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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97 : 조선의 역사 239 (제16대 인조실록 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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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97 : 조선의 역사 239 (제16대 인조실록 14)

두바퀴인생 2012. 9. 3. 16:26

 

 

 

 

한국의 역사 697 : 조선의 역사 239 (제16대 인조실록 14)

 

 

 

                                            

                                                                               남한산성                                       

                                                                                                                                                                                   

 

제16대 인조실록(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4. 인조시대의 변란들

  

 

병자호란 (丙子胡亂) 개요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홍타이지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골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어디까지나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호란'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병자호란
Namhan Moutain Castle 036.jpg
남한산성 수어장대
날짜 1636년 12월-1637년 1월
장소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결과 청나라의 승리, 삼전도의 굴욕
이유 조선의 척화배금 외교
교전국
청나라 조선
지휘관
청 태종
다이샨
잉굴다이
마푸타
사르후다
양고리
임경업
신경원
홍명구
김준용
민영
병력
12만 8000명 정확하지 않음
피해 규모
정확하지 않음 정확하지 않음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조선은 강화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친명배금 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 당시 청으로 국호를 고친 홍타이지(숭덕제)는 명과의 전면전 전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고 기근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 타개를 위해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키려 했으며, 1636년 12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이들에게 쫓겨 남한산성으로 조정을 옮긴 인조는 끝까지 대항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해 패배하고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하였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비롯한 수십여명이 청나라에 끌려간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청군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무시하고 쾌속 진격, 임금인 인조를 사로잡는 것만을 목표로 했으므로, 병자호란이 실제 조선에 끼친 인명·재산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를 자처하런 조선에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이후 임경업을 영웅으로 묘사한 《임경업전》이나 《박씨전》등의 군담 소설의 소재가 될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주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인해 정립된 청과 조선의 역학관계는 이후 청일전쟁 이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할 때까지 약 250여년간 계속되었다.

 

배경

진족은 그들의 조상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은 명나라와 조선 모두에 대하여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진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여진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명나라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갔는데,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명나라의 몰락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해 수세에 몰리자 명나라는 조선에게 소총수 7000명을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군대를 파견하지 말 것을 조선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나라의 요구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되 파견군 장수 강홍립에게 싸움이 시작될 경우 항복해 조선의 파병이 부득이 했음을 설명하도록 하여 화평을 성립시켰다.

 

정묘호란

1623년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급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서인들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요시했고, 이들은 광해군의 중립적인 대외정책을 기존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명나라에 대한 전통적 의리를 지키려 했다. 또한 후금에서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정책도 변하였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과 적대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정벌할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였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과 1619년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을 데리고, 조선을 침범한다.

 

1627년(인조 5년) 그는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3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공격해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북변의 군사 체계가 붕괴된 상태였던 조선은 수세에 몰렸고 조선 정부 내에서도 화의론이 대세를 이루고 후금 또한 장기적인 출병이 어려웠기 때문에 전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청군은 약 두 달만에 강화조약을 맺고 철수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을 맺게 되었다.

 

 

정묘호란 후 양국 관계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여러 요구를 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지원과 명나라 정벌에 사용할 병선의 제공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적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적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이 대두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음력 2월에 잉굴다(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홍타이지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정부도 이같이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척화론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의 기운으로 기울어졌으며, 드디어 8도에 선전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

 

그해 음력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淸), 연호를 숭덕이라 고친 홍타이지(청 태종)는 조선의 이러한 도전적 태도에 대하여 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전쟁의 발발

 

1636년 12월 2일(음력), 홍타이지가 이끄는 약 10만의 청군이 압록감을 도하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 사실이 한성에 알려진 것은 12월 12일이었는데, 이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다. 청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청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시간이 부족하자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으려 했다. (납서는 작게 쓴 글씨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를 말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펼쳤기 때문에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와해되었다. 조정호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7000여명의 근왕군을 규합,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 사이에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울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따라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 또한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가 납서를 받은 것은 12월 18일이었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월 2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불화살로 남한산성에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쪽의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했다. 근왕군은 10여차례의 공격을 방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탄약과 화살이 바닥났고, 지휘관인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 등이 다수 전사했으므로 더 이상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쪽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하해 버렸으므로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8일 강원도 금화 부근에서 청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온 청군을 격퇴하는데에는 성공했으나, 화살과 탄약등이 떨어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의 명령을 받았다. 29일 6000여명의 병력을 소집한 그는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조우했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고, 수원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전으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해 버렸다.

 

쌍령 전투

한편,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8000여명 이상의 병력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인근의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은 300여기의 기병과 천여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의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대의 돌격에 겁을 먹은 병력이 거리를 재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전부 소모하게 된다. 청군은 일단 후퇴 후 조선군의 화약이 소모된 것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 허완이 이끄는 좌군은 완전히 와해되고 허완 역시 전사했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분투했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 화약이 폭발, 군사 수십이 폭사하고 전선이 무너져 버렸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이 총공격하자 우군 역시 완전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 전사했다.

 

결국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몇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8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 의해 각개격파 당함으로써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더 이상의 근왕군은 조직되지 못하였다.

 

기근과 굶주림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데다 그 진격 속도가 워낙 빨랐으므로, 전국 각지에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전략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 또한 청군의 별동대에 각개격파 당함으로써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으며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의 청군에 대한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또한 조선군은 애초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한 것이었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1만 2천의 군사와 수만의 백성들을 지탱할 수 있는 비축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고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의 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왕인 인조조차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1월 10일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청군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을 가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공격했고, 직접적인 피해는 경미하였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소현세자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이것으로써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오게 되었다.

 

항복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

 

 

항례 때 맺은 화약(和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와 교통을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을 맺고 사호(私好 : 사사로운 친분)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 종의 물품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의 사신은 명나라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할 것.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으로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백성들은 몽고군에 포로가 된 자들을 제외하고도 심양 인간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소현세자봉림대군의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윤집·오달제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다. 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의 자녀와 관리들 그리고 여인들이 청나라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에 이르렀다.(일부에서는 부녀자만 50만이라는 기록도 있슴)

 

한양의 경우 종로광통교 일대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도시들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는 노력을 물거품이 되게 하였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北伐)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으니, 임경업 등이 명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를 치려다 실패한 일 등이 그것이다.

 

 

영향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관계를 맺게 되는 사실에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이러한 영향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며 《박씨전》, 《임경업전》과 같은 문학 작품이 쓰였다. 청나라는 19세기부터 서구 열강의 함포에 압도되어 강제 개항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서서히 잃어갔다.

 

그러나 전쟁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독립적인 국가와 국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이후 백두산정계비로 국경을 명확히한 것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북벌 운동

두 차례의 호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정부나 백성 모두가 청나라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의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중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였고, 이에 따라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빈번해졌다. 18세기 후반에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러시아가 침략해오자 청나라는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나선정벌).