주 등 경기군  3,000명 등 으로 도합 6,500명 규모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수도 방어를 위한 중앙군 강화와 더불어 서북 국경 지대의 방어 병력도 증강되었다. 종래 평안도의 각지에서 지역 방어에 임하고 있던 13,000여 명의 지방군 병력 이외에 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서 15,000여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서북 변경 지역에 배치함으로써 국경 방어 병력을 30,000여 명 수준으로 증강시킨 것이다. 그리고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황주에서 서북 방면의 군사를 총괄토록 하고 , 예하에 이괄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아 안주에서 최전선의 방어 임무를 맏도록 하였다. 따라서 후금군이 침입하였을 때 신속히 동원 가용 병력 규모는 서북 방면에 배치된 지방군 30,000여 명과 중앙 상비군 6,000여 명으로 도합 36,0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괄의 난과 중앙군의 증강

 

인조 즉위 후 국방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었으나,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불과 18일 만에수도 한양이 반군에 의해 함락되어, 수도 방어의 취약점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도권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 상비군을 대폭 늘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1624년에 호위청과 어영청의 병력을 각각 1,000여 명 수준으로 증강하고, 이와 함께 수원.장단.양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의 삼수병도 그 수를 20,000여 명 수준으로 대폭 증강시켜 총융청을 창설하였다.

 

총융청은 유사시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어려울 경우, 국왕은 강화도로 이동하고,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여, 이들 두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서로의 군세를 호응시키는 기각지세를 형성하여, 적의 예봉을 둔화시키는 한편, 각 도에서 군사들이 집결하면 반격을 개시하여 적을 섬멸한다는 작전 개념 아래, 반격시 주력을 담당할 부대로 신설되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남한산성 축조와 강화도의 군사력 증강도 서둘러 추진되었다. 그 결과, 1624년 인조 2년 3월부터 1626년 인조 4년 8월까지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강황도의 병력을 증강하였다. 총융청 소속의 병력 7,000여 명을 총융청으로부터 독립시켜 강화도에 주둔케 하고, 경기 수영을 강화도에 위치하게 하여 전시 수도인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크게 강화하였다.

 

따라서, 정묘호란 직전까지 수도권 방어 병력은 훈련도감군 2,700명, 호위군 1,000명, 어영군 1,000명, 총융군 20,000명으로서, 도합 25,000명 선의 병력을 확보하게 되어 인조 초년의 중앙 상비군 6,500명 선에 비해 4배 정도의 증강을 보이게 되었다.

 

 

 

정묘호란 직전의 방어 체제

 

 이괄의 난을 계기로 수도권 방어를 위한 중앙 상비군은 종전에 비해 질.량 면에서 크게 증강되었으나, 서북 방면의 방어력은 반대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30,000여 명 수준이었던 서북 방면 병력이, 난이 평정된 후에 평안도 병력 7,000여 명과 하삼도에서 증원된 병력 1,50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10,000명 선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종전에 비해 3분지 2이상이  감소되어 버린 것이었다.

 

서북 방면의 부족 병력을 보충하려면 하삼도를 비롯한 다른 지방으로부터 20,000명 이상의 병력을 보충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조정의 재정 형편상 군량 조달이나 군기 확보 등 제반 난문제를 해결할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서북 방면의 방어 병력을 새로이 증강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서북 지방의 가용 병력 수준을 고려하여 방어 병력을 현상 유지만 하려고 하였으며, 아울러 수도권 방어 체제를 개편하여 서북 방면의 제1선에서 방어전이 여의치 않을 경우 수도권에서 침공군을 격퇴시킨다는 작전 개념 아래, 강화도- 남한산성을 연한 선 중심의 방어 계획을 수립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북 방면의 병력 증강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1624년 6월 이괄의 난을 평정한 도원수 장만을 도체찰사로 승진시키고, 이홍주를 도원수, 남이홍을 평안병사로 삼아 당시의 제한 된 병력으로 서북 국경 지대의 요충지인 의주.용천.정주.영변.안주.평양 등지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여 침공군의 수도권 진출을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조정은 북방에서 적이 침공시 예상 접근로로 의주 - 용천 - 철산 - 정주 - 안주를 연하는 접근로와 벽동 - 창성 - 삭주 - 귀성 - 태성 - 영변 - 안주를 연하는 접근로의 두 가지로 판단하고, 그 경로상의 방어 진지를 정비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특히 의주 주변의 백마산성.용골산성.능한산성 등의 방비 태세를 강화토록 하였다.

 

그 후, 1626년 8월에 이르러, 후금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서북 변방의 보고에 따라, 조정은 중앙의 훈련도감군 2초(약 250명)와 하삼도 군사 5,000여 명을 서북 지방으로 증원시켰다. 그해 11월 압록강이 얼어붙기 시작하여 후금군의 침공 위험성이 증대되자, 함경도 남부 지역의 병력 2,000여 명을 평안도로 이동시켰다. 이로써, 호란 직전의 서북 방어 병력은 약간의 증가를 보게 되어 종래의 8,500명 선에서 16,000여 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

 

이와 같이 조정에서는 서북 방면의 방어력 증강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1627년 후금군 30,000명이 기병을 동원하여 침공하자, 서북 변방 방어군은 후금군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후금군은 조선군이 주눋하고 있던 산성을 피하여 대로를 따라 파죽지세로 남진하게 되었으며, 결국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피신하고 강홍립의 중재 아래 화의에 의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