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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98 : 조선의 역사 240 (제16대 인조실록 15) 본문
한국의 역사 698 : 조선의 역사 240 (제16대 인조실록 15)
남한산성
제16대 인조실록(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4. 인조시대의 변란들
병자호란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패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약조와는 달리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패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사항이 이처럼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자 인조 비 한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구해 급히 본국으로 도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읺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했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버린다. 그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적의 침공을 막아낼 재간도, 능력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운 것이다.
그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조선의 태도에 분개하였고 또 후방의 안전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대부분은 백성들과 같이 산성으로 들어가 청야전술을 전개하였고 청군은 산성을 피해 무인지경의 평야를 달려 한양으로 쾌속 질주하였던 것이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통상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한양까지 3~4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였던 경우와 비교할 때, 거리가 비슷한 북변의 장계가 10일 이상 걸렸다는 점이 의문이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재 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먼저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군이 벌서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불광동)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 등은 그곳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했다. 다음 날 15일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떠나려 했지만 폭설로 인해 말을 움직일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남한산성에 모인 총 병력은 약 1만 3천이 되었다. 이때 성안에 있던 식량은 양곡 1만 4천 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 산성에 당도하였고, 청 태종은 다음해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혹한과 굶주림으로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각 지역의 조선군들은 조직적인 지휘력과 통합전투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각개로 진군하다가 각 부대가 청군과의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였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격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박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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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 저서 소설 '남한산성'에 대하여......
'죽음으로 의로울 것인가 삶으로 치욕스러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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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잡은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으니, 어느덧 저녁이다.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일까? 인조가 삼전도에 나와 오랑캐의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투항하는 행위는 작가가 5공시절 더러운 권력에 투항해 용비어천가를 적는 행위와 하나로 포개진다. 이 소설이 치욕에 관한 소설이라면, 치욕을 감당하는 방식의 구체와 그들을 압박해서 치욕으로 내몬 정치적 외연(外延)을 따로 떼서 읽을 수 없다. 병자년 겨울, 남한산성 안에서 삶을 도모하며 편전과 민촌이 감당하는 굶주림과 추위와 공포는 그 치욕의 바깥이다. 아울러 그 바깥은 곧 인조의 내면에 들어앉은 참상의 외화다. 내가 읽은 것은 치욕의 내력이며, 그 말의 소용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무성하게 일어나는 말의 멀미이고, 그 멀미를 감당해야 하는 자들의 참상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임금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문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를 배경으로 삼는다. 병자년 겨울, 청의 수십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싼다. 청과 죽기로 싸우자는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니 청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친하자는 최명길 사이에서 인조는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하고 번민한다.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에 벌어진 설전과 더불어 영의정 김류와 수어사 이시백의 활약이 보태지며 남한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얽힌 역사가 작가 특유의 문장으로 펼쳐진다. 김훈의 건조하고 성마른 문장은 이미 그만의 독자 브랜드다. 작가는 물기가 빠진 메마른 문장으로 인조와 그의 신료들이 죽음으로 의로울 것인가, 삶으로써 치욕을 감당할 것인가를 다그친다.
‘남한산성’은 ‘인조실록’에 크게 빚지고 있다. 칸의 대군이 군사를 일으켜 내려오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숨는다. ‘남한산성’은 칸의 대군에 포위되어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그의 신하들이 겪은 병자년 겨울 47일간의 행적을 적는다. 남은 곡식으로 성 안 사람들이 연명하는 것은 길어야 두 달이다. 성 안의 소출은 내년 가을에나 가능하고, 청의 대군에 막혀 성 밖의 곡식을 들여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고립무원의 성을 위협하는 것은 성을 에워싼 청의 대군과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절망과 공포다.
하루하루 양식은 고갈되고, 그 고갈은 죽음을 더 가깝게 불러온다. 허기에 지칠수록 주린 자들의 오감은 예민해져서 성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음식의 품목들을 불러낸다. 말 피, 육포, 보리밥, 간장 국물, 곶감, 말국, 조밥, 찐 메주콩, 졸인 닭다리, 취나물국, 쌀죽, 구운 개구리, 된장국, 개장국, 찹쌀 막걸리, 조껍데기술, 어란, 문어, 조밥, 무국, 밴댕이젖, 돼지국, 삶은 콩, 냉이국, 돼지 염통으로 끓인 탕국, 떡국, 쇠고기 등에서 나오는 김과 냄새가 주린 자의 후각과 빈 위장을 자극한다. 삶을 향한 의욕이 커질수록 이 자극은 커진다. 이 음식들은 마치 조난당한 바다의 부표와 같다. 굶주린 자들은 아귀와 같이 이 부표에 집착하고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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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2007
임금은 힘이 없고, 신료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려 끝도 없는 말싸움을 벌인다. 임금의 안위와 국가의 존망은 위태로운데 신료들은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말로써 날이 새고 말로써 날이 진다. 김훈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택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소통과 실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말들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들로 무성할 따름이다. 제각기 명분과 실질을 내세워 대립하는 말들은 의미를 싣지 못한 까닭에 공중에서 엉켰다가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 무성한 말들에 사는 법이 담겨 있지 않기에 이 말들은 비루하다. 얼어 죽고 굶어죽는 군졸들조차 비루한 말들을 일으켜 국가 존망의 위기를 가리려는 신료들의 허망한 몸짓을 드러내놓고 비웃는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삶의 길이고, 가야 할 길이 죽음의 길일진대, 가지 말아야 할 길 앞에서 자존은 치욕으로 물들고, 가야 할 길 앞에서 명분은 죽음으로 덧없어지는 까닭에 인조의 무력함은 깊어진다. 그 두 길 위에서 신료들은 진퇴를 분별할 수 없는 임금의 무력함을 말로써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죽기로 싸우자는 김상헌의 길이나 적에게 화평을 구해 종묘사직을 살리자는 최명길의 길은 겉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다르지 않다. 살고자 하는 길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고자 하는 길은 치욕으로 이어지는데, 병자년 겨울 남한산성에서의 죽음과 치욕은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금이 가야 할 길이 치욕임을 알고 그 치욕을 명분으로 가리기 위해 말로써 싸운다. 봉건왕조 시대에 신료들의 삶과 죽음이 자신의 선택에 있지 않고, 임금이 감당해야 할 형편과 운명에 복속돼 있음을 아는 것이다.
김훈 자신은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고통받는 자의 편이라고 한다. 내 생각엔 작가가 옹호하는 것은 개별자가 감당하는 허무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양주 석실에서 조정이 파천했다는 급보를 받고 혼자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송파 나루에서 사공의 인도로 강을 건넌 뒤 김상헌은 사공의 목을 벤다. 산 생명의 목을 간단하게 베어버리는 김상현의 칼에서 윤리성은 모호하다. 김상헌은 왜 사공을 목을 베었을까?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한다는 사공이 청병에 협조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서? 그것은 궁색하다. 사공이 아니더라도 청병은 강을 건너고 조선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을 에워쌀 것이다. 김상헌이 사공의 목을 벤 것은 그의 비루함 때문이다. 사공은 어가를 인도해 강을 건너게 했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한 것에 툴툴댄다. 사공은 청병을 인도하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강가를 어슬렁거린다. 김상헌은 그런 사공 앞에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하고 절망한다. 국가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김상헌의 고통이 오늘 무엇을 먹고 삶을 연명할 것인가로 걱정하는 사공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의라고 믿는 것에 잇댄 고통을 가진 김상헌의 칼은 윤리적 갈등 없이 사공의 목을 벤다. 칼을 들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가게 한 것은 김상헌의 윤리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김상헌의 허무요,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허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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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김상헌은 성 안으로 흘러들어온 사공의 딸 나루를 거둬 이 소설에서 가장 의롭고 꿋꿋한 인물인 서날쇠에게 장래를 의탁한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투항함으로써 병자년의 전쟁은 끝난다. 호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서날쇠는 생업의 현장인 대장간으로 돌아온다. 서날쇠가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치른다. 이게 ‘남한산성’의 끝이다. 이 어린 여자가 흘린 초경의 피가 사내들이 치른 치욕을 씻길 피라는 걸 암시하는 대목이다.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작가 김훈에 대하여......
김훈(金薰, 1948년 5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 겸 기자 또는 자전거 레이서이다.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작가가 언론계에 몸담고 있을 때 신군부에 의해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쓴 모양이다. 한마디로 권력에 아부했다는 비판이다. 그 문제에 대한 주변의 비난에 대해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쓰지 않았다면 다른눔이 썼을 것이고...난 살아 남기 위해서 썼다. 난 그것을 쓰면서 나를 감독하던 보안사눔한테 보안사에 끌려간 동료들을 때리지는 말라고 부탁했다. 계들이 맞는 것을 생각하면 잠이 안왔어. 진짜 치가 떨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펜은 칼보다 강하지 못했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굴종할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어느 시대나 변절자, 압잡이, 매국노가 성행하는 것은 모두가 억압받고 고통당하던가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침 대로 살아기지 못하는 것처럼, 작가도 마찬가지 글에 나타난 이상대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외의 저서로 독서 에세이집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자전거여행』,『원형의 섬 진도』, 시론집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 등이 있다.
수상작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 단편 〈화장〉으로 「이상문학상」, 2005년에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문학상」, 2007년에 《남한산성》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기자로서는 2002년 서울 언론인클럽 언론상 기획취재상을 받았다.
경력
1973 ~ 한국일보 입사
- 시사저널 편집국장
-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
저서
소설
단편
- 〈언니의 폐경〉 (2005)
- 〈화장〉
단편집
- 《강산무진》 (2006)
장편
- 《흑산》 (2011)
- 《내 젊은 날의 숲》 (2010)
- 《공무도하》 (2009)
- 《남한산성》 (2007)
- 《개》 (2005)
- 《현의 노래》 (2004)
- 《칼의 노래》 (2001)
-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1994)
에세이
- 《바다의 기별》 (2008)
- 《자전거 여행 2》 (2004)
- 《밥벌이의 지겨움》 (2003)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2002)
- 《자전거 여행》 (2000)
- 《내가 읽은 책과 세상》 (1996)
- 《풍경과 상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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